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에의 편승

용타 스님의 생활 속의 수행 이야기

2007-02-14     관리자


생자필멸(生者必滅)입니다. ‘난 자〔生者〕’는 반드시 죽는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일단 난 자이니 언제인가는 사라집니다. 존재하는 것들은 대체로 자신의 존재가 사라짐을 그냥 하나의 순리로 잘 받아들이는 듯합니다. 사람은 제(除)하고 말입니다.
이 지상에서 오직 사람만이 세상의 순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는 편입니다. 인간은 자칭하여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한 그루의 나무나 돌멩이만도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한두 가지이리요마는 죽기를 싫어한다는 사실에서 그 극명한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거개가 ‘진시왕 심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늙고 병들고 죽는 일을 꺼린다는 말입니다. 내 도반의 어머니는 위암으로 나이 60에 세상을 떴는데, 죽기 며칠 전, 아들의 옷을 잡고 울면서, “쫛쫛야, 나 3년만 더 살다가 죽게 해다오.” 하며 아우성쳤다는 소리를 듣고 느낀 바가 컸습니다. 어찌 그것이 한두 예이리요마는 좌우지간 사람은 대체로 생자필멸의 당연한 순리를 받아들임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진시왕 심리’를 가지고 있는 한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고뇌(苦惱)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절대적인 한계상황(?)인 죽음에서 벗어나 영원히 사는 길은 없을까요? 있지요. 우리들의 스승이신 석가모니를 위시한 뭇 조사님들이 바로 그 증인들이지 않습니까!

죽음은 초연해야 할 상황
사실,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고 태도의 문제’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무한으로 통하는 관건이지요. 즉 죽음이란 ‘면해야 할 상황’이 아니고, ‘초연해야 할 상황’인 것입니다. 면할 수는 없으나 초연할 수는 있는 것입니다. 진시왕은 죽음을 면하려고 했을 뿐 초연의 길을 몰랐습니다. 종교의 역사는 죽음에 대해 초연해질 수 있는 다양한 방편을 개발해 왔습니다. 아마 그 중에서 가장 믿음직한 방편 하나는 ‘무한(無限)에의 편승(便乘)’이지 않을까 합니다.
광주에서 서울을 가는데 걸어서 간다면 700시간 걸릴 것을, 비행기에 편승한다면 30분이면 갑니다. 비행기라는 간단한 도구를 코앞에 두고 그 활용을 피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요. 여기에 A방, B방, C방이 있습니다. A방에 들어가면 10년을 살 수 있고, B방에 들어가면 100년을 삽니다. 그런데 C방에 들어가면 무한히 삽니다. 어느 방에 들어가기를 원하십니까? 선택은 자유입니다. 무한한 삶을 원한다면 C방을 선택하면 됩니다. 바로 무한에의 편승입니다.
백년도 지탱 못하는 육체인 줄 뻔히 알면서, 그것에 ‘나〔我〕’라는 꼬리표를 달고 평생 공들여 매달려 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막연하게 ‘나! 나!’ 하면서 애지중지 집착하는 정도만큼 큰 절망의 나락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그 ‘나’라는 것의 실상(實相)을 바로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우리가 ‘나’라고 할 때는 몸과 마음〔心身〕을 의미합니다. 그 몸과 그 마음을 잘 관찰해보면 ‘나’라는 것의 연기(緣起)성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몸이란 아버지의 정자 하나에 어머니의 난자 하나가 합해진 것이요, 거기에 어머니가 먹은 밥〔米〕, 김치〔菜〕가 더해진 것에 불과합니다. 즉 정란미채(精卵米菜)에 지나지 않습니다. 고전적으로 표현하면 지수화풍(地水火風)의 가합(假合)에 불과한 것이지요.
마음이라 하는 것도 조금만 살펴보면 느낌, 생각, 의지, 인식 곧 수상행식(受想行識의 가합)에 불과합니다. 즉 ‘나’라는 것이 지수화풍, 수상행식 등이 연기적으로 가합되어진 존재에 불과하니, 지수화풍, 수상행식 등의 어느 것에서도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을 깨닫고 막연하게 ‘나, 나’ 하면서 ‘나’에 집착하던 마음을 벗어나게 됩니다. ‘나’라는 유한(有限)의 선박(船舶)을 버리고 ‘나 없음〔無我〕’이라는 무한의 선박에 편승하는 것입니다.
곧, 정체성(正體性) 문제입니다. ‘나’의 정체를 유한적인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무한적인 것으로 보느냐 입니다. ‘나’를 유한적으로 묶어놓고 괴로움을 살 것이냐, 무한적인 것으로 열어놓고 해탈을 살 것이냐 물을 때, 누가 괴로움과 전쟁을 끌어오는 유한의 정체성을 선택하겠습니까? 그러나 해탈과 평화를 끌어오는 정체성을 선택하는 것도 단순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깨달음이 전제되지 않는 한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지요. ‘나, 나’ 하던 그 ‘나’를 바르게 관찰하여 그것이 연기적으로 존재하므로 그 참 모습은 공(空)하여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유한적인 정체성을 벗어나 무한적인 정체성을 정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로 익어진 업의 정화(淨化)
연기의 이치를 깨닫고 무한의 정체성을 정립했다고 해도, 유한의 자아(自我) 정체성으로 살던 습관성 때문에 실생활에서는 무수히 다시 자아적인 탐진치를 잘 벗어나지 못합니다. 정작 무한의 해탈을 원한다면 원하는 정도만큼 공을 들여야 합니다. ‘나’라는 생각이나 말을 만 번 했으면 ‘나 없다’라는 생각이나 말을 만 번 해야 ‘나’로 익어진 업을 정화(淨化)할 수 있습니다. 평생 살아오면서 백만 번을 ‘나, 나, 나’ 하면서 다져온 업을 언제 또 백만 번을 ‘나 없다, 나 없다, 나 없다’ 하여 정화할 것인지 난감하게 여길 것입니다만 길은 있습니다.
깊은 명상 상태에서는 딱 한 번만 ‘나 없다!’ 해버리면 무량겁 동안 쌓아온 자아업(自我業)일지라도 소탕되는 법이니 말입니다. 여기에 입정(入定)의 위력적인 공덕이 있습니다. 즉 깊은 알파파(α波) 상태인 고요한 정(定) 속에서 연기고공(緣起故空, 연기이므로 공함) 등을 정사유(正思惟)하여 ‘나라고 할 만한 자아가 없구나!’ 하고 느끼곤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지금까지 스스로를 유한적인 자아로, 이기적인 주체로 여기던 심리가 점점 사라지고 초아(超我)적인 중중연기적 대아(大我) 의식으로 전환하게 됩니다.
혹여 이러한 관법(觀法)이 너무 복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만 이 정도를 복잡하게 느낀다는 것은 수행을 너무 쉽게 여기는 얌체 심리입니다. 그러나 굳이 더 간단한 길을 원한다면 ‘이 뭣고’ 화두나 단순한 주력 같은 길을 택해도 된다고 봅니다만, 불교의 원천이 되는 사성제(四聖諦), 12연기, 팔정도(八正道)를 정사유하는 것을 복잡하게 여긴다는 것은 너무 심한 단순병이라고 봅니다. 인간에게 연기법과 같은 이치를 이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지성이 있다는 것은 진정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곳 함양에는 오늘(12월 17일) 금년의 첫눈이 내렸습니다. 불사에 장애가 될 것임은 당연한데 마음은 묘한 설렘으로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