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같았던 스승 송암 스님

흠모 / 송암 스님의 제자 동희 스님

2009-03-03     관리자
▲ 동희 스님
이 시대 최고의 어장, 타고난 범승 _____
자인사 법당으로 들어섰을 때, 동희 스님은 이제 막 계를 받은 사미니처럼 우리를 맞이했다. 낡은 승복에 행건을 차고 가지런히 합장한 스님의 모습은 그림처럼 고요했다. 인사를 올리려 하자 당신이 먼저 시린 바닥에 몸을 깊숙이 낮추었다. 몸짓의 경건함이 번잡한 생각의 어로를 끊어놓는 순간이었다. 세수 65세, 세월의 광풍 속에서도 스님은 가사 한 올 흩뜨리지 않고 걸어온 듯했다. 실제로 스님이 걸어온 세월은 거친 광풍과도 같았을 것이다. 조계종 스님이자 비구니 스님으로서, 태고종 스님이자 비구 스님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리고 비구니 최초로 영산재 이수자가 되었으니 어찌 그 세월이 간단했겠는가.
“스승이 계셨으니까요. 송암 스님은 제게 부모 같은 스승이셨습니다. 저는 스님을 어린아이처럼 따라다녔고, 우리 스님은 그저 따라다니기만 해도 공부가 되는 스승이셨거든요. 차를 타서도 걸어갈 때도 비행기에서도 스님은 염불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스승을 보면서 어떻게 힘들다고 불평하고 다른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저 배우고 익히며 살아온 세월이었습니다.”
▲ 송암 스님
송암 스님은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 보유자로 지정된 이 시대 최고의 어장(魚丈: 범패를 가르치는 스님)이다. 범패(梵唄: 불교에서 재를 올릴 때 쓰는 의식 음악)를 배운 지 석 달 만에 남을 가르치고 10년 과정을 단 2년 만에 완성했을 정도로 타고난 범승(梵僧)이었다. 스님은 재능만 타고난 것이 아니라 노력도 타고났다고 한다. 악보 없이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는 것이 범패인 만큼, 행여 음을 놓칠 새라 행주좌와 어묵동정하며 본래의 음을 지켜가기 위해 노력했던 이가 송암 스님이다. 그만큼 송암 스님의 제자는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동희 스님은 특별한 제자였다. 유일한 비구니 제자였던 까닭이다.
“송암 스님이 청량사 스님들에게 염불과 의식작법을 가르쳐주기 위해 자주 찾아오셨는데요. 저는 배울 자격도 아직 안 되서 방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저 문 밖에서 귀동냥해서 혼자 연습하고 그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를 보시고 염불을 시켜보시데요. 과히 못하진 않았는지 열세 살 때부터 스님 따라다니며 배우게 됐습니다.”

그저 따라다니기만 해도 배움이 되는 스승 _____ 동희 스님은 무작정 좋았다고 했다. 얼마나 좋았으면 어른 스님들 눈을 피해 몰래 냄비 뚜껑을 들고 뒷산에 올라가 바라춤을 추고, 염불을 익히곤 했을까. 청량사 은사스님은 그런 동희 스님을 못내 못마땅하고 염려스러워 했다고 한다. 달래도 보고 야단도 치고 급기야 회초리까지 들고 범패 배우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스님은 끝내 당신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송암 스님이 그리 따뜻한 스승은 아니었다고 한다. 아무리 열심히 연습을 해도 돌아오는 것을 꾸지람밖에 없었다.
송암 스님은 다른 일에는 너그러웠지만, 범패를 잘 못하거나 배운 대로 하지 않은 것은 용서하지 않았다고 한다. 범패란 악보가 없이 구전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소리가 뼈에 박히도록 부단히 새겨야지만 처음의 뜻이 왜곡되지 않고 그대로 전승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던 것이다.
“송암 스님은 모든 요집을 달달 다 외우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염불하실 때면 항상 경전을 펴놓고 하셨어요. 혹시라도 잘못된 말을 하게 될까 스스로를 경계하고 또 경계하셨던 겁니다. 그리고 몇 시간, 어떨 때는 며칠 동안 영산재가 이어지는데, 자세 한번 흩뜨리는 법이 없으세요. 오히려 저희들은 힘이 들어서 몸도 움직거리고 꾀가 나는데, 스승이 그러고 계시니 어쩌겠습니까? ”

“너무 울면 아프다. 그만 울어라.” _____ 1973년 송암 스님은 당신이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된 후, 곧 동희 스님을 데리고 문화재청을 찾아갔다고 한다. 동희 스님을 영산재 이수자로 지정해줄 것을 청원하기 위한 걸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구니가 영산재를 한 예가 없기 때문에 인정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며칠 후 송암 스님은 다시 서류를 준비해 동희 스님을 문화재청에 보냈다. 대답은 역시 ‘노(No)’였다. 여자라서 안 된다는 답변만 재차 돌아왔을 뿐이다.
“저는 그냥 서류를 던져놓고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나를 범패승으로 인정 안 한다고 제가 범패승이 아닙니까? 내가 좋아서 하는 수행이니 이수자가 안 되도 좋다 하며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스님이 동냥 보내놨더니 쪽박까지 깨고 왔다며 얼마나 역정을 내셨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애를 쓰셔서 마침내 이수자로 저를 등록시켰습니다.”
무려 20여 년이 지난 90년 중반의 일이었다. 칭찬은 아끼고 꾸지람만 주었던 노사였으나, 마음만은 누구보다 동희 스님을 아끼고 인정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새끼 대처’ ‘염불중’, 동희 스님은 그렇게 불렸다. 조계종에서는 염불중이라고 하대를 하고 심지어는 태고종 스님을 따라다닌다고 야단을 맞아야 했다. 그리고 태고종에서는 밤색 가사를 두른 조계종 스님이 왜 송암 스님을 모시냐고 야단을 했다.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우리 스님도 주변 얘기 다 접고 범패 이야기만 하셨습니다. 그런 스님을 스승으로 모실 수 있다는 그 인연에만 감사했습니다. 오히려 정말 저를 힘들게 하고 아프게 했던 것은 염불이 잘 안 될 때, 열심히 했는데 스님이 야단칠 때였습니다. 저는 혼나도 염불하고 좋은 일 있어도 염불하고 그렇게 마음을 다스려갔습니다. 제가 야단맞고 엉엉 울면 우리 스님은 그대로 둬요. 그래도 울음을 멈추지 않으면 ‘너무 울면 아프다. 그만 울어라.’ 하시곤 했습니다. 그러면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내가 있지 않니!” _____ 1995년 12월 3일, 동희 스님은 특별한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그동안 배운 것을 은사스님에게 강을 받치는 심정으로 보여드리고 싶어 준비한 공연이었다. 그러나 송암 스님은 크게 역정을 내며 나무랐다. “어디 감히 부처님께 올리는 의식을 공연장에 올리냐”며 크게 야단하셨던 것이다. 지금이야 영산재가 불교문화의 정수로 세계 곳곳에서 공연되고 무대에 올려지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만날 ‘네’만 하던 동희 스님도 이번만은 고집을 꺽지 않았다. 그동안 주신 가르침에 한번은 감사드리고 싶었던 까닭이다. 스승의 손을 잡고 무대에 올라 그간의 배움을 회향하던 날, 동희 스님은 40년 만에 처음으로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범패는 우리 벽심(송암 스님이 주신 법명)이처럼 해야 한다. 잘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공연을 마치고 열나흘 뒤 동희 스님 절에 불이 나고 말았다. 40년 동안 모아온 자료며, 배움의 흔적들이 깡그리 재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동희 스님은 크게 낙심했다. 그 좋아하던 염불도 싫어지고, 스님 노릇도 그만두고 싶어졌다.
“송암 스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스님 저 이제 다 그만둘랍니다. 스님이 주신 자료도 없고 의욕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송암 스님이 그러셔요. ‘내가 있지 않니!’”
그렇게 평생 곁에 계셔주실 것 같았던 스승이 떠난 지 어느덧 9년, 그러나 동희 스님은 지금도 사찰을 들고 날 때마다 송암 스님 영전 앞에서 인사를 올린다. 송암 스님으로부터 범패를 배운 지 53년, 지금도 동희 스님은 당신의 부족함이 마냥 부끄럽다고 했다.
“말없는 몸짓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범패입니다. 우리 스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범패를 하지 않아도 가만히 앉아 있어도 범성이 전해지는 날까지 정진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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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암 스님 _ 1915년 서울 출생. 1933년 영진불교전문강원을 수료하고, 신촌 봉원사에서 운허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후 범패 중흥조 월하 스님으로부터 범패를 전수 받았으며, 1969년 옥천범음회를 설립했다.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 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1987년 영산재보존회 총재로 취임했다. 1994년 영산재보존회 부설 옥천범음대학 초대학장을 지냈고, 옥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2000년 2월 1일, 세수 86세 법랍 67세로 입적했다.

동희 스님 _ 1945년 출생. 1950년 6세 때 서울 청량사에서 상길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3세에 범패 부문 보유자인 송암 스님 문하에 정식 입문하였으며, 1995년 비구니 최초로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 이수자로 인정되었다. 그동안 국내는 물론 미국, 일본, 프랑스, 독일, 러시아, 호주 등 세계 각지에서 범음의 나래를 펼쳐왔다. 현재 서울 자인사 주지로서, 동희범음회 대표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