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와 하나되어 완전한 해탈인이 되겠나이다

천수경 강의 13

2007-02-13     관리자

경문

나무대비관세음(南無大悲觀世音)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합니다.
원아속득계정도(願我速得戒定道) 원컨대 제가 속히 계정도를 닦아서
나무대비관세음(南無大悲觀世音)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합니다.
원아조등원적산(願我早登圓寂山) 원컨대 제가 빨리 원적산에 올라가게 하소서.

불교에 입문한 수행자가 큰 깨달음을 성취할 때까지 일생을 수행하고 공부해야 하는 것은 계(戒)·정(定)·혜(慧) 삼학입니다. 삼학은 불자들이 지향하는 최고의 선(善)이고, 최후 목표인데 천수경에서는 혜(慧)를 도(道)로 표현하여 구체적으로 지혜로운 삶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계 받는 것 자체가 복이 된다
첫째, 계율을 잘 지켜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계는 마음속의 도적을 잡기 위한 포승줄이며, 지키는 것 자체가 착한 업을 짓는 행위라 하였습니다. 비구(남자스님) 250계, 비구니(여자스님) 348계, 사미(20세 전 동자승)·사미니(20세 전 동녀승) 10계, 우바새(남자신도)·우바이(여자신도) 5계 등 제각각 다르게 지정한 것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계율에 한결같이 포함된 것이 삼귀의계와 근본 4계입니다.
‘삼귀의계’는 불(부처님)·법(가르침)·승(스님) 삼보(三寶)에게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의지하겠다는 계로 부처님께서 초기에 이렇다 할 계율을 정하지 않았을 때에 지키게 했던 기본 계율입니다. ‘근본 4계’는 모든 계율의 맨 앞에 있는 것으로 첫째 살생하지 말 것, 둘째 도적질하지 말 것, 셋째 사음하지 말 것, 넷째 거짓말하지 말 것 등으로 가장 중요한 계율입니다. 여기에 과음하지 말라는 계목이 하나 더 추가되어 5계가 됩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지나치게 술을 마셔 비틀거리고 길을 가다가 닭을 밟아 죽이게 되었는데 엉겁결에 죽은 닭을 땅에 묻어버렸습니다. 조금 가다가 닭의 주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주인이 닭을 보지 못했느냐고 묻자,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술집에 가서 술을 더 먹고 술집 과부와 사음을 범해 버리고 말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과음으로 인하여 네 가지 중한 범죄를 다 저지른 것입니다. 술 그 자체는 자신의 지혜만 감퇴시킬 뿐 다른 사람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과음이 범죄도 저지르는 근원이 되니 아예 술을 안 마시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승속을 가리지 않고 받을 수 있는 ‘보살 48계’가 있습니다. 불자들 중에 지킬 자신이 없다고 계 받기를 포기하려는 사람이 있는데 계는 앉아서 받고 서서 파하더라도 받으라 했습니다. 계를 받으면 받지 않은 것보다는 죄를 덜 짓게 되고, 지키는 것 자체가 복이 됩니다.

닦아 놓은 복은 어디로 안 간다
삼학 중에 두 번째는 ‘정(定)’입니다. 정신을 한 곳으로 몰두하여 자기 자신을 잊어버릴 정도로 집중된 상태를 말합니다. 중생들은 다겁의 습관이 남아있기 때문에 혹 진리를 알더라도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는 대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정에 드는 수련을 해야 합니다. 선정(禪定)에 들기 위해서는 화두나 염불로 8만 4천 마장과 갖가지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모든 마장은 번뇌 망상과 잠이 근원입니다. 이 두 가지 마음을 물리치고 고요한 마음에 머물게 되면 곧 자신의 본질의 세계인 본래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조심해야 하는 것은 망상입니다. 이 망상은 7식 8식이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누구든지 치성합니다. 백년을 염불해도 망상 속에서 하면 이익이 없습니다. 그러나 단 하루를 해도 망상없이 기도하면 공덕이 큰 법입니다. 염불하고 염불하면서 오직 관세음보살만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마음은 ‘관세음보살’ 하고 부르는 것 자체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오래 하다 보면 저절로 망상은 없어지고 언제라도 ‘관세음보살’에 집중되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것을 정(定)이라고 합니다.
노는 입에 염불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염불은 정해진 기도시간 이외에도 차 속에서 걸으면서 말하면서 잠자면서도 염불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염불하다가 용맹정진에 들어가야 합니다. 한 7일이나 10일 정도 밤이고 낮이고 잠자면서도 염불하면 마음이 열리어 깨달음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용을 쓰면 건강을 잃는 수도 있습니다. 닦아 놓은 복은 어디로 안 간다 하였습니다. 소원성취를 위한 기도보다는 공부하는 기도를 하다보면 나머지는 저절로 다 해결되게 되어있습니다.

진리를 실천할 때 완전한 지혜가 나온다
삼학(三學) 중 마지막 세 번째인 혜는 위의 ‘정(定)’이 잘 이루어 졌을 때 저절로 나오는 지혜입니다. 불교의 목적은 완전한 지혜의 성취입니다. 참다운 지혜는 인생을 잘 살아가게 이끌어 줍니다. 보이지 않는 어떤 거대한 힘에게 의지하기만 하여 나약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갖추어져 있는 위대한 능력을 개발하고 창조하는 지혜를 얻어서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뜻입니다. 완전한 지혜는 자기를 비우고 진리를 실천할 때에 나옵니다. 육조 스님은 “정이 곧 혜이고 혜가 곧 정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마음의 세계는 참으로 신비한 세계입니다. 처음에 화두나 염불에 집중해 보면 마음은 늘 움직이던 관습이 있어서 온갖 번뇌 망상의 침범을 받습니다. 어떤 때에는 포기하고 싶어질 정도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치성한 번뇌 망상도 오직 화두 하나에 목을 걸고 열중하면 점점 기틀이 잡히고 망상도 줄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계속 밀어붙이면 어느 순간 오직 화두 하나에 전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는 더욱 용맹심을 내어 끝장을 보고 말아야 합니다. 아무 망상도 없고 마음이 평안을 유지하여 더 이상 무엇을 구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무엇이 되려는 마음도 없고 저절로 화두 하나에 목을 매고 있다 보면 정신은 또렷한데 문득 화두조차 사라지는 희한한 경계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사방이 고요하고 전후좌우도 사라지고 두려움도 없고 나도 없고 텅빈 공간만이 나타나는데 그 속에 아무리 있어도 답답하지 않고 오직 고요만이 있는 것을 느끼는 순간 삼라만상이 일순간에 무너지면서 눈앞이 밝아지고 마음이 투명한 유리같이 맑아지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후로는 듣는 것이 다르고 보는 것이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대자연이 나고 내가 대자연인 것을 그대로 느끼는 경계를 맛보게 되어있습니다. 경전을 펼치면 모르는 내용이 없이 다 아는 희한한 경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바른 수행자가 된 것입니다.
이후로는 스승이 없어도 혼자 공부하는 경지에 이른 것이므로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간혹 세속의 일도 어느 곳에 열중하면 그것이 곧 삼매가 아니냐는 질문을 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집중하는 점에 있어서는 비슷한 점이 있으나 참선삼매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조각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시간에도 마음은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무엇을 만들려는 의지는 끝까지 살아있어야 작업이 되므로 참선에서 얻어지는 무념무심의 경계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움직이는 의지는 분별하는 의지입니다. 정지한 의지는 분별이 없는 의지입니다. 움직이는 의지에 의존하면 그 의지가 걸림돌이 되어서 진리와 합일되지 못하고, 이 또한 번뇌 망상을 일으키는 근원이 됩니다. 그러나 화두는 여일하여지다가 끝내 화두가 정지하여집니다. 순간 무념무심의 경계로 바뀌어 화두는 없어지고 사방이 고요한데 깨어있는 자만이 거기에 있습니다. 순간 대자연이 곧 나이고 내가 대자연과 하나가 됨을 깨닫는 것입니다. 진리의 본질과 하나가 되고 대평안을 얻는 완전한 해탈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상이 천수경에서 이야기하는 도의 의미였습니다. 수행자의 세 가지 공부인 삼학에 등한하면 불제자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