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 무애한 욕쟁이 도인 춘성 스님

흠모 (欽慕) / 춘성 스님의 제자 수명 스님

2008-10-30     관리자

▲ 수명 스님

“춘성 스님이요? 정말 보여드리고 싶어요. 우리 스님이 얼마나 멋진 어른이셨는지, 얼마나 천진하셨는지, 그 선기는 또 얼마나 대단하셨는지 보여드릴 수만 있다면 보여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그 모습을 어떻게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있겠어요?”
춘성 스님의 막내 상좌 수명 스님의 설명이다. 만해 스님의 유일한 법제자였고, 번뜩이는 선기로 한국불교사에 뚜렷하게 족적을 남겼던 춘성 스님. 그러나 스님은 평생 옷 한 벌 바리때 하나로 살다간 ‘무소유의 실천가’ 혹은 ‘욕쟁이 도인’이란 뜬 구름 같은 행장 한 줄만 남겼다. 그럼에도 춘성 스님만큼 수많은 일화를 남긴 스님도 없을 것이다. 종로 한복판에 양복을 입고 나타났다가는 지나가는 행인에게 홀딱 벗어주고 사라졌다는 한 노승. 만날 남들이 버린 짝짜기 양말을 주워 신고 조계사 법당에서 먹고 자고 했다던 어느 노승의 이야기. 그리고 망월사 앞에 있던 한 다방에서 시름없이 졸다가 레지가 타주는 커피 한 잔에 시원한 법문 한 자락 들려주었다는 파파 할아버지. 이 모두가 춘성 스님이 남긴 기이한 이력이었다. 어디 그뿐일까? 입만 열면 걸지게 쏟아져 나오던 육두문자는 춘성 스님만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따라다니며 수많은 에피소드를 남겼다.
“사람들이 춘성 스님에 대해 많이 물어봅니다. 어떤 분이셨나구요. 그런데 저는 그게 너무 안타깝습니다. 우리 스님이 욕을 아주 잘 하셨는데, 그게 말로 설명하면 만날 욕이나 하는 이상한 스님이 되어버리거든요. 하지만 실제로 스님이 크게 육두문자를 내지르는 것을 직접 뵈면,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환희심이 납니다. 가슴이 뻥 뚫리기도 하고, 정신이 번쩍 나기도 하고,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니예요. 누구나 스님 뵈러 왔다가 욕을 못 듣고 가면, 법문 못 듣고 가는 것 같아 아쉽다고들 했으니까요”

할아버지 같았던 은사 스님

수명 스님은 열다섯 어린 나이에 춘성 스님을 처음 만났다. 처음 출가는 동화사로 했지만, 절생활에 눈과 귀가 트이면서 춘성 스님을 무작정 찾아나섰고, 그것이 사제의 연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대 내로라하는 수좌들이 결제철만 되면 우우 몰려가는 곳이 춘성 스님의 회상이었고, 그곳에서 춘성 스님과 거침없이 벌어지던 법거량은 전국 수좌들의 마음을 용맹심으로 들끓게 했던 까닭이다.
“당시 이불 없는 선원은 망월사 선원밖에 없었습니다. 방석 한 장으로 하안거, 동안거를 났습니다. 그리고 우리 스님은 항상 저녁 9시에 취침에 들어 밤 12시면 어김없이 일어나서 새벽 3시 도량석을 당신이 직접 하셨습니다. 그런데 도량석 하러 나가실 때면 일렬로 누워있는 수좌들의 발을 툭! 툭! 툭! 좌르르 걷어차면서 나가셨습니다. 깨워주시는 거예요. 그리고는 도량석을 하는데, 대부분 도량석하면 이삼십 분 정도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 스님은 항상 55분을 하셨습니다. 여든이 다 되신 어른이 그 큰 장군목탁을 가슴에 안고 얼마나 우렁차게 도량석을 하셨는지 모릅니다.”
막내상좌였던 수명 스님이 이십년 가까이 한결같이 보아온 은사스님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춘성 스님에게도 예외는 있었다. 매일 새벽마다 잠든 수좌들을 발로 툭툭 걷어차며 얄짤없이 깨웠지만 맨 끝에 누워있는 막둥이 수명 스님만은 못 본 체 하고 나가시곤 했던 것이다. 세수 육십에 맞이한 열다섯 살 막내 상좌였으니 당신 마음으로 어찌 애틋하고 어여쁘지 않았겠는가.
“저는 처음 뵌 날부터 좋았습니다. 할아버지 같았고 그러면서도 천진한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스님은 항상 우리하고 같은 방에서 생활하셨거든요. 승가의 위상으로 보면 보통 어른이 아니었지만, 전혀 그런 격을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나중에 우연히 우리 스님이 옛날에 대단한 강백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전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단 한 번도 당신이 배운 티를 내지 않으셨거든요. 그래서 어느 날은 제가 슬쩍 스님을 떠볼 요량으로 한자를 내밀고 여쭤본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님은 일자무식자처럼 생활하셨습니다. 마음 하나만 밝히고 산 어른, 그런 어른이 또 있을까요?”
▲ 춘성 스님 진영

다 버리고 마음 하나만 밝혔던 선승

춘성 스님은 열세살 때 부모님께 당당히 출가의사를 밝히고 백담사에서 만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고 한다. 만해 스님의 유일한 상좌였다. 만해 스님에게서 경을 공부하고 25세에 이르러 평안도 석왕사 전문강원 대교과를 수료, 이후 강학을 전공하여 강백으로서 전국의 운수납자들을 들끓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어느 날부턴가 스님은 손에서 경을 놓고 만공 스님 회상에 들어가 장좌불와 수행 끝에 무애 대자유인이 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거기에 전해져 오는 하나의 일화가 있다. 어느 날 만해 한용운 스님이 춘성 스님을 부르더니 “너는 장가도 가지 말고, 공부도 하지 마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에 춘성 스님은 그 까닭도 묻지 않고 ‘네’ 하고 답했고, 그 길로 스님은 공부와 연을 끊고 참선인의 길로 들어서 입적하는 날까지 배운 바 하나 없는 노승의 모습으로 머물다 갔다. 춘성 스님의 단박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상좌의 입장에서 보면 춘성 스님은 시봉하기에 그리 쉬운 스승은 아니었던 듯싶다. 무엇보다 당신 마음에 어떤 잔상도 남기지 않는 탓에 남들이 보면 이상하게 여길 행동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순간 일어난 생각을 거침없이 드러내 주변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고는 당신은 이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곤 했으니 상좌스님으로서는 곤혹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느 땐가 하안거 해제날이었습니다. 스님이 마을에서 맥주 두 박스를 시켰어요. 그 동안 공부 열심히 했으니 오늘은 마음껏 먹고 마시라고 말이죠. 지금도 놀랄 일인데 그때는 기절할 일이었습니다. 다들 스님이 따라준 맥주잔을 들고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마실 수도 없고, 안 마실 수도 없고…. 결국 스님 호통에 못 이겨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마셨죠. 그런데 그러고 나서 스님께서 느닷없이 법문을 하시는 겁니다. 오늘 먹은 것만큼 더 공부해라. 그때 그 말씀이 얼마나 서릿발 같고 무서웠는지…. 참 특별하신 어른이었습니다.”


춘성 스님이니까!

춘성 스님의 삶과 수행은 수많은 기행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그 곁에는 늘 수명 스님이 있었다. 누가 글을 써달라고 찾아오면 춘성 스님은 서예를 잘하는 수명 스님을 자랑하며 대신 쓰게 했고, 곡차를 찾으면 곡차를 대령했고, 양복을 입고 싶다 하면 양복을 대령했다. 수명 스님은 춘성 스님의 입에서 말이 떨어지면 ‘네’라는 말 외에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도저히 들어드릴 수 없는 말일지라도 수명 스님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았다. 다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루어드리려 애쓸 뿐이었다.
“왜냐구요? 물론 그 행동의 연유를 저희는 알 수도 없고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어른은 가장 맑고 청정한 자유인이었다는 것, 그것만은 알 수 있었거든요.”
춘성 스님이 열반에 드시기 얼마 전 수명 스님은 노사를 모시고 제주도 여행을 떠났었다 한다. 그런데 비행기에 올라탄 지 10여 분 정도 경과했을까. 갑자기 춘성 스님이 내리겠다며 걸망을 지더란다. 수명 스님이 깜짝 놀라 비행기는 기차가 아니라 내릴 수 없다고 노사를 설득하자, 춘성 스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비행기는 떴다 하면 바로 내린다고 들었다. 벌써 10분이 지났는데 왜 못내리느냐.”
천진했던 은사의 모습을 그리며 수명 스님은 뜰 밖을 내다보았다. 이십년 전 바라산에 서광사를 창건하면서 데리고 온 어린 잔목들이 이렇게 울창해졌노라고 스님은 이야기를 돌린다. 빽빽하게 올라선 대나무며 감나무 느티나무가 벌써 가을 운치를 자아낸다.
“우리 스님이 당부했던 건 세 가지입니다. 주지하지 마라. 총무원에 들어가지 마라. 독방 쓰지 마라. 아마 우리 스님이 아니었으면 지금도 저는 많은 것을 욕심내며 살고 있을 거예요. 제가 욕심이 많거든요. 그래서 늘 감사합니다. 우리 스님 만난 것….”
도량 구석구석의 작은 나무들로 안내하는 스님 뒤를 따르며, 어쩐지 수명 스님이 그토록 보여주고 싶어 했던 춘성 스님의 모습을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맑고 천진하고 환희로운 모습이 그곳에 여울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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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성 스님 _ 1891년 출생. 13세에 백담사에서 만해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으며, 20세에 동선 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25세에 평안도 안변 석왕사에서 전문강원 대교과를 수료, 강학(講學)을 전공하고 강백(講白)으로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40세에 덕숭산 수덕사에서 만공 스님 휘하에서 정진하였으며, 금강산 유점사에서 활연대오했다. 45세에 25하안거를 성만했으며, 60세부터 망월사에 주석했다. 1977년 화계사에서 세수 87세 법랍 74세로 입적했으며, 유언에 따라 사리와 재는 서해에 뿌려졌다. 육두문자를 거침없이 써서 욕쟁이스님으로도 통했으나, 평생을 옷 한 벌 바리때 하나만으로 살다간 무소유의 실천가이다.

수명 스님 _ 1963년 동화사에서 출가했으며, 1964년 망월사에서 춘성 스님을 은사로 재출가했다. 1977년 춘성 스님이 입적하실 때까지 망월사에서 시봉했으며, 서예와 서화로 등단하였다. 수명 스님의 글과 그림을 춘성 스님이 아꼈으나, 지금은 모두 놓아두고 용인 바라산 서광사에서 수행정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