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전쟁, 혹은 거짓말

대중문화산책 / 영화 <바디 오브 라이즈(Body of Lies)>

2009-03-03     관리자
2001년 9월 11일은 미국 역사상 잊을 수 없는 비극의 날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범하게 시작된 아침, 92명의 승객을 태운 아메리칸 항공사의 AA11편과 65명의 승객을 태운 유나이티드 항공사의 UA175편이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에 충돌, 세계 경제의 중심지 뉴욕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수천 명의 인명 피해와 수조 원에 달하는 경제적 손실을 가져온 9.11테러는 한 나라가 겪은 가슴 아픈 사건으로 치부하기엔 그 여파는 강렬하고 끈질겼다. 세계 최강국으로서의 자존심을 구길 대로 구긴 미국은 즉각 보복 전쟁을 감행했고 알 카에다 훈련 캠프와 탈레반의 군사시설을 비롯해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공격, 함락시켰다. 그러나 미국은 테러 주동자로 지목된 빈 라덴과 그의 조직을 잡는 것에 실패했고, 미국의 대테러 전쟁은 테러 조직에 대한 응징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잔인했다.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채우고도 남을 9.11테러, 그리고 이후 미국의 행보가 영화 제작의 흥미로운 소재거리가 되었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미국의 시선에서 혹은 그 반대의 시선에서 테러와 중동에 대한 공포를 풀어낸 영화와 다큐멘터리가 해마다 만들어졌다. 그 중에서 13년간 월스트리트 저널의 국제 정세 및 경제 기사를 썼던 이그나티우스의 동명원작소설을 영화화한 <바디 오브 라이즈>는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다. 감독은 비판의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어떠한 주장이나 메시지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여전히 진행 중인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논란과 함께 인간과 인생에 대한 가치들을 미묘하게 결합시켜 새로운 논점들을 제시한다.

인간 네트워크에 굴복한 디지털 기술

영화의 주요 인물은 테러 조직의 배후를 파헤치기 위해 중동 현지에 투입된 CIA 요원 페리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프레데터라는 위성시스템과 같은 최첨단 장비에 둘러싸여 전화로 명령만 해대는 호프만(러셀 크로). 페리스는 적으로 규정된 중동 지역에서 현지인처럼 살면서 그곳 사람들과의 신뢰를 통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첩보활동을 하지만, 호프만은 다소 ‘아날로그적’인 페리스의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한편, 무차별 폭탄 테러를 일으키는 조직의 배후를 찾고자 페리스는 요르단 정보국의 하니 파샤와 긴밀한 공조 관계를 맺게 되고, 파샤는 한 가지 조건을 내걸며 협조를 약속한다. 바로 ‘절대 거짓말 하지 말 것’. 그러나 페리스는 단 하나의 정보를 위해서라면 쉽사리 약속을 깨고 전쟁 중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호프만 때문에 파샤를 배신하게 되고, 결국 무기력하게 자신이 쫓던 테러 조직 ‘알 살림’의 포로가 되고 만다. 알 살림은 어떠한 통신 장비도 쓰지 않고 어떠한 디지털 장비도 없이 오로지 인간 네트워크만으로 테러를 계획하고 성공시킨다. 호프만은 그런 알 살림의 허점을 캐내기 위해 최첨단 장비에 의지해 보지만 결국 ‘인력’에는 당해내지 못한다.

무지와 무시에서 비롯된 실체 없는 두려움

‘거짓말의 실체’라는 뜻의 <바디 오브 라이즈>는 장르상 첩보 스릴러물로 분류될 수 있지만, 007 시리즈처럼 오락거리로 버무려진 영화도 아니며 그렇다고 테러에 대한 정치적 발언을 강하게 드러내는 영화도 아니다. <에어리언>, <블레이드 러너>, <글래디에이터>, <한니발>, <블랙 호크 다운>, <킹덤 오브 헤븐> 등을 연출한 리들리 스콧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러셀 크로의 조합은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멋지게 수트를 차려입은 잘 생긴
첩보원의 박진감 넘치는 액션이나 온갖 치정과 음모로 얼룩진 숨 막히는 스릴러를 기대했다면 실망감이 들 수도 있으며 애매모호하게 끝나는 결론은 영화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킨다.
물론 영화는 기본적으로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게임을 즐기듯 모니터 앞에서 버튼이나 눌러대는 호프만은 결국 디지털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아니, 디지털 문명을 거부한) 중동의 테러리스트에게 보기 좋게 당하고 만다. 호프만이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기계 문명에 대한 맹신은 인간 사이의 신뢰를 강조했던 페리스나 하니 파샤의 가치관에도 반하는 것이다. 상징적으로 호프만의 패배는 미국 CIA의 패배이지만 또 한 명의 미국인 페리스 때문에 섣불리 결론 내릴 수 없는 지점이다. 죽음 직전에 하니 파샤의 도움으로 구출된 페리스는 첩보 활동을 그만 두고 요르단에 머무른다. 그가 완전히 정착할지 혹은 미국으로 돌아갈지, 그것도 아니면 CIA 요원으로 복귀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이 지점에서 영화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관객에게 남겨놓을 뿐이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단순히 페리스와 호프만 혹은 테러 조직과 미국 CIA의 대립뿐만 아니라, 페리스가 현지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그곳 역시 한국이나 미국처럼 사람 사는 공간임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12개국을 돌며 100군데를 로케이션 한 끝에 선정된 영화 속 배경들은 첩보와 테러가 일어나지만, 한편으로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피부색 다른 남녀의 사랑이 펼쳐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굳이 정치적으로 확장하지 않더라도 <바디 오브 라이즈>는 인간 사이의 신뢰, 21세기 디지털 문명, 타 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중 등 다양한 문화 콘텍스트적 함의를 품고 있다.
이해가 부재한 공감과 존중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종교 또한 마찬가지다. 종교가 문화의 한 형태임을 고려했을 때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비난은 결국 타문화에 대한 무시와 무지의 동일어와 같다. 이러한 근거 없는 편견이 실체 없는 집단적 공포를 조장함으로써 불신과 반목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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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균민 _ 동국대학교 영화과 대학원 수료, 영화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스포츠서울, The DVD, K-bench, 무비위크 등에 영화칼럼을 기고해왔고, 현재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램 콘텐츠 팀장으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