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루법(有漏法)과 무루법(無漏法)

기초 튼튼, 불교교리 한 토막 17

2008-12-29     관리자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범부가 보는 세상과 부처님이 보는 세상은 같은가, 다른가? 같다면 범부와 부처님이 어떻게 차별되며, 다르다면 부처님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노승이 삼십 년 전 참선하기 전에는 산을 보면 산이었고 물을 보면 물이었다.
그 뒤 훌륭한 선지식을 만나게 되어 선정에 들어가 보니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었고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진실로 깨달음을 얻고 나니
예전과 다름없이 산을 보면 단지 산이고 물을 보면 단지 물이다.
- 『속전등록(續傳燈錄)』 제22권, 청원 유신(靑原 惟信) 선사 게송

이 게송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그 유명한 성철 스님 법어의 원조격입니다. 게송을 보면, 범부와 깨달으신 분이 보는 세상이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다른 것 같습니다. 범부는 ‘산을 보면 산이고 물을 보면 물’인데, 깨달으신 분은 ‘산을 보면 단지 산이고 물을 보면 단지 물’입니다. 단지 다른 것은 ‘단지’라는 글자뿐입니다.
이 ‘단지’라는 글자가 주요 실마리입니다. 어리석은 이는 분별 망상으로 지금 보는 산이 실재 그렇게 있는 것으로 볼 뿐만 아니라, 온갖 마음 작용을 연이어 일으킵니다. ‘저 산에 누구랑 가면 좋겠는데’, ‘저 산 너머에 고향이 있는데’ 등등. 이렇게 저렇게 가만히 있는 산을 가지고 온갖 분별 망상을 일으켜 울고 웃고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깨달으신 분은 산을 보면 단지 ‘산’일 뿐입니다.
지난 글에서 오온은 다섯 가지 마음 작용으로서 이 오온에 의해 세상이 드러나고, 유위법은 분별 작용으로 드러난 세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오온은 유위법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깨달으신 분도 ‘단지’ 산이라고 보기는 하지만 결국 분별 작용으로 산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깨달으신 분도 유위법인 오온의 작용이 있습니다. 만약 없다면 수많은 법문과 중생에 대한 자비심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산은 산이라고 해야 하고 물은 물이라고 해야 하는데, 분별이 없다면 이 세상을 어떻게 살겠습니까?
이에 중요한 교리 용어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오온(五蘊)과 오취온(五取蘊)[구역은 오음(五陰)과 오수음(五受陰)]입니다. 어떤 곳에서는 오온으로, 어떤 곳에서는 오취온으로 거의 구별 없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오온에 욕탐이 있으면 오취온이라고 합니다.

“오음이 곧 오수음인 것은 아니다. 또한 오음이 오수음과 다른 것도 아니다.
그것에 욕탐이 있으면 오수음이다.” - 『잡아함경』(제2권, 58경)

즉, 어리석은 이든 깨달으신 분이든 오온의 분별 작용으로 세상은 드러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는 욕탐(欲貪)이 함께 하는 오취온으로써 세상이 내가 본 것처럼 있다고 두루 집착하여 온갖 망상을 연이어 일으키지만, 깨달으신 분은 오온으로써 단지 그렇게 볼 뿐입니다.
이에 유루법은 오취온에, 무루법은 오온에 연결시킵니다. 여기서 ‘루(漏)’는 마음 작용에 번뇌가 ‘새어 나오다’는 뜻으로 결국 ‘번뇌’를 말합니다. 즉, 유루법은 마음 작용에 번뇌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참고로, 일체법을 유위법과 무위법으로 나누기도 하지만, 유루법과 무루법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무위법은 분별 망상이 끊어지고 명명백백하므로 무루법에 해당됩니다. 유위법은 분별 작용이 있는 것으로 유루법과 무루법에 모두 해당됩니다. 이를 유위유루법과 유위무루법이라고 합니다. 유위유루는 오취온에, 유위무루는 오온에 연결됩니다.
깨달으신 분은 중생을 위해 분별을 일으키지만[유위] 번뇌가 흘러내리지 않습니다[무루]. 그러나 중생은 어리석음에 의해 분별하는 가운데[유위] 늘 번뇌가 함께 합니다[유루]. 따라서 깨달으신 분의 마음 작용은 유위무루에, 어리석은 이의 마음작용은 유위유루에 해당됩니다.
물론 범부들도 번뇌가 함께 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순간이나, 참된 마음으로 보시하는 그 순간 말입니다. 그러나 드러난 마음 작용을 볼 때에는 번뇌가 없지만, 마음 밑바닥에는 근본무명(根本無明)이 도도하게 함께 흐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은 아무런 대가없이 보시한 것 같지만, 어떤 순간 ‘내가 너에게 어떻게 했는데’라는 말이 뛰쳐나옵니다.
이러한 마음을 유루선(有漏善)이라고 합니다. 지금 행위는 선(善)이지만, 근본번뇌를 제거하지 않았기에 언제든지 번뇌로 새어나올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강바닥에 흙먼지가 그대로 가라앉은 채 위로는 맑은 물이 흘러내리지만, 거센 물결이 일어나면 다시 흙탕물이 되는 것처럼, 지금 마음은 맑지만 마음 밑바닥에 있는 근본번뇌가 없어지지 않은 한 어느 순간 번뇌가 소용돌이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는데’라고 본전 생각하는 것처럼.
따라서 마음 다스리는 이는 모름지기 유루선에 그치지 말고 근본번뇌를 없애야 하기에 하심하며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무위법 가운데 자비심으로 유위무루의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 보살의 발원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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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경찬 _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연구실 연구위원을 역임하고, 현재 불광불교대학 전임강사이다. 저서로 『불교입문』(공동 집필), 『사찰, 어느 것도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