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法)의 경청은 핵심(核心) 수행

초대설법/아짠 마하 부와의 수행법문-여덟 번째 법회(1)

2007-02-13     관리자


이 글은 태국을 대표하는 위빠사나 대선사, 아짠 마하 부와가 영국을 초청방문하여(1974년 6월) 설한 법문과 질의 응답들을 수록한 수행법문집, 『The Dhamma Teaching of Acariya Maha Boowa in London』 중, 여덟 번째 법회의 질의 응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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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법문을 경청해도 기억을 제대로 못해 난감해지곤 하는데요.
답: 들은 것을 기억한다고 해서 어떤 가치를 획득하게 되나요? 아마도 사람들은 수행을 위한 가르침을 얻게 된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기억할 수 없다고 해서 잃게 되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도리어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마음에 평정이 도래하게 되므로 소중한 성과들을 거둘 수 있습니다.
즉, 법문을 일일이 기억하려 들기보다는 그 속에 내재된 법(Dhamma)을 이해하며 듣는다면, 그 법은 저절로 마음속에 간직되어 마음 자체에 깊은 영향을 미침으로써 행복으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따라서 법문을 듣는 동안에는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혀 설법과 동반케 하는 동시에 자신만을 관찰하면서 알아차림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설법과 함께 계속 흘러가다 어느 순간 지혜에 도달하게 될 것이며, 번뇌들로부터 벗어나 청정한 평화가 도래할 것입니다.

문: 기억할 수 없다고 해서 잃은 것은 아니다라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답: 명칭이나 말들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번뇌가 약화되거나 소멸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 안에 확고부동하게 뿌리박은 마음챙김(mindfulness)으로, 마음을 외부로 방출시키지 않고 자신에게만 집중된 ‘앎(knowing)’을 통해 법문을 듣게 된다면 법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 같은 성과들은 법문을 듣는 동안 지속적으로 야기되므로, 번뇌는 점차 약화되다가 어느 순간 완전히 소멸되어버릴 것입니다-붓다 당대(當代)에 많은 이들이 법문을 듣던 중에 도과(道果)에 들었던 것처럼. 이처럼, 법을 경청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수행 중의 하나입니다.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수행자들은 법의 가르침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문: 사마디(samadhi, 삼매) 수행 시, ‘yogi(요가 수행자) sleep’에 빠져들게 되곤 하는데요. 어떤 이는 좋은 현상이라고 하고 또 다른 이는 해롭다고도 하는데, 어느 쪽이 맞는 건지요?
답: ‘yogi sleep’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이릅니까?
〔질문자가 잠재의식(bhavanga) 속으로 깊이 빠져드는 상태라고 답변하자〕, 그렇다면 정작 본인은 그 상태로부터 어떤 것들을 느끼는지 자문해보십시오. 그런 느낌들이 그 상태에서 빠져나온 후에도 지속되는지요?

문: 그 상태의 잔재는 없지만 심신에 신선함과 활력을 느끼게 됩니다.
답: 어째서 (자기 안에서 발생한 문제인데) 다른 사람들의 견해(좋거나 나쁘다는)에만 의존하려 듭니까? 본인 스스로 그 상태가 좋은지 나쁜지를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 질문에 대한 나의 견해를 밝히는 것 또한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그대가 나의 견해에 귀속될까봐 우려되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서 언급되는 ‘법(Dhamma)’은 그 시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결코 분열되거나 분란을 일으킨 적이 없습니다. 때문에 법문을 듣는 이는 법으로부터 원하는 가치를 충분히 획득할 수 있게 마련입니다. 기실, 이 세상 모든 질문들에 대한 최상의 답변은 (다른 어느 누구의 답변도 아닌) 바로 이 ‘법’인 것입니다.
모든 질문들에 대한 (타인의) 완벽한 답변은 (질문자의) 마음에 ‘독(毒)’이 될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 안에서 야기되는 현상들을 스스로 점검해서 명확히 파악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모든 질문들에 대한 나의 답변은 그 질문자가 도달한 법의 유형-그가 도달한 단계에 따라, 높거나 중간이거나 낮은-에 따라 좌우되게 마련입니다.
그대의 질문은 질문자의 ‘법에 대한 이해(basis of Dhamma)’가 모호하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무릇 수행자라면, 자신이 사마디수행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마음이 충분히 고요해졌는지를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잠이 든 건지, 언제 깨어났는지를 남들은 알 수 없습니다. 잠이 든 듯한 몽롱한 상태에 빠져 어떻게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겠습니까?
마음이 고요히 침잠하려는 순간에 마음을 부려서 활동하게 만든다면, 선정에 들기 위해 요구되는 마음의 확고부동함을 구축할 수 없게 됩니다. ‘사마디’란 잠이 든 것처럼 아무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수행자는 외부의 어떤 것이 아닌, 바로 자신의 내면을 항시 면밀히 살펴 알아차려야 함을 유념하십시오.

문: 일상 속에서 사마디 수행을 제대로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인(世人)들에게는 일상 속에서 감당해야 할 일들이 있게 마련인데, 사마디 수행을 계속 이어가려면 그런 일들을 중단해야 하는 건지요?
답: 마음이 자신의 향상이나 퇴보의 징후들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자기성장의 계기로 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그런 징후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자신에 대한 미혹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그에 관한 올바른 탐구는 마음과 계기(契機)에 달려 있습니다.
흔히, 할 일이 많아 명상수행을 제대로 못하게 되어 수행성과도 저하되면, 마음이 퇴보되었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마음은 퇴보되지 않습니다. 향상이나 퇴보의 징후들은 단지 마음의 특성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정작 마음 자체는 퇴행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