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각 청정한 마음이 곧 도량이다

내 마음의 법구

2008-10-30     관리자

요즘 나에게 몇 가지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예를 들면, 양동이에 찬물을 가득 길어다 화분에 천천히 물주기, 물때 낀 관상용 거북의 등 씻어주기, 수시로 아이의 머리 쓰다듬기, 일을 시작할 때에는 작은 목탁 두드리기, 풀밭 한가운데 앉아 가을 풀벌레 소리 듣기 등등. 크게 표시나지 않는 이 작은 일을 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나는 언제라도 나의 마음이 외곽의 선이 고운 제주 오름의 능선 같았으면 좋겠다고 소원할 때가 많았다. 마음이 언제라도 새벽녘 물안개 피어오르는 연못처럼 고요했으면 좋겠다고 바랄 때가 많았다. 그러나 마음은 셋을 헤아리는 동안을 참지 못하고 불쑥 뿔 같은 화를 내거나 입으로는 험한 말을 쏟아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화난 코뿔소처럼 숨을 식식거리고 있는 나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해서 내 나름의 궁리 끝에 이 몇 가지 일을 평소에 해보기로 작심을 했다.
성철 스님께서 수행하는 스님들께 당부했다는 다섯 가지 생활 항목이 내 책상에는 붙어 있기도 하다. ‘손에는 일을 줄여라. 몸에는 소유를 줄여라. 입에는 말을 줄여라. 대화에는 시비를 줄여라. 위에는 밥을 줄여라.’ 고개만 들면 곧바로 눈에 띄는 곳에 이 다섯 가지 항목을 적어두고서 틈이 나는 대로 점검을 하고 살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또 금방 잊어버리기를 잘한다.
요즘의 세태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우리 사회가 유난히 고요함을 즐길 줄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왜 빈방이 없는 것일까. 눈이 바쁘고, 코가 바쁘고, 귀가 바쁘다. 사람들은 눈과 코와 귀를 저만치 떨어진 곳에 세워놓고 바깥에 무슨 일이 벌어지려고 하는지, 바깥에 무슨 기변이 생겼는지를 살피길 좋아하는 듯하다. 다른 사람의 입맛에 맞춰 살 수는 있어도 정작 내 마음의 궁핍은 관심의 대상이 아닌 듯해 보인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의 생활에서 벌어지는 드라마는 즐겨보되 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드라마에는 별반 관심이 없는 듯하다. 애석한 일이다. 우리는 거실에 켜둔 드라마를 언제쯤 꺼 조용한 거실에서 살게 될까. 마음은 언제쯤 청정한 도량이 될 수 있을까.
명성에 집착하며 사는 일도 문제이기는 마찬가지다. 릴케는 “명성이란 새로운 이름의 주위로 몰려드는 온갖 오해의 총칭”이라고 했다. 자신을 수식하는 보다 화려한 평판을 얻는 일에 너무 골몰하지 말라는 얘기다. 대개 평판 얻기에 골몰하는 사람들은 나서지 않아야 할 일에 무턱대고 나서는 무모함을 보일 때가 많다. 그는 일 없이 사는 법을 왜 모를까.
보조 스님이 세속나이로 33세 때 팔공산 거조사에서 썼다는 결사문에 이런 구절이 있다. “한 생각 청정한 마음이 곧 도량이다.”
바깥에서 찾지 말고 신속히 내 마음에게로 돌아갈 일이다. 깨끗하게 비질된 도량 마당에 가을의 소슬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상상해보라. 도량 가득 만월(滿月)의 빛이 내리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곳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을 상상해보라. 우리의 마음을 그곳에 살게끔 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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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_ 시인·불교방송(BBS) 프로듀서.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등이 있다. 미당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동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