[알기쉬운 불교] 도道를 구하는 사람

2009-03-14     교학부

  1. 선재동자의 구도

  옛날에 선재(善財)라는 도를 구하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부처님의 탑묘를 예배하며 五三여러 선지식을 차례로 찾아가며 수행의 길에 올랐다.

  이 청년은 한결같이 법을 구하고 바로 깨달음을 얻기를 발원하고 길을 나섰다.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는 어부를 찾아가서 바다의 불가사의한 여러 일에서 얻은 귀한 가르침을 듣기도 하고 사람의 병을 고쳐주는 의사를 찾아가서는 사람을 대하는 마음은 자비이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으며, 재산을 많이 쌓은 장자를 만나서는 온갖 것을 모두가 그대로 걸림이 없는 힘을 갖추고 있다는 가르침을 배웠고, 또한 좌선하는 스님을 찾아가서는 그 고요한 마음이 형상으로 나타나서 사람들의 마음을 맑히고 불가사의한 힘을 주는 것을 보았다. 또 마음이 고상한 여성을 만나서는 자비한 말과 뜨거운 봉사정신을 배웠으며 뼈를 부수는 고행을 하면서 도를 구하는 행자를 만나서는 참으로 도를 구하는데는 칼산에도 올라가고 불바다라도 헤쳐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와같이 하여 선재는 참된 믿음만 있으면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이 모두 다 거룩한 법인 것을 알게 되었다. 연약한 여성에도 깨달음의 길이 있고 거리를 뛰노는 어린이들에게도 순진한 마음이 있는것을 보았으며 순박하고 자상한 사람을 만나서는 법을 따르는 밝은 지혜를 보았다.

  향을 만드는 데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으며 꽃을 장식하는 데도 깨달음이 있으며 재판을 하고 형별을 주는 속에도 자비의 눈이 열려 있고 외도의 삿된 도사에게도 바른 인도의 손길이 있는 것을 알았다.

  선재는 이와같이 도를 구하는 행각길에서 여러 사람들에게서 가르침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숲에 들어가면 나무의 흔들림속에서도 법문을 들었으며 산에 들어가서는 산 하나하나가 장중히 자리잡은 것에서도 법문을 들었다. 태양의 빛남, 별의 반짝임, 겨울의 물소리 산새소리에서도 선재의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법으로서 축축히 채워주지 않는 것은 없었다.

  선재는 도처에서 도를 묻고 도처에서 진실한 말씀을 들었으며 도처에서 깨달음의 모습을 보았다.

  진실로 깨달음을 구하자면 마음의 집을 지키고 마음의 집이 장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경건하게 마음의 집문을 열고 부처님을 청하여 모시며 신심의 꽃을 공양하고 환희의 향을 바치지 않으면 안될것을 그는 배웠다.

  산하대지는 말할 것도 없고 상공업자와 가지가지 처지에 있는 남녀들과 노인. 장년. 청년, 또는 어린이도 만나고 국가의 정치. 경제. 법제 등 온갖 일을 맡고 있는 사람들도 만났으며 가정인으로써 부모 친속 형제와도 만나 여러 사람들에게서 하나하나 높은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구도행각에서 항상 그를 인도한 도사는 문수보살이다. (화엄경)

  도를 구하는 보살은 ‘내 신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오직 무상도를 아낀다’고 발심하여야 하며 공(空), 무상(無相). 무작(無作)의 가르침을 믿고 알아서 모든 상을 여의어 온갖 것에 집착하는 유견(有見)을 여의고 외견(外見)이나 인견이나 아견(我見)을 여의어 한결같이높은도를 구하여 선지식에 친근하야 공. 무상. 무작.무생(無生). 무멸(無滅)의 법을 몸소 배워야 한다.

  비유하면 큰 바다의 물을 혼자서 계량하고자 할 때 긴 세월동안 끊임없이 노력하면 마침내 그 바닥을 드러낼 수 있는거와 같이 만약 사람이 지극한 마음으로 도를 구하고 정진한다면 반드시 그 목적을 달 할 수 있다. 어떤 원이라도 반드시 이룰 수 있는 것이다.

  2 계정혜 三학

  여기에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이 배워야 할 세가지가 있다. 즉 계(戒). 정(定). 혜(慧)의 三학이다.

  계학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또는 수행자로서  지키지 않으먼 안될 계를 지키며 몸을 고르고 마음을 고르며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다섯가지 감각의 창구를 지켜 적은 죄도 두려워하고 지성스러운 행을 힘써 닦는 것이다.

  정학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길인 것을 밝게 알아서 깨달음을 얻는 지혜를 닦는 것이다. 이 三학을 배우는 자를 부처님의 제자라 한다.

  나귀가 소같은 털빛도 아니고 울음소리도 다르며 뿔도 없으면서 소떼(牛君)의 뒤를 따라오면서 ‘나도 소다’한다고 하여도 아무도 신용하지 않는다. 그와같이 계정혜의 三학을 배우지 아니하면서 ‘나는 도를 구하는 자다. 불제자다.’하더라도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농부가 가을의 추수를 얻기 위해서 봄에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며 물을 주고 김을 맨다.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도 그와같이 반드시 이 三학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농부가 설사 오늘 중에 싹이나서 내일 중에 이삭을 패고 모레에는 거둬들이게 되기를 바라더라도 그것은 될 수 없는 거와 같이 깨달음을 구하는 것도 오늘 번뇌를 끊고 내일 집착을 없애며 모레 깨달음을 얻는 불가사의한 것은 어려운 것이다.

  종자는 뿌려진 후 농부의 고생과 계절의 육성을 힘입어서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다. 깨달음 얻는 데도 그와같이 계정혜의 三학을 닦고 있으면 점차 번뇌가 사라지고 집착을 여의며 깨달을 때가 오는 것이다.(아함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