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보는 것조차 경계했던 참수행자, 광덕 스님

흠모(欽慕)

2008-12-29     관리자
▲ 혜담 스님
가을이다. 혜담 스님이 광덕 스님을 은사로 모시던 그날처럼 온 산이 가을로 물들어있다. ‘사람이 어쩌면 저토록 깨끗할 수 있을까’ 두려운 마음 경외의 마음으로 훔쳐보았던 은사의 모습을 가슴에 묻은 지 어느덧 10년. 혜담 스님의 쓸쓸한 속내를 드러내듯 각화사는 인적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각화사 다실에 들어서니 혜담 스님은 천상누각의 주인장처럼 앉아 말없이 차를 다리고 있었다. 다실의 한 벽면을 통유리로 터놓아 마치 산사의 경계조차 지워버린 것처럼 산 아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찔하다 싶을 통쾌한 절경에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선계가 따로 없다느니 두서없이 말을 주워 삼키면서 창가에 매미처럼 붙어서 있는데, 혜담 스님이 말을 툭 던졌다.
“광덕 스님을 생각하면, 풍경을 즐긴다는 것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언젠가 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내가 비를 참 좋아하는데, 평생 비가 오는 것을 마음껏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네. 시간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비구가 그럴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실제로 스님은 이렇게 차상을 차려놓고 차를 마신 적도 없으셨습니다. 부득이 차를 마셔야 한다면, 그냥 주스 한 컵으로 대신하고 마셨습니다. 계절을 감상하고, 차담을 나눌 1분 1초의 여유까지도 온전히 삶 전체를 수행과 포교에 헌신하셨던 어른이 광덕 큰스님이셨습니다.”
혜담 스님은 그렇게 들뜬 시선을 조용히 안으로 끌어들였다. 토굴생활을 하지 말라던 스승의 당부. 차담을 나누는 것조차 사치라 여길 만큼 깔깔했던 스승. 가을하늘보다 더 청명하고 맑았던 스승의 모습을 떠올리며 혜담 스님은 마음의 고삐를 여미고 있었다.

빛이 되어주었던 스승
혜담 스님은 광덕 스님에게 참 많은 은혜를 입었다고 했다. 선객으로 살고자 했을 때, 그래도 공부는 해야 한다며 동국대학교에 들어가도록 길을 터주었다. 그리고 다시 대학원에 들어가 좀 더 공부를 해보겠노라고 했을 때는 ‘교수는 머리 긴 사람도 할 수 있지만, 수행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니, 이제는 자유인이 되라.’며 참다운 중노릇을 일깨워주었던 은사였다.
“그때 대학원 가서 공부하고 뜻대로 교수를 했다면 어땠을까? 전 지금이 참 좋습니다. 이렇게 ‘중답게’ 살 수 있다는 것에 매일 매일 감사할 뿐입니다.”
광덕 스님은 늘 몸이 아팠다고 한다. 20대 후반에 이미 폐를 하나 잘라내 없었고, 담낭도 없었으며, 위장은 3분의 1만 남아있었으니 스님에게 하루하루는 아픔을 견뎌야 하는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아픈 것을 오히려 약으로 삼아 정진했다고 한다. 몸이 아파서 일을 놓은 적도 없었고 그것을 장애로 여기지도 않았다. 일찍이 수많은 경전을 한글경전으로 새롭게 엮어냈고, 거기에 선율을 붙여 찬불가를 보급했다. 그리고 대각사와 불광사를 중심으로 도심포교, 어린이포교까지 펼치며 불교의 현대화·대중화를 이뤄냈다. 어둡고 칙칙했던 불교, 선사들의 전유물처럼 높고 아득하기만 했던 불교를 쉽고 희망차고 신명나는 불교로 스님은 만들어갔다. 광덕 스님을 통해 전해진 불교는 대긍정의 불교였고, 희망과 환희에 찬 노래였던 것이다.
▲ 광덕 스님

“이미 너희는 부처의 몸이요, 바라밀 생명이다”
혹여 시간이 잠시라도 나면 광덕 스님은 방에서도 혼자 법문을 하셨다고 한다. 그러면 옆에서 그 말씀을 받아 적기만 하면 그것이 아름답고 유려한 글이 되고 책으로 엮어졌다. 타고난 문장가였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만큼 스님은 찰나에 일어나는 생각 생각까지도 군더더기 하나 없는 바라밀생명으로 충만하였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종단의 법제도를 정비했던 것도 광덕 스님이었는데, 70년대 총무원 총무부장으로 재임하면서 광덕 스님은 종단체제를 정비했고 종헌종법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만큼 광덕 스님은 한편으로는 탁월한 행정가였으며 포교승이었으나,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침 없는 그저 담담한 수행자로 당신의 삶을 매일매일 회향했던 어른이었다.
“하루를 다 보내고 저녁나절 들어오시면 밤새 아픈 몸을 뒤척거리셨어요. 낯빛은 파리할 만큼 야위고 창백하셨구요. 그렇게 늘 아프셨지만 그러면서도 스님은 늘 맑고 청정하셨습니다. 말씀 나누실 때는 언제나 미소를 짓고 계셨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예절을 귀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요.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위인전에 어울리는 삶을 산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요.”
혜담 스님은 불광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꼬박 10년을 살았다. 당시 불광사에는 매주 두세 차례 큰스님 법문이 있었다고 한다. 스님은 대중에게 항상 반야바라밀 사상을 강조하셨는데, 매일 10년을 하루같이 듣다보니 혜담 스님에게는 때로 진력이 나고 지루한 일상처럼 덤덤해지고 말았다고 한다.
“10년 동안 반야사상을 듣다보니 아예 반야에 대해 내 공부를 해보자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도망가듯이 일본에 가서 반야를 전공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공부를 해보니 우리 스님의 견처가 얼마나 놀랍고 적확하셨는지를 비로소 알겠더군요. 스님의 가르침을 새롭게 깨달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광덕 스님은 조용하지만 뛰어난 혁명가였습니다. ‘더 수행하고 닦을 궁리를 하지 마라. 이미 너희는 지금 부처의 몸이요, 바라밀 생명이다. 그것을 믿어라. 그리고 부처인 듯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보현행원이 다른 게 아닌 거예요. 그냥 부처의 마음으로 부처처럼 살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얼마나 파격적이고 통쾌한 말씀입니까?”
혜담 스님의 깔깔한 성품이나 당당함도 아마 큰스님 그늘에서 나온 성품일 것이다. 혜담 스님은 1993년도부터 불교방송 ‘자비의 전화’를 통해 신행상담을 4년 가까이 했었다. 생방송으로 대중과 직접 만나 어떤 질문에도 막힘없이 답해야 하는 대단히 어렵고 미묘한 시간, 그러나 혜담 스님은 정법에 어긋나는 일에 대해선 단호하고 거침없었다. ‘입춘 부적을 파는 절은 정법도량이 아니다’, ‘정식으로 수계를 받지 않은 스님은 정법수행자가 아니다’ 등 스님의 방송이 나갈 때마다 교계는 술렁거렸다. 그때마다 스님은 하나하나 뜻을 짚어보이며 불자라면 지켜야할 선을 명확히 그어보였던 것이다. 그렇게 은사에게서 보았고 배웠던 까닭이다. 

당신, 이미 충만한 마하반야바라밀 생명이시여
“얼마 전 뇌출혈로 생사의 고비를 넘겼는데, 깨어나면서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이 마하반야바라밀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광덕 스님께서 주신 마하반야바라밀 송론에 나오는 한 구절이 폐부를 찌르더군요. 그 송론을 그대로 옮기면, ‘마하반야바라밀은 나의 영원한 생명의 노래이며, 나의 영원한 생명의 율동이며, 나의 영원한 생명의 환희이며, 나의 영원한 생명의 위덕이며, 체온이며, 광휘이며, 그 세계이다.’입니다. 바로 이 구절의 뜻을 빠짐없이 알겠더군요. 퇴원하고 각화사로 돌아와 산천을 보니 마하반야바라밀이 내 생명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라도 뒤늦게 스승의 가르침을 또렷이 체득할 수 있음에 스님은 감사했다. 그래서 그 감사의 마음을 담아 모든 사람들 또한 마하반야바라밀 생명의 체득이 있기를 발원하며 법공양을 했다.
“광덕 스님은 바라밀 생명을 체득한 분이었던 거죠. 몸이 아파도 그토록 충만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까닭이었을 겁니다. 요즘 조사어록을 보고 있는데, 다시 스님 생각이 간절합니다. 여쭙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요. 물을 곳이 없다는 것이 참 아쉽습니다.”
스님은 한들거리는 코스모스 너머 먼 산을 응시하고 있었다. 새롭게 태어난 그날처럼, 마하반야바라밀, 내 생명의 빛을 응시하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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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 스님 _ 1927년 경기도 화성에서 출생하여 1999년 열반하였다. 암울한 민족의 격동기였던 50년대, 범어사에서 당대의 대선지식인 동산(東山) 스님을 만나 참선을 시작하였으며 위법망구의 구도정신으로 수행정진하였다. ’74년 9월 불광회를 창립하고, 그 해 11월 월간 「불광] 창간, 불교의식문 한글화, 경전 번역, 찬불가 작시, 불광사 대중법회 등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인의 품으로 돌려주며 대중을 일깨웠다. 역저서에 『마음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선관책진』, 『육조단경』, 『생의 의문에서 그 해결까지』, 『삶의 빛을 찾아』, 『행복의 법칙』, 『반야심경 강의』, 『보현행원품 강의』 등을 비롯하여 대중들의 마음을 밝혀주는 주옥같은 역저서 20여 종이 있다.

혜담 스님 _ 1949년 경남 울산에서 출생, 부산 범어사에서 광덕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불교대학 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하였다. 선우도량 공동대표, 조계종 총무원 호법부장, 불교신문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현재 경기도 검단산 각화사 주지, 조계종 재심호계위원 소임을 맡고 있다. 역저서에 『방거사 어록 강설』, 『한강의 물을 한 입에 다 마셔라』, 『대품 마하반야바라밀경 상·하』, 『반야불교신행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