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간당(淸簡堂)에서

선어유희[禪語遊戱]

2009-03-03     관리자
온 산하대지가 있는 그대로 자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겨울의 참맛은 이것이다.
청간당의 창호 너머 보이는 만수산도 그랬다. 경내의 몇 그루 커다란 감나무는 얼어버린 감을 그대로 달고 서있는 것이 오히려 더 어색해 보였다. 그 감은 가을엔 단풍보다 곱고 노을보다 붉어 참으로 아름다웠지만.
영당 안에는 아무 것도 없고 오직 김시습(1435~1493)의 영정만이 덩그러니 걸려있다. 그의 삶만큼이나 군더더기 없는 이 자리에서 바라보는 개울 건너에는 자그마한 청간당이 자리잡고 있었다. 방 한 칸에 다상만이 놓여있는 청아한 방이다. 청간(淸簡)은 김시습의 시호이다. 부여 무량사에는 당우 두 채가 그를 언제나 기억하도록 만든다.
영정은 쏘는 듯한 눈빛에 웃음기 없는 얼굴로 미간을 약간 찌푸리고 있다. 노소(老少)의 시절을 대표하는 자화상 두 점을 남겼다고 했다. 자찬(自贊)까지 더한 그림이 지금까지 전한다. 자화상에 자찬이라. 어느 누구도 자기를 제대로 알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마음이었을 게다. 스스로 자기 비문을 쓴 선사들도 더러 있으니 별스러울 건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용을 자화자찬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자학적이다.

네 형상이 이다지도 못생기고 (爾形至眇)
네 말은 이렇게도 어리석으니 (爾言大侗)
너는 개천구덩이 버려져야 마땅하다 (宜爾置之丘壑之中)

그는 무량사에 살아서 2년밖에 머물지 못했다. 이 곳에 오게 된 사연은 의외로 간단했다.
1492년 가을 서해안 명산을 돌아다니다가 이 절에서 옛 친구인 지희(智熙) 스님을 만난 것이 그 연유였다. 하지만 시습은 이듬해 열반했다. 보령 출신 이문구 작가는 『소설 김시습』에서 “외산(外山)에 터한 고로 험하고 외진 곳이기 때문에 백년을 지나도 나를 귀찮게 할 이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라고 하여 그가 은둔한 이유를 정치적으로 설명했다.
율곡의 『김시습전』에 의하면 그의 유언대로 절 옆에 묻었다가 3년 후에 파보니 얼굴이 산 사람과 같았다. 죽고서 3년을 머문 셈이다. 중국 같았으면 등신불을 만들어 모셨을지도 모르겠다. 율곡은 그를 “유교적 가치관에 불교적 행동이 더해진 인물(心儒跡佛)”이라고 평했다. 다비를 했더니 사리가 수습되어 부도를 세웠다. 이제 무량사에 영원히 머물게 된 것이다. 절 입구에 부도가 ‘오세(五歲) 김시습지묘’라는 탑명을 새기고서 생생하게 남아있다. 오세는 신동이나 천재의 별칭이다. 그는 비석에 ‘꿈꾸다가 죽은 늙은이(夢死老)’로 써주길 바랐다고 한다. 그의 뜻과는 상관없이 후인들은 ‘천재’로만 기억했다.
그는 문학가로도 손색이 없었다. 매월당 시비는 일주문 지나 왼쪽 다리를 건너 소슬한 오솔길 한 켠에 세워져 있다. 1983년 11월 전국시가비 건립동호회에서 모신 것이다. 『매월당집』에서 가장 문학성이 높은 대표작이라고 평가한 글이 된 셈이다.

새로 돋는 반달이 나무 위에 뜨니(半輪新月上林梢)
산사의 저녁 종이 울리기 시작하네(山寺昏鍾第一鼓)
산 그림자 아른아른 찬 이슬에 젖는데(淸影漸移風露下)
뜰에 찬 서늘한 기운 창틈으로 스미네(一庭凉氣透窓凹)


그는 때론 선사였다. 법명은 설잠(雪岑)이다. 물론 승속을 자유롭게 넘나들긴 했다.
조동종 동안상찰(同安常察, ?~961) 선사의 『십현담(十玄談)』을 주해했다.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一然) 선사의 저작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도 그의 책에 전한다. 세밀한 조동가풍이 그의 기질과 일치했다고 하겠다. 굳이 법맥으로 분류한다면 조동가풍을 따랐으니 조동종 계통 선승인 셈이다. 종조인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 선사는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라는 질문에 “삼 세 근(麻三斤)”이라고 답변하였다. ‘마삼근’은 현재도 인기 있는 화두이기도 하다.
마지막 시 ‘무량사에서 병으로 눕다’는 그의 선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봄비 오락가락하는 2, 3월인데 (春雨浪浪二三月)
급작스런 병을 겨우 견디며 선방에 앉았다. (扶持暴病起禪房)
누군가에게 서쪽에서 온 법 물으려 하여도 (向生欲問西來意)
다른 스님이 거량을 짓게 할까봐 두려울 따름이라 (却恐他僧作擧揚)

‘조사서래의’를 말하고 싶은데 남들에게 법거량 하려는 상을 짓는 것으로 비칠까봐 아예 대답을 남기지 않는다고 했다. 말함없이 말하면서(無說說) 절대로 흔적마저 남기려고 하지 않는 경지(沒?迹)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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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_ 해인사로 출가했다. 해인사승가대학, 실상사 화엄학림, 동국대(경주)에서 경전과 선어록을 강의했다. 월간 「해인」 편집장과 조계종총무원 신도국장·기획국장을 거쳐 현재 재정국장 소임을 맡고 있다. 번역서에는 『선림승보전』 상·하(장경각 간)가 있다. 불교계의 여러 매체와 일간지 등에 깊이와 대중성을 함께 갖춘 글을 써왔으며, 저서로 『아름다운 인생은 얼굴에 남는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