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의 스승, 나의 스승 성철 스님

흠모(欽慕) / 성철 스님의 제자 원택 스님

2008-12-29     관리자
▲ 원택 스님
“성철 스님과 원택 스님은 찰떡궁합이야.”
언젠가 법정 스님이 원택 스님에게 던진 말이었다. 당시에는 펄쩍뛰며 손사래를 쳤지만 원택 스님에겐 지금도 가슴에 남는 말이다. 원택 스님 말마따나 “자비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고 성격은 떨어지는 폭포보다 급해, 입에서 말이 떨어지면 땅에 닿기 전에 해내야 하루가 무사했던 모지락스러운” 스승이었으니, 그저 견뎌왔을 뿐 찰떡궁합이 웬 말이냐는 것이다. 그러나 원택 스님은 온전히 성철 스님의 상좌로서만 당신의 수행일기를 써나갔다.
강원으로 선방으로 한번쯤 떠나봤을 세월이었지만, 그는 스승이 열반에 드는 날까지 단 한 번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성철 스님의 사상을 집대성한 『선문정로』, 『본지풍광』, 그리고 『선림고경총서』 37권까지 모두 원택 스님의 손에서 갈무리됐다. 22년. 그렇게 창창한 젊음을 한 자리에 한 사람의 곁에서 고스란히 보냈으니, 스승을 향한 그 흠모의 내역을 묻지 않아도 알 듯했다. 그렇다고 성철 스님에게 원택 스님이 입에 혀처럼 싹싹한 제자는 아니었던 듯하다.
“제가 원주 소임 볼 때 비구니스님들이 산나물을 캐다가 큰스님께 공양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시고, 너도 장보지 말고 나물 캐다 반찬해라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열심히 나물을 캐다 씻고 있는데, 큰스님이 나물 하나를 들어보이며 ‘너 이게 뭔지 아나?’ 하고 물으셨습니다. ‘모르겠습니더. 실하고 좋아 보이길래 캐왔습니더.’ 하고 답을 했죠. 그러자 갑자기 고함이 터져나왔습니다. ‘이 자슥 대중 다 죽이겠네. 이 잎은 사람이 먹으면 죽는다는 초우 아이가. 독초다 독초. 니는 안 되겠다. 내일부터 장봐 묵어라.’ 제가 그렇게 절 살림에 어둔해 스님이 애를 그래 많이 태우셨습니다.”
덕분에 원택 스님은 ‘샹눔의 새끼’, ‘미련맞은 곰새끼’라는 타박을 받기 일쑤였고, 때로는 뺨까지 내놓고 살아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택 스님은 언제나 정공법을 선택했다. 피하거나 에둘러가지 않고 모르는 것은 아무리 무섭게 다그쳐도 ‘모르겠습니더’, ‘잘못했십니더’로 일관했다. 답답한 쪽은 성철 스님이었을 터, 어느 날 성철 스님은 매일 모른다고만 하는 원택 스님을 붙잡고 “와 니는 점점 모르는 게 더 많아지나.”라며 가슴을 쳤다고 한다.
▲ 성철 스님

삼천배를 해야 만날 수 있었던 스님
사실 성철 스님이 어디 보통 스님인가. 삼천배를 해야 만나주었고, 설사 독대를 한다 해도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말 한마디 받고 내쫓기기 십상이었다. 그 성정이 대쪽 같고 무서워 수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출가 전부터 무작정 대원사 탑전을 차지하고 앉아 움직이지 않는 통에 불교계에서는 ‘웬 이상한 청년’에 대한 소문이 자자했고, 큰스님들의 스카우트에 비견될 권유를 받고 동산 스님에게로 출가했던, 그야말로 처음부터 남달랐던 걸승이었다.
이후 성철 스님은 봉암사 결사를 비롯해 한국불교 승가의 청규를 바로 세우며 한국불교 현대사를 직접 써내려갔다. 그리고 1980년부터 20년 동안 스님 표현대로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이라는 ‘고깔모자’를 썼다. 그러나 ‘고깔모자’만 썼을 뿐 있는 듯 없는 듯 수좌로서의 길만 고집했다. 불교계 지도자로서 대사회적 멘트 한번 날리지 않았고, 세상사의 어떤 시시비비에도 철저히 침묵했다. 스님의 오랜 침묵은 경외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한편에서는 맹렬한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적어도 혼탁한 세상에 정도(正道)를 제시할 수 있는 지혜가 그에겐 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었고 그만큼 실망도 컸다. 원택 스님의 고민 또한 컸다. 출가했다고는 하나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나온 터라 사회문제에 무심할 수만은 없는 터였다.
“80·90년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복잡했습니까? 그때 스님이 한 말씀 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넌지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큰스님께서는 ‘내는 수행자다. 그리고 내가 말하면 정치하는 사람들이 내 말 듣겠나? 실천되지 않을 말은 할 필요가 없다.’ 하고 단호하게 막음하셨습니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여기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였을까. 스님이 열반에 들던 날, 스님의 그 지루고하고도 오랜 침묵은 세상을 뒤흔드는 사자후로 터져나왔다. 하룻밤새 10만 명이라는 기록적인 수의 조문객이 해인사에 운집했다. 평생 한자리에서 지혜의 등불을 밝힌 한 수행자에게 세상은 경외를 표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하던 생전 그의 말에도 비로소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기자에 방송국 촬영팀까지…. 절집에서 장례 브리핑을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지 싶습니다. 슬플 경황도 없이 손님 맞이하랴. 스님 보내드리랴 까마득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다비식 때 ‘스님, 불 들어갑니다’ 하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아! 이제는 보내드려야하는구나’ 싶어서요.”

어떻게 스승의 뜻을 기릴 것인가?
서울에서 만난 원택 스님은 검정고무신을 신고 나타났다. 성철 스님 열반 15주년을 맞아 『성철스님 화두 참선법』을 이제 막 출간한 터였다. 여전히 스님은 스승과 함께 있는 듯 했다. 문득 홀로서기를 해온 지난 15년 세월이 궁금했다.
“글쎄요. 인생을 배우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사가 얼마나 모질고 쓸쓸한지 아주 맵고 혹독하게 배웠던 것 같습니다.”
뜻밖의 대답이었다. 찬 공기 사이로 스님의 헛헛한 웃음이 메아리쳤다. 그간에 겪었던 마음고생이며 팍팍해진 스님의 속뜰이 어렴풋이 보이는 듯했다.
성철 스님이 열반에 든 후 원택 스님은 중간중간 종단의 소임을 맡기도 했지만, 그는 여전히 성철 스님의 상좌로서 남은 책무를 꾸준히 이행해왔다. 백련암 불사, 사리탑 조성, 성철 스님 생가 복원, 겁외사 창건 그리고 특유의 우묵하면서도 맛깔진 글로 『성철스님 시봉이야기』 두 권을 펴냈다. 그러나 그 하나하나가 시시비비 평가 대상이 되었다. ‘사리탑이 너무 과한 거 아니냐. 성철 스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 ‘성철 스님이 아무리 큰스님이라도 생가복원까지 해야 하나. 승가 정서상 맞지 않다.’ 등 순탄하게 넘어간 일이 없었다.
“저도 다 알고 있습니다. 성철 스님 가르침대로 수행 잘하고 공부 잘하면 됐지 뭐 그런 것까지 하며 상을 내느냐는 비판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남아있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몫은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질없다고 아무 것도 안 하면 후일 무엇으로 스님의 뜻을 기리고 전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지난 세월 동안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사리탑, 생가복원 그리고 글로 기록하지 않았다면, 만약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 글쎄요….”

채워도 채워지지 않을 그리움
“제가 딱 한 번 스님에게 칭찬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25년 전쯤, 서울의 어느 교수가 성철 스님 『선문정로』의 돈오돈수(頓悟頓修) 사상을 주제로 세미나 발표를 했는데, 다른 학자들한테 왕창 깨진 일이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스님, 아무래도 돈오돈수 사상을 정립하시려면 인재양성을 하셔야겠습니다.’ 그런데 별안간 벌떡 일어나시더니 제 뺨을 따닥 두 대를 연달아 날리시는 겁니다. ‘내가 이놈아! 인재양성을 언제 안 했단 말이냐? 자기들이 끝까지 못 버티고 안 하는 걸 어떡하냐!’ 그만큼 마음이 쓰이셨던 거죠. 그래 밤새 고민한 끝에 다음 날 다시 말씀드렸습니다. ‘돈오돈수 사상을 말씀하셨던 옛 조사스님들의 어록을 먼저 편찬해보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선림고경총서』 37권입니다. 그 출판기념회가 1993년 10월 둘째주 금요일에 있었는데, 그 날 큰스님께서 처음으로 칭찬해주셨습니다. ‘됐다.’”
그리고 스무날 뒤 스승은 먼 길을 떠났다. “됐다” 이 짧은 한마디를 스님은 아직도 가슴에 품고 있다. 그래서 어쩌면 스님은 또 한번 시비의 중심에 들어설지 모른다. 돈오돈수. 스님의 사상이 제대로 건강하게 논의될 수 있기를 발원하고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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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스님 _ 1912년 경남 산청 출생. 1935년 대원사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 1936년 해인사에서 동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1940년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깨달음을 얻어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1947년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 아래 봉암사 결사에 들어가 한국불교에 수행풍토를 조성하였으며, 8년간의 장좌불와와 팔공산 성전암에서 동구불출 10년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1967년 해인총림 초대방장, 1981년 대한불교조계종 제7대 종정에 취임했다. 1993년 11월 4일 해인사 퇴설당에서 법랍 59세 세수 82세로 입적했다. 스님의 삶과 수행은 수행자의 사표가 되어, 오늘까지 스님의 가르침은 지혜의 등불로 밝혀지고 있다.

원택 스님 _ 1944년 대구 출생.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2년 해인사 백련암에서 성철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후 20여 년을 하루같이 스승을 시봉하며 성철 스님의 사상을 대외적으로 정립해왔다. 성철 스님 열반 후에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 파라미타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도서출판 장경각 발행인, 재단법인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으로서, 백련암에 주석하며 성철 스님의 가르침을 선양하고 있다. 스승에 대한 제자의 애틋한 마음을 『성철스님 시봉이야기 1, 2』로 엮어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