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계와 명상의 약속

내 마음의 법구

2008-09-09     관리자

▲ 김영택 작, 금강산 보덕암

그림은 작가의 분신이라고 봅니다. 작가가 붉으면 그림도 붉게 물들어 나오듯이, 작가의 심성이 맑으면 그림에서 깨끗한 기운이 느껴지겠지요. 저는 항상 제 자신이 ‘무색무취’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야만 그림의 대상이 왜곡되거나 때가 타지 않고 화폭에 담기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산하와 선조들이 지어 놓은 건축문화재를 제대로 그리려면 제 자신이 정제되어야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완전하게 무색무취 할 수는 없겠지요. 노력할 뿐입니다.
1994년 디자이너 생활을 접고 펜화를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불가에 입문하면서 스승님에게 ‘5계(不殺生, 不偸盜, 不邪淫, 不妄語, 不飮酒)’를 지키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불자라면 누구나 지켜야 한다는 5계를 지키는 생활이 쉽지만은 않더군요. ‘불살생’을 지키기 위해 채식을 시작하고 나서 식당에서 계란을 뺀 비빔밥 외에는 먹을 만한 음식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대다수의 과자에 계란과 쇼트닝(돼지기름)이나 정제가공유지가 들어간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더 힘든 것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50년간 먹어온 육식에 대한 욕망이 얼마나 큰지 알았습니다. 하루 3갑 이상 피우던 담배를 끊은 것은 오히려 쉬운 일이었습니다. 술을 먹지 못하니 친구들을 만나기도 어려웠고, 접대의 자리는 더욱 힘들었습니다. 한 번 자리를 함께 했던 분들은 다시는 만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하다못해 집사람 조차도 ‘밥맛없는 사람’이라며 외식 자리를 피하더군요. 분위기 좋은 곳에서 고기를 구우며 술잔을 나누는 것이 ‘부부간의 사랑’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채식 생활 15년이 되는 요즈음, 연구실에서 가까운 인사동 채식 식당에서 ‘채식 짬뽕’과 ‘채식 탕수채’를 즐겨 찾는 것은 아직도 육식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증거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소한 것이라도 평소에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하며 살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약점을 잡은 집사람이 “결혼 후 바람을 피운 적이 있느냐?”고 묻는데 참 난감하였습니다. 나를 위한 거짓말과 남을 위한 거짓말을 구분 하는 것도 배웠습니다. 얼굴이 못난 여인에게 “예쁘다”고 하는 거짓말은 죄가 되지 않는 것이지요.
5계를 지키는 것으로 스승님과의 약속이 지켜진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매일 3시간 이상의 명상 수행을 게을리 하고 있는 것입니다. 터만 닦아 놓고 집을 짓지 않은 꼴이지요. 스승을 위한 약속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일에 이리도 게으름을 떨고 있습니다. 좋은 작품으로 명성을 만든다는 허황 속에 사는 제 자신에 실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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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샘 김영택 _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졸업. 대한민국 산업디자인전 심사위원, 세종대학교 겸임교수를 지냈다. 국제상표센터가 전 세계 탑 디자이너 54명에게 수여한 ‘디자인 앰버서더’에 국내 최초로 뽑혔고, 1994년 벨기에에서 개최된 제1회 세계로고디자인 비엔날레에 초청되었다. 통도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의 건축문화재를 펜화에 담아 주간조선 등에 연재하였으며, 현재 중앙일보에 ‘김영택의 펜화기행’을 연재하고 있다. 2004년, 2006년 학고재에서 초대전을 열었고, 2005년 현대백화점 전국 순회전, 2007년 마산문화방송 특별 초대전을 가졌다. 저서로는 『펜화기행』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