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역과 동방의 문화가 만나는 문명의 용광로, 투루판

오아시스 실크로드를 가다 12 / 중국 투루판

2008-12-29     관리자
투루판으로 들어서자, 무성한 포도덩굴을 지붕 삼아 이고 있는 간이 건물들을 볼 수 있었다. 돌궐어로 ‘풍요로운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 투루판은 사막 속 작은 오아시스이다. 버스에서 내리자, 지글지글거리는 태양열이 모든 것을 녹여버릴 듯 맹렬했다.
천산 산맥 남쪽과 북쪽으로 갈라지는 실크로드를 ‘천산 북로’와 ‘천산 남로’라고 칭하는데, 투루판은 이 갈림길에 위치하고 있어 ‘실크로드’의 요충지였다. 뜨거운 화주(火洲)의 땅이요, 모래가 많은 사주(沙洲)의 땅이며, 바람이 많은 풍주(風洲)의 땅으로 불리어져왔건만 이런 척박한 환경으로 인해 문명의 용광로 역할을 하였다. 서역에서 흘러온 문화와 동방에서 흘러온 문화가 만나 새롭게 꽃을 피운 것이다. 투루판 시내를 벗어나 외곽으로 나가면 교하고성, 고창고성, 베제클리크 석굴, 이스타나 고분군 등 많은 문화유적지가 몰려있다.
40도가 넘는 열기를 뚫고 거리로 나설 엄두가 나지 않아 호텔 내의 ‘존슨카페’에서 시원한 음료를 마시면서 시간을 보냈다. 포도덩굴 아래서 책을 읽거나 담소를 나누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숙소 주변을 산책했다. 아침의 서늘한 기운은 기대할 수도 없었다. 빵가게에는 아침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집집마다 대문이 열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인심이 좋은 동네인 것 같았다. 울긋불긋한 꽃들이 그려진 대문이 예뻐서 집 안을 기웃거렸더니, 주인이 들어오라고 손짓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집 가족들은 식탁의 한 켠을 내 주면서 같이 식사하기를 권했다. 야채와 고기를 넣고 볶은 음식 한 접시와 빵, 뜨거운 차가 식사의 전부였지만 그들의 넉넉한 인심으로 식탁은 풍성하기만 했다.
▲ 위구르인의 화려한 전통 의상을 팔고 있는 고창고성 입구의 민예품 가게
▲ 어느 위구르인 가정의 아침 식사
▲ 화려한 위구르 전통 복장을 한 무녀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현장 법사의 체취가 느껴지는 고창고성
고창고성 안으로 들어서자, 황량한 들판에 진흙 벽돌로 지어진 건물들의 잔해가 눈에 들어왔다. 5세기 초 한족 출신에 의해 세워진 고창고성은 고창국의 수도로서 번영을 누려오다가 640년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그 후에는 위구르족의 지배를 받다가 13세기 초에 몽골군에게 점령당하였다.
노새가 끄는 마차를 타고 고성 안을 둘러보았다. 진흙에 낙타털과 버드나무를 섞어 만든 벽돌로 지어진 토성(土城)이 수천 년의 세월을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연평균 강우량이 20mm도 채 되지 않는 데 비해 증발량은 3,000mm나 되는 건조한 기후 때문이다.
고창고성을 거닐다 보면 성 한가운데 왕궁 터와 설법 장소인 강당과 사원 터를 볼 수 있다. 사원 터에는 대불사(大佛寺)라는 안내판이 있어 그저 반갑기만 하다. 고창고성에는 『대당서역기』를 남긴 현장 법사의 체취가 남아있다. 현장 법사가 불교경전을 구하러 인도로 가던 도중 고창국 왕의 간청으로 이곳에서 한 달간 설법을 하였다.
현장 법사의 인품에 반한 국왕이 그를 잡고 놓아주지 않자, 현장 법사는 이곳에서 단식을 시작했다. 현장 법사가 점점 쇠약해지자 국왕은 그를 풀어주면서 세 가지의 약조를 받아냈다. 국왕과 의형제를 맺고, 앞으로 20일 동안 고창국에 머물면서 설법을 펼 것이며, 천축에서 돌아와서는 고창국에 머물러 줄 것을 약속한 후에야 현장 법사는 천축으로 떠났다. 고창국의 왕은 법복, 황금, 비단, 말 등을 여행 경비로 지원한 것은 물론이고 주변의 각국 왕들에게 현장 일행의 안전을 부탁하는 서신과 선물을 보냈다.
현장 법사가 17년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고창국은 당나라와의 전쟁으로 멸망하였고, 왕도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고창국은 불법(佛法)에 의지해 천년 왕국을 꿈꾸었으나 허무하게도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 포도덩굴이 만들어내는 시원한 그늘 아래에서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누에를 모자 속에 숨겨오다
현장 법사의 이야기가 나온 김에 비단이 서방으로 전래된 경위를 잠깐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서방과의 교역에서 비단이 가장 중요한 물품이었던 중국은누에와 뽕나무 종자가 나라 밖으로 반출되는 것을 엄격하게 법으로 금하였다. 현장 법사의 『대당서역기』에 보면 비단 제조비법이 외부로 유출된 경로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우전국(지금의 호탄지방)의 왕은 중국에 비단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구하려 했지만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전국 왕은 중국의 공주와 결혼할 것을 요청하였고, 중국은 먼 나라를 회유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여 혼인을 허락하였다. 우전국 왕은 공주에게 ‘우리나라에는 누에 종자가 없으니 가져와서 손수 의복을 해 입을 것’을 명하였다.
왕의 말을 들은 공주는 모자 속에 누에와 뽕나무 종자를 숨겨서 우전국으로 시집을 갔다. 물론 관리들이 공주의 몸수색을 했으나 차마 모자를 벗기는 무례를 범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공주는 봄이 되자 뽕 종자를 심고 누에를 쳤으니, 이것이 유라시아 일대로 급속히 퍼졌다. ‘딸 자식은 도둑이다’라는 우리나라의 오래된 속담을 떠올리게 만든다.
▲ 무슬림의 공동묘지 앞을 마차가 지나가고 있다.

아름답게 장식한 집에 남긴 깊은 상처
▲ 베제클리크 석굴 벽화를 복원한 그림 일부를 투루판의 박물관에서 볼 수 있었다.
베제클리크 석굴은 위구르어로 ‘아름답게 장식한 집’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깎아지른 듯한 협곡의 서쪽에 벌집처럼 송송 뚫린 굴들이 나란히 배열되어 있다. 많이 훼손되었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긴 했지만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석굴 입구에 들어섰다. 이제까지 발굴된 석굴은 83개인데, 그 중 벽화가 일부라도 남아있는 것은 40여 개뿐이라고 한다.
관람객들에게 공개된 여섯 개의 석굴은 불교문화를 감상한다기보다는 도굴되고 파괴된 역사의 현장을 확인하는 장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서구의 도굴꾼들에 의해 불상을 도둑맞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벽화가 그려진 천장과 벽을 통째로 뜯어갔다고 하니 그 심각성은 이루 말할 수도 없다. 그나마 일부 남은 유물에 대해서는 이슬람교도들이 불상의 눈을 칼로 긁어놓거나 도려놓아서 보는 이를 가슴 아프게 하였다. “성보를 보존하는 것이 한 칸의 절을 짓는 것보다 더 중요하며, 성보를 보존하는 것은 후손의 중요한 임무”라는 범하 스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아름답게 장식한 집’에 깊이 각인된 상처들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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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윤정 _ 1998년 「수필공원」으로 등단하였고, 현재 지하철 ‘풍경소리’작가이자 편집위원, 현대불교신문 객원기자, ‘사진집단 일우’ 회원이다. 저서로는 인도 네팔 기행집 『신들의 땅에서 찾은 행복 한 줌』, 금강경 에세이집 『마음의 눈』, 『당신의 아침을 위하여』, 『잣나무는 언제 부처가 되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