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봄이여, 영원하라

대중문화산책 / 예술과 물욕이 공존하는 체코 프라하

2008-12-29     관리자
▲ 구시가지 광장
『프라하의 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작가 밀란 쿤데라는 프라하를 가르켜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도시’라고 말했다. 1968년 치열했지만 찬란했던 프라하의 봄 이후, 체코인들의 자유에 대한 열망은 1989년 공산주의 몰락이라는 결실을 이뤄냈다. 어쩌면 프라하는 경직된 사회 분위기에 걸맞지 않는 외모를 가졌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유럽의 아름다운 도시 속에서 동쪽의 작은 도시 프라하가 보석처럼 빛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너무나도 많다.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유리공예품과 그로테스크한 마리오네트 인형들, 2차대전의 폭격을 피한 중세의 건물들, 그리고 체제에 구속되지 않고 자신만의 창작 세계를 지켜낸 많은 예술가들 - 유럽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을 풍경일지 모르지만 어렵사리 얻은 프라하의 봄내음은 유독 남달랐다. 문득 외국인들에게 우리나라는 어떻게 비쳐질지 궁금해진다. 불교문화를 비롯한 우리의 고유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공연과 전시회가 좀더 다채롭게 펼쳐지기를 기원해본다.

이율배반의 도시
프라하에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콘서트가 열린다. 거리와 상점 곳곳에 공연을 소개하는 전단지가 빠짐없이 꽂혀 있고, 호객 행위도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그리고 그 공연은 대부분 클래식 연주회다. 클래식 공연의 전단을 돌리며 호객행위를 하는 모습이라니, 상상이 되는가. 장소 또한 다양해서 작은 가게에서부터 성당, 교회, 시민회관, 강당 등 사람이 모이고 앉을 수 있는 모든 공간에서 크고 작은 규모의 공연이 열린다. 손에 집히는 대로 전단지를 가져와 읽어보니 공연의 레퍼토리는 드보르작, 모차르트, 드뷔시, 그리그, 스메타나 등으로 대부분 비슷비슷했다. 그에 비해 가격은 천차만별이라 본인의 주머니 사정을 감안해 선택할 수 있으며, 낮에는 공짜 공연도 꽤 많아 가난한 관광객들에게 희소식이다.
딱딱한 클래식이 체질에 맞지 않다면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무작정 거리를 걸어볼 것. 사실 거리 공연은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기는 하지만 연주 수준은 물론 처연함과 아련한 노스탤지어를 자극한다는 점에서 단연 프라하의 거리 악사들이 최고다.
사실 프라하에는 이런 거리의 악사뿐 아니라 노점상, 동전을 구걸하는 걸인들이 넘쳐난다. 그 유명한 카를교(橋)만 해도 관광객들과 다리 양 옆으로 늘어선 노점들 때문에 한가롭게 다리 위를 걷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근엄한 카를교의 동상 아래에서 유창한 영어로 호객 행위에 열심인 한 상인의 모습이 묘한 이질감을 주는 건 왜일까. 공산주의 몰락 후 근 20년이 지나기는 했지만 이곳은 파리나 바르셀로나 같은 유럽의 관광 도시와는 확실히 다른 냄새가 난다. 아직은 완전하게 흡수되지 않은 자유, 자본의 힘을 알아버린 사람들, 예술적 순수함과 물욕의 뒤섞임, 그리고 이로부터 오는 이질감은 이 도시가 주는 또 다른 매혹이다.
▲ 마리오네트 공연

어둠의 도시
프라하의 여행자 센터에 가면 다양한 관광 정보를 얻을 수 있는데, 그 중 눈길을 잡아 끈 문구가 ‘어둠의 도시 프라하’였다. 밤늦게 프라하를 돌아다니는 투어 상품도 여럿 있을 만큼 프라하의 어둠은 이곳의 대표 이미지다. 이는 프라하 출신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를 보면 쉽게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평생 열등감에 시달리며 정체성을 고민했던 카프카의 작품에서 스멀스멀 풍겨 나오는 그로테스크함과 몽환적인 분위기는 희미한 가로등 하나만 켜진 프라하의 좁은 골목길에서 느낄 수 있는 바로 그것이다. ‘The city of Franz Kafka and Prague(카프카의 도시 프라하)’라는 카프카 박물관의 전시회 이름처럼 확실히 카프카의 작품 세계는 프라하의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인형치고는 어딘지 음침한 마리오네트 인형, 환한 햇빛 아래에서도 죽음의 사자처럼 엄숙하고 싸늘한 느낌을 주는 거리 곳곳의 동상들, 어둠을 모티브로 한 블랙 마임 공연, 아무렇게나 세워놓은 듯한 비석 때문에 황폐해 보이는 묘지 등 이 도시에는 다양한 형태의 어둠이 존재하고 있다.
▲ 유대인 묘지

당신만의 여행 코스를 만들어라
‘북쪽의 로마’, ‘유럽의 심장’, ‘흰 탑의 황금도시’, ‘유럽의 음악원’- 모두 프라하를 수식하는 말이다. 국가 관광 수입의 50%를 차지하고, 1992년 구시가를 중심으로 한 ‘프라하 역사지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고딕, 바로크, 르네상스, 아르누보 등 도시의 모든 건축물들이 고대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어 프라하는 하나의 거대한 건축 박물관과 같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여행책자를 펴놓고 어디를 갈지 정하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물론 서점에서 절찬리 판매 중인 여행 책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면 프라하쯤은 3일 만에 완전정복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여기 콕, 저기 콕 친절한 안내에 따라 재빨리 보고 사진 찍는 것에 만족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한번쯤은 책에서 벗어나 자신의 감을 따라 여행해 보길 권한다. 필수 추천 코스로 빠지지 않는 카를교와 프라하 성, 마리오네트 극장, 바출라프 광장, 시계탑도 좋지만 지친 하루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들렀던 선술집에서의 맥주 한 잔, 모르고 갔던 식당에서 만난 소규모 재즈 밴드의 공연이 더 기억에 남을 것이다.
프라하에는 정말 많은 관광지들이 있다. 왠지 하나라도 꼭 빠짐없이 봐야 할 것 같고 실제로 모두 유명하고 가치 있는 유적들이지만 유명세가 여행객들에게 만족을 주지는 않는다. 인터넷과 미디어의 발달로 세계 곳곳을 눈으로 가볼 수 있는 요즘, 체험의 의미는 더욱 중요하다. 책과 인터넷은 시간을 아껴주고 시행착오를 줄여주겠지만 때로 과감한 모험으로 이뤄낸 발견이 주는 즐거움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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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균민 _ 동국대학교 영화과 대학원 수료, 영화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스포츠서울, The DVD, K-bench, 무비위크 등에 영화칼럼을 기고해왔고, 현재 전주국제영화제 컨텐츠 팀장으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