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도 없고 열반도 없다

선가귀감 강설 13

2007-03-02     관리자


제35장
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死涅槃, 如見空花起滅.
중생이 불생불멸에서 잘못된 견해로 생사와 열반을 보는 것은,
마치 (눈병이 든 사람이) 허공에서 꽃이 피었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과 같느니라.

성품은 본래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니, 생사도 없고 열반도 없으며 허공의 꽃도 없어 불생불멸이니라. 생사를 보는 것은 마치 허공꽃이 피는 것을 보는 것과 같고, 열반을 보는 것은 마치 허공꽃이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과 같느니라.
그리하여 생기는 것은 본래 생기는 것이 아니고, 없어지는 것 역시 본래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 생사와 열반을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더 언급할 필요가 없느니라. 이런 까닭에 『사익경(思益經)』1)에서 이르셨느니라.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신 것은 중생의 제도가 아니고 오직 생사라는 견해와 열반이라는 견해, 이 두 견해의 제도일 뿐이니라.”

강설
화엄경에서 말한다. “일체 만법은 불생이고, 일체 만법은 불멸이라, 만약 이와 같이 알 것 같으면, 모든 부처가 항상 눈앞에 나타나 있을 것이니라(一切法不生, 一切法不滅, 若能如是解, 諸佛常現前).”


제36장
菩薩 度衆生入滅度, 又實無衆生得滅度.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여 열반에 들게 하였다 하더라도
진실로 열반을 얻은 중생은 (한 사람도) 없느니라.

보살은 다만 생각 생각으로써 중생을 삼느니라. 이런 까닭에 생각의 근본 자체가 공함을 깨닫는 것이 곧 중생 제도인지라, 생각이 이미 공적(空寂)하다면 진실로 따로 제도할 중생까지 없어진 것이니라. 이 글은 신해(信解)의 단계를 말한 것이니라.

강설
천수경의 끝 부분이다. 자성중생 서원도(自性衆生 誓願度), 자성 중생을 건지오리다. 중생제도라는 말이, 삼독심에 빠져 헤매는 어리석은 이웃 중생을 제도하는 것보다 자기 내부 중생 제도가 진정 급선무라는 뜻이다.
대장경의 네 가지 수직 수행 단계로 신해행증(信解行證), 혹은 신해수증(信解修證)이 있다. 초발심자는 먼저 깊은 신심으로 교리의 핵심인 불생불멸을 이해하고 그 다음에 수행으로 불생불멸을 체험 증득하여 불타의 대각, 깨달음의 부처에 도달하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도 신해행증의 이치를 설명한다.


제37장
理雖頓悟, 事非頓除.
이치는 비록 단박에 깨칠 수 있으나,
일을 당해서는 단박에 다스려지지 않느니라.

문수보살2)은 천진함을 요달한 것이고 보현보살은 연기3)를 깨달은 것이라, 아는 것은 전광석화와 같아도 행동만은 어린애와 같이 굼뜨니라. 다음 장에서는 수증(修證, 行證)의 단계를 말하느니라.

강설
『능엄경』에서 말한다. “이치의 세계에서는 바로 깨달은 즉시 어리석음이 사라지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바로 없어지지 않고 점차로 (습기가) 다 하느니라(理則頓悟 承悟竝消 事非頓除 因次第盡).”


제38장
帶邊修禪, 如蒸沙作飯. 帶殺修禪, 如塞耳叫聲. 帶偸修禪, 如漏臣求滿. 帶妄修禪, 如刻糞爲香. 縱有多智, 皆成魔道.
음란하면서 선수행을 하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느니라.
살생을 하면서 선수행을 하는 것은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는 것과 같느니라.
도둑질을 하면서 선수행을 하는 것은 새는 그릇에 가득 차기를 바라는 것과 같느니라.
거짓말을 하면서 선수행을 하는 것은 똥으로 향을 만들려는 것과 같느니라.
비록 많은 지혜가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마구니 법을 이루느니라.

이것은 수행 법칙으로써 무루(無漏)의 삼학(三學)을 밝힌 것이니라.
소승은 법을 받아 지키는 것으로 계율을 삼기 때문에 대략 그 끝을 다스리고, 대승은 마음을 가다듬어 다스리는 것으로 계율을 삼기 때문에 자세하게 그 뿌리를 끊느니라. 이런 까닭에 법의 계율은 몸으로 어기는 일이 없고, 마음의 계율은 생각으로 어기는 일까지 없느니라.
음란은 청정한 성품을 끊고, 살생은 자비스런 성품을 끊으며, 도둑질은 복덕의 성품을 끊고, 거짓말은 진실한 성품을 끊느니라. 비록 지혜를 이루어 여섯 가지 신통을 얻었다 하더라도, 만약 살생과 도둑질과 음행과 거짓말하는 일들을 끊지 못하면, 반드시 마구니의 길에 떨어져 영영 깨달음의 정로(正路)를 잃을 것이니라. 이 네 가지 계율은 백 가지 계율의 근본인 까닭에, 특별히 밝혀서 생각으로 어기지 않게 한 것이니라.
무억(無憶, 기억하지 않음)을 계(戒)라고 하고, 무념(無念, 생각이 없음)을 정(定)이라고 하며, 막망상(莫妄想, 망상하지 않음)을 혜(慧)라고 하느니라. 다시 말하면, 계는 도둑을 잡는 것이고, 정은 도둑을 묶어 놓는 것이며, 혜는 도둑을 죽이는 것이니라. 또한 계의 그릇이 온전하고 튼튼해야 정의 물이 맑고 깨끗하며, 정의 수면이 고요하고 청정해야 혜의 마음 달이 뚜렷하니라. 이 계·정·혜 삼학은 참으로 만법의 근원인 까닭에 특별히 밝혀 계·정·혜 삼학 모두가 깨어지지 않고 새지 않게 하려는 것이니라.
영산회상(靈山會上)에 어찌 무행불(無行佛)이 있을소며, 소림문하(少林門下)에 어찌 망언 조사가 있을소냐.

강설
불교 기초 강좌에서 강조하는 대승의 무루 삼학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삼학이 고루 갖추어지지 않으면 편견을 지닌 수행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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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익경(思益經): 본 이름은 『사익범천소문경(思益梵天所問經)』이다. 번역한 사람은 요진(姚秦) 삼장 법사 구마라집(鳩摩羅什)이고 4권 18품으로 이뤄져 있다. 동방 일월광(日月光) 불국(佛國)에서 온 사익이라는 범천의 천상 사람이 부처님과 문수보살, 망명(網明)보살 등과 문답하며, 모든 법의 공(空, Sunya)을 밝힌 경이다. 

2) 문수·보현: 문수보살은 부처의 본체인 눈으로 대지(大智)를 나타내고, 보현보살은 부처의 작용인 발로 대행(大行)을 나타낸다. 문수보살의 지혜(智慧)는 본래 성불의 천진면목(天眞面目) 곧 체성(體性)을 가리키며, 보현보살의 연기는 신훈(新熏)의 육도만행(六度萬行) 곧 일체 만법이 인연 따라 일어나는 작용(作用)을 가리킨다. 

3) 연기: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 빨리어는 Paticca samutppada(빠띳짜 사뭇빠다, dependent origination)이다. 인(因)이 연(緣)을 만나 과(果)를 일으키는 과정을 말한다. 불교의 핵심이다. 부처님이 성도하실 때에 보리수 아래 깨달음을 얻은 내용이 바로 연기이다. 『잡아함경』에 잘 나와 있다. 사람의 운명으로 길흉화복을 말하는 사람은 불교의 연기사상을 등진 사람이다. 지금도 절, 특히 말사나 도심포교당은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쪽에서는 정법을, 다른 한쪽에서는 역학 운명을 말한다. 간혹 사이비 불자는 절에 와서 말한다. “스님, 뭣 좀 봐주시오.” 포교의 급선무는, 이런 초심 불자에게 연기법을 먼저 가르치는 일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두 자기 마음이 길흉화복을 만든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일이다. 

삼무루학(三無漏學): 팔만대장경의 전체 내용을 모형도로 만들어서 설명한다면, 수평 구조로는 계·정·혜 삼학이고, 수직 구조로는 신·해·행·증이다. 삼무루학은 세속법인 유루(有漏)와 반대되는 계·정·혜, 곧 계율(戒律)과 선정(禪定)과 지혜(智慧)이고 이것을 줄여서 삼학(三學)이라고 말한다. 절대의 진리 세계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 삼학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고 서로 통하고 같이 이어진 까닭에 삼즉일(三卽一)이다.
육신통(六神通): 생사해탈이 자재한 깨달음에 들면 육식(六識)은 육신통으로 바뀐다. 첫째, 신족통(神足通)은 천리만리 걸림 없이 왕래하는 발의 신통력이다. 둘째, 천안통(天眼通)은 걸림 없이 모두 다 훤히 보는 눈의 신통력이다. 셋째, 천이통(天耳通)은 걸림 없이 소리를 잘 듣는 귀의 신통력이다. 넷째, 타심통(他心通)은 중생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마음의 신통력이다. 다섯째, 숙명통(宿命通)은 중생의 과거 업 등을 꿰뚫어보는 신통력이다. 여섯째, 누진통(漏盡通)은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신통력으로 가장 어려우며 깨달음의 성자만이 이 신통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