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한 역사와 문화, 그리고 후한 인심과 친절함이 넘쳐나는 도시

오아시스 실크로드를 가다 10 / 중국 카슈가르

2008-10-30     관리자
▲ 향비묘의 전경. 색색깔의 타일로 이루어진 건물 외벽이 참으로 아름답다.

‘카슈가르에 와 보지 않고 신장에 왔다고 말하지 마라’고 할 정도로 카슈가르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큰 도시이자, 위구르족의 옛 수도이다.
중국은 서남공정(西南工程)이라는 이름으로 티베트를 중국 역사에 편입하고, 서북공정(西北工程)이라 하여 신장 위구르족을 대상으로 중국 역사에 편입하였다. 돌궐이라는 명칭으로 역사에 등장하였던 위구르족은 한때 돌궐제국을 출범시키는 등 중앙아시아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1755년 청나라 건륭제가 이 지역에서 부족 반란을 진압하면서 돌궐족 영토는 중국에 편입되었다가, 1865년 청나라를 몰아내고 동투르키스탄 왕국을 건국하였다. 또 다시 외세의 침략으로 무너졌다가, 1949년 독립국가인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을 세웠지만 중국 공산당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지금도 위구르족 일부는 ‘동투르키스탄’ 개국을 목표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다. 위구르인들은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민족이며, 지금도 중국어로 말하지 않고 자기네 언어로 말하고 쓴다.

구하는 것은 다 갖추어져 있다는 선데이 바자르

카슈가르는 인도와 페르시아 그리고 중앙아시아로 가는 관문이자 중국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기에, 남쪽 실크로드의 중심지였으며 국제시장으로 명성이 높았다. 마침 도착한 날이 카슈가르를 대표할 만큼 유명한 일요시장인 ‘선데이 바자르’가 열리는 날이었다. 선데이 바자르에는 과일을 비롯한 여러 가지 먹거리와 의류, 일상용품, 악기류, 장식품 등 그 물품의 종류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십리 길은 족히 될 듯한 길을 오르락내리락했더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픈 다리도 쉴 겸해서 제법 규모가 큰 식당에 들어갔다. 붉은색 히잡을 쓴 아리따운 처녀가 주문을 받았다. 그녀는 한글로 쓰여진 ‘실크로드’ 책을 보더니, 중국이 이렇게 넓은 줄은 몰랐다는 표정으로 내가 식사를 하고 있는 사이 몇 번이나 와서 그 책을 들여다보았다.
서서히 해거름이 밀려오자, 하나둘 팔다 남은 물건들을 나귀에 싣고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였다. 하루를 정리하는 그들 틈에서 나도 카슈가르의 시내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시내 한 가운데에 있는 인민공원에는 중국을 상징하는 붉은색 인민기가 펄럭이고 오른손을 높이 든 모택동의 거대한 동상이 떡 버티고 서 있다.
▲ 한글로 된 실크로드 책을 보는 식당의 종업원들.
▲ 신장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시장, 카슈가르의 선데이 바자르.













함부로 아름다움을 노래하지 마라


▲ 향비의 고향이라 그런지 미인들이 많았다. 점심을 위해 직접 국수를 뽑고 있다.
여행자들에게는 향비묘로 알려져 있지만 위구르인들은 ‘아팍 호자의 성묘’라고 부른다. 향비묘는 사실 호자 가문의 가족묘지이며 지금 약 60여 기에 이르는 무덤이 있다. 인도에 타지마할이 있다면 위구르인에게는 아팍 호자의 성묘가 있다고 할 만큼 향비묘는 위구르인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몸에서 향기가 난다고 하여 ‘향비’라고 불렸다나, 향비에 대해 전해오는 전설은 다음과 같다.
지금부터 약 200년 전 청나라가 이곳을 정복했을 때, 향비의 아름다움을 전해들은 건륭제는 그녀를 비(妃)로 삼았다. 건륭제의 비가 되었건만 향비는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사무쳤다. 이를 보다 못한 건륭제는 서역풍의 궁전을 지어주는가 하면 그녀를 위한 욕탕도 지어주었지만, 그러한 것들도 향비를 위로해 주지 못했다. 향비는 황제 받드는 것을 거부하다가 결국엔 자결해 버렸다. 황제는 위구르인의 요청에 의해 향비의 시신을 가마에 실어 고향으로 보냈다. 시신은 두고 향비의 옷만 가마에 실어 왔다고도 전한다. 향비묘의 한 켠에는 위구르인의 한이 서린 가마가 전시되어 있다.
향비묘를 나와 바로 그 옆에 있는 ‘카스지구 박물관’에 들어갔다. 불교의 흔적을 말해주는 불상 한 점을 비롯하여 석기 시대 유물과 미라 등이 전시되어 있는 소규모의 박물관이다. 카슈가르는 타림분지의 오아시스 도시들 중 가장 먼저 불교를 받아들였으며, 거의 천년 동안이나 불교국가를 유지해왔다. 그러다 10세기부터 티무르에 의해 이슬람화 되기 시작했으며, 지금 카슈가르에는 100개도 넘는 이슬람 사원이 있다. 천년의 역사를 지닌 불교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으니 애통하다. 세월과 함께 자취도 없이 사라질 수 있음을 확인하고 나니, 일체 모든 것이 환(幻)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향비묘역에는 호자의 일가족이 묻혀있다. 이슬람식 무덤.
▲ 버스를 타면 여차장이 요금을 받는다.
▲ 카스지구 박물관에 전시된 불상.









감자 먹는 사람들

카슈가르에는 전통가옥이 그대로 보존된 지역이 있다. 바깥에서 볼 때는 폐허처럼 느껴졌지만,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어 생기가 돌았다. 골목마다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넘쳐났다. 여럿의 아이들이 모여 삶은 감자를 얇게 저며 간장에 찍어먹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이 아침식사라 했다. 또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모여 삶은 감자를 먹고 있었다. 어쩐지 가난의 상징 같아 가슴이 찡하였다. 문득 김선우의 시 「감자 먹는 사람들」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열한 식구 때꺼리를 무슨 수로 감자 없이 밥을 해대냐고’ 아이들도 집에서 감자 먹기 싫다고 타박을 했다가 엄마로부터 한소끔 야단맞았을지도 모른다.
어느 집 앞을 지나치다 시타르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노인을 만났다. 그의 얼굴은 비애로 가득 찼으며 그의 노래 가락에는 애절함과 슬픔이 어려 있었다. 서로 말은 통하지 않지만, 망국의 한을 노래하고 있을 거라 짐작했다.
베이징올림픽을 전후해서 카슈가르에서 위구르 독립운동단체에 의해 폭탄테러가 일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세계는 위구르인들의 강한 독립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동안 중국에 의해서 학살된 위구르인은 약 천만 명에 이른다고 하니 위구르인의 한과 슬픔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카슈가르에 있다 보면 이국적인 그들의 문화를 비롯하여 볼거리가 넘쳐나서 즐겁고, 또 그들의 후한 인심과 친절함이 좋아 오래도록 머물고 싶어진다. 그래서 카슈가르에 갔다 온 사람들은 위구르의 독립을 기원하게 된다.
▲ 카슈가르의 전통마을을 돌면서 감자로 아침식사를 하는 가족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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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윤정 _ 1998년 「수필공원」으로 등단하였고, 현재 지하철 ‘풍경소리’작가이자 편집위원, 현대불교신문 객원기자, ‘사진집단 일우’ 회원이다. 저서로는 인도 네팔 기행집 『신들의 땅에서 찾은 행복 한 줌』, 금강경 에세이집 『마음의 눈』, 『당신의 아침을 위하여』, 『잣나무는 언제 부처가 되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