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가슴 감싸안는 자비의 손길되어

대구 불교한방병원 부원장 원각행 김웅수 보살

2009-03-09     황찬익

의술은 인술이라고 한다. 이 말을 불교적으로 뜻풀이해본다면 아마도 중생에 대한 대자대비의 원력을 갖추어 질병에 고통 받는 중생을 그 질병으로부터 건져낸다는 뜻일 것이다. 예부터 영남지방의 한약재 집하장으로 유명했던 달구벌에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한방병원이 생긴 것은 지난 87년 6월 15일, 약전(藥田) 김신석 원장과 그의 친누나이자 현재 부원장인 원각행(圓覺行) 김웅수 보살은 우리 불교 현실에서는 가히 모험이랄 수 있는 일을 시작했다. ‘불교’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한방병원을 세우겠다는 그 뜻은 당시로서는 커다란 모험이라 불러 마땅한 것이었다.

 “스님들이 맹장염 같은 간단한 병에 걸려서도 기독교병원에는 가지 않겠다고 그냥 버티다가 더 큰 병으로 번지는 걸 보아오면서 꼭 불교병원, 그중에서도 한방병원을 세워야겠다는 뜻을 가졌습니다. 동생도 저도 원래는 약대를 나온 약사였습니다만 동생은 어려서부터 불교종단의 종비 장학금을 받고 학교를 다녔고, 저의 집안은 이미 모두 불교에 대한 신심이 돈독했었기 때문에 쉽게 결정하고 일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렵게 학비를 조달하며 학교를 나온 원장이었기에 몇 번이나 출가를 결심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의치 않자 약대를 졸업하고 나서 10여 년을 약사생활을 했다. 이 때 병으로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을 항상 접해 왔던 것이 오늘의 불교한방병원의 원력을 차분히 다져왔던 계기가 되었다. 원각행 보살은 함께 약국 일을 하던 동생에게 다시 동국대 한의학과를 들어갈 것을 권하였고 원장도 쉽게 응했다고 한다.

 늦게 다시 시작한 공부를 큰 어려움 없이 치러낸 것은 10남매 중 바로 윗 누님인 원각행 보살의 헌신적인 도움도 컸지만 원장이 애초부터, 가지고 있던 식(識)의 맑기나 신기 때문이라고 주변에서는 이야기한다.

 이렇게 준비과정을 치러내면서 병원문을 열 때에는 오히려 스님들 중에서 ‘불교’라는 이름을 밝히면 경영이 되겠는가고 만류하시던 분들까지 계셨다 한다. 하지만 이들 남매에게는 앞으로 겪어내야 할 일파만파의 파도에 대한 걱정보다도 먼저 앞섰던 것이 커다란 원력의 자신감이었다. 불자들만을 상대해서라도 어떻게든 이끌어 나가겠노라고 하는 굳은 뜻은 이미 어떤 상황이 닥쳐와도 굽히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한 불교한방병원이었다. 손에는 자기 자본은 거의 없었고, 병원 건물도 현재의 건물 바로 옆에 있는 허름한 건물의 2개 층을 임대해서 시작했다. 병상이 20개, 의료진이라야 원장과 간호원 몇 명뿐....

 “처음에는 너무 힘들었어요. 지금 돌아보면 정말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낸 듯이 뿌듯하기는 하지만 다가오는 시련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때론 찾아오시는 스님들까지도 원망하기도 했었죠. 불교를 드러내고 하다 보니 민원이 발생하기도 했고 괜한 오해도 있었어요. 스님중의 어떤 분은 돈을 받는다고 뭐라 하시고, 또 다른 분은 받지 않는다고 뭐라 하시기도 해서 시작해놓고 몇 개월간은 눈에서 눈물자국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그때마다 늦게 시작한 내 탓으로 돌리고 매일 원력을 새롭게 세워 기도하면 부처님께서 다 들어주시는 것 같았어요. 차츰 이일은 내 일이 아니고 부처님의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나니 보다 충실하게 되고, 부처님의 하시는 일엔 지옥에까지 가서라도 하겠다는 다짐이 생기니까 시작한 지 5년이 지난 지금엔 오늘의 모습에까지 이르게 되더군요.”

 사람이 주어진 일을 다 하면 다음에는 하늘이 도와 그 일이 더욱 풍성하고 번창하게 되는가 보다. 또 화가 복이 된다고도 한다. 2년 전 처음 문을 열었던 건물의 주인이 갑작스레 건물을 비울 것을 요구하여 겨우겨우 옮긴 곳이 지금의 건물이다. 원래 여관이던 곳을 증개축하여 이사했는데 지금은 6층 건물이 모두 빈 방 없이 사용되고 옥상까지도 약재를 보관하기도 하고, 탕재를 만드는 곳으로 이용될 정도다. 이렇게 잘되는 것을 보고 바로 옆에는 비슷한 이름의 또 다른 한방병원이 생기기도 했다.

 웬만한 의료기재들이 방마다 가득차고 이젠 거의 완벽한 수준의 한방병원이 되었지만 단 하나 수술실이 없다는 점이 앞으로 조만간 갖춰야할 목표라 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정도로 그치는 것도 아니다. 기왕에 불교병원의 이름을 달고 시작했으니 만큼 세계 최대 최고의 병원으로 만들어보고 싶은 것이 꿈이란다.

 초창기부터 이들 남매와 함께 병원에서 온갖 어려움을 함께 치러내시고 지금까지 병원내의 ‘정신적 의사’ 역할을 수행해 오신 일휴 스님은 ‘이들 두 남매는 전생부터 원력의 보살’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6층에 있는 병원 내 법당에서 직원들과 환자를 상대로 법회를 열고 아침마다에는 방송 법회를 하며 병실을 탐방하는 것이 여느 다른 병원들과 다른 이곳 ‘불교한방병원’의 특징이다. 또한 직원연수나 수련법회를 일정 시기별로 갖고 연꽃마을, 소쩍새 마을 등 불교복지단체는 물론 각 사찰들에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행사 때마다 나가서 무료 진료행사를 하는일, 또는 양로원, 빈민촌이나 심지어 신부님들이 운영하는 나사렛마을과 같은 곳에 나가 초종교적 진료활동을 하는 일 따위는 이곳 불교한방병원의 자랑거리 중의 하나다. 부르는 곳이 있으면 전국의 어느 곳에나 앰블런스가 갈 것이라는 말에서 자비행의 원력의 깊이가 엿보이기도 한다. 앞으로 한층 진일보하여 이 지방의 불교 복지원, 양로원 등을 운영할 예정이라 한다. 이미 부지를 확보하여 서서히 준비단계에 접어든 인상이 짙다.

 마침 기자들이 찾았던 기간이 티벳 승려들이 대구를 방문해서 이 병원에서 티벳 만다라를 제작하고 회향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여서 이 행사를 준비했던 원각행 보살은 얼굴에 피로함이 역력히 보였다. 하지만 이 일 말고도 선덕여왕 숭모회니 여명라이온스클럽이니 이 지역 사회를 위한 사회사업에도 역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원각행 김웅수 보살은 스스로 이 병원의 ‘원주’라 칭한다. 항상 많은 일 속에서도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자세를 낮게 해서 임한다. 자신보다는 동생인 원장을 드러내고자 하는 다사로운 마음 씀씀이가 곱다.

 원각행 보살 남매는 어쩌면 일휴스님의 말씀대로 전생부터 의료 활동을 통해 중생을 제도하라는 약사여래의 가피를 입은 사람들이란 생각이 든다. 집안 식구중에 유난히 한의사 약사들이 많은 점도 예사롭게 봐지지 않는다. 10남매 중 막내도 뒤늦게 한의학 공부를 해서 한의사가 되었고 원장의 부인도 한의사라 한다.

 가끔 가까운 해인사나 멀리 지리산중 사찰은 물론 송광사까지 가서 예불드리는 돈독한 신심에 이제는 그 곳 큰스님들까지 병원으로 모셔와 법문을 듣는 기회를 만들 수 있었다. 병원 6층, 10평 남짓한 법당에는 환자는 환자복을 입은 채 의사나 간호원은 하얀 가운을 걸치고 앞 벽면에 모신 약사여래를 우러르며 빨리 쾌유하기를, 빨리 쾌차시킬 수 있길 간절히 빈다. 차라리 고요하기만 한 목탁소리가, 염불소리가 이 곳 법당으로부터 병실마다 울려 퍼지고 병원문 밖으로 더 멀리 퍼져나가고 인간계를 넘어 온 세상 중생들에게 다가간다.

 항상 결과에 연연치 않고 현재 열심히 일하는 것이 가장 슬기롭게 사는 것이라 믿는 이들 남매는 분명 자랑차고 부끄럼 없는 우리 불교 사회사업의 표상이 되고 있다. 원각행 보살의 말대로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은 그들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모든 불자들이 격려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고 마음으로나마 성원을 보낼 때, 진정 이들의 노력은 부처님의 대자비를 이 땅에 실현해내는, 불자 모두가 참여하는, 부처님의 일이 될 것이다.

 불교한방병원은 이제 128명의 의료진, 96개의 병상을 갖춘 명실공히 종합한방병원의 위상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아직 모자란 부분인 수술실도 운용해 나갈 날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짧은 인터뷰 시간에도 쉴 새 없이 전화 받고 손님을 맞는 원각행 보살의 바쁜 일과 속에서 슬며시 엿볼 수 있었다.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 속에서 의식도 못하는 사이에 모든 불자가 진정 자랑으로 삼을 만한 국내 유수의 불교한방병원의 위용이 눈앞에 펼쳐져 가고 있다. 거기에 두남매의 땀방울과 함빡 웃는 모습이 겹쳐 진다.

글- 황찬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