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문제로 어떻게 현실에 참여할 것인가

연중특별기획 - 이 시대를 진단한다 / 종교의 현실 참여

2008-09-09     관리자

지난 6월 30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서울시청 앞 광장 일대에서 시국미사를 드리고 개신교, 불교가 시국기도회, 시국법회로 화답하면서 종교의 사회 참여 문제가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세속으로부터 초연해야 할 종교가 왜 현실문제에 참여하느냐, 이미 정권퇴진을 외치며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된 촛불시위에 종교인들이 참여하는 것은 정교분리 원칙에 어긋나는 것 아니냐, 평화집회의 취지는 좋지만 혼란을 부추긴다는 등의 비판을 촛불시위에 반대하는 보수 언론과 단체들이 제기했다. 반면 찬성하는 쪽에서는 종교의 현실 참여가 왜 문제가 되느냐, 두 달 이상 촛불시위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현 정부의 대국민 기만과 소통 부재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이고 종교인들도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박했다.
종교의 사회 참여는 정당한가 아닌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종교의 사회 참여, 현실 참여는 정당하다. 인류 역사에서 성(聖)과 속(俗)의 분리는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닐 뿐더러 실제로 완전한 분리는 가능하지도 않다. 일평생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천주교의 봉쇄수도원도 결국 세상과 일정 부분 소통하지 않으면 유지 자체가 불가능하고, 심심산중의 선방도 완전 자급자족하지 않는 한 속세와 완전한 단절이란 있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종교의 존재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스스로 자족하며 세상과 담을 쌓고 산다면 빛과 소금, 목탁의 역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근대 이후 수많은 학자들이 과학과 이성의 칼날로 종교를 재단하며 ‘신의 죽음’을 선포했지만, 정보산업화 시대에 더욱 종교가 활기를 띠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심우도(尋牛圖)의 마지막 장면이 저잣거리(속세)로 들어가 중생을 제도하는 입전수수(入廛垂手)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성과 속은 손등과 손바닥,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등을 돌리고 있으나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근·현대사를 보더라도 종교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현실에 참여해왔다. 19세기 중반에 등장한 동학(천도교)은 조선말의 봉건적 압제와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일제강점기에는 천도교·대종교·보천교·청림교 등의 민족종교들이 항일투쟁 전선에 앞장섰고,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은 개신교·천도교·불교 등의 종교계 대표였다.
1970년대 이후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를 이루는 주도적 역할도 종교계가 담당했다. 군사정권 시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계 인사들은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WCC)와 연대해 민주화와 인권운동에 앞장섰고, KNCC가 있던 ‘종로 5가’는 민주화 운동의 아지트였다.
1974년 지학순 주교가 김지하 시인에게 자금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것을 계기로 등장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도 이후 노동자·농민·빈민 등 약자들의 인권을 대변하며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다. 1980년 5·18 학살의 진상을 세상에 공개한 것도, 1987년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조작 사실을 폭로해 6·10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했던 것도 사제단이었다.
불교계의 사회 참여 역사도 길다. 임진왜란 때에는 호국불교를 주창하며 승병들이 왜군에 맞서 싸웠고, 만해·태허·수월·구하 등 일제에 항거한 스님들도 많았다. 또한 1980년대 들어서는 민중불교운동이 일면서 민주화와 인권운동에 힘을 보탰고, 근래에는 환경을 파괴하는 무분별한 개발을 막는 데 크게 기여해왔다. 개신교, 원불교, 가톨릭 등과 함께 이명박 정부의 한반도 대운하사업에 반대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이처럼 종교의 현실 참여는 당연하고 또 필요하다. 문제는 어떤 일로 얼마만큼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최근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종교인들이 시국집회를 여는 것이 타당한 것인가에 대해 논란이 분분했던 것은 이런 까닭이다. 가령 외세의 침략이나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와 인권을 주창하는 것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이지만, 쇠고기 수입 문제에 대해 전면 재협상을 요구하며 종교인들이 나서는 데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종교계 시국집회의 아쉬움

광우병 논란과 촛불시위의 도화선이 된 것으로 평가받는 MBC ‘PD수첩’의 왜곡보도가 뒤늦게 논란을 빚고 있는 데서 보듯, ‘미국 소=미친 소=인간 광우병 발병’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소의 광우병 발병 가능성, 인간 광우병의 발병 가능성과 원인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아직 진행 중이고,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로는 실제 인간 광우병의 발병 가능성은 매우 낮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정부가 국민의 건강권을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지만, 어디까지 보장할 것이냐는 현실적인 여건과 상황에 맞게 정해야 할 일이다. 무작정 건강권 보장만 내세운다면 국내산이든 수입산이든 농산물에 함유된 농약과 중금속 등 유해성분이 전무(全無)해질 때까지 아무 것도 먹지 말아야 할 것인가. 대기오염이 전혀 없는 상태가 되기 전까지는 숨도 쉬지 말아야 할 것인가.
따라서 미국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 그 자체보다는 대통령과 정부가 미국과 협상하는 태도와 방식, 그리고 이에 대해 국민에게 솔직히 설명하고 설득하는 대신 속이고 감추는 소통 부재의 상황이 더 문제였다. 인수위 때부터 국민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어몰입 교육, 한반도 대운하 계획 등을 밀어붙이기 식으로 추진해 가뜩이나 불만이 팽배한 상황에서 쇠고기 문제는 폭발의 도화선이 됐을 뿐이다.
그러므로 종교계가 이 문제에 개입할 때에는 좀 더 근원적인 문제 제기와 대안 제시가 필요했다. 쇠고기 수입 문제로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쇠고기 자체보다는 국민건강권을 보장하기 위한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고, 정부의 여러 가지 실책과 소통부재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회초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불교계의 시국법회 역시 아쉬웠다. 쇠고기 고시 철회와 전면 재협상, 국민과의 소통, 내각 전면 쇄신과 경찰청장 교체 등을 요구하며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역설했지만, 정작 육식이 필요 이상으로 만연한 이 시대의 식문화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었다. 우리가 왜 쇠고기를 수입해야 하는가. 육식의 수요가 많기 때문이다. 거리에 나가 식당 간판을 둘러보면 횟집 정도를 빼면 고기를 팔지 않는 곳이 어디 있는가. 수요는 많고 국내산 공급은 부족하니 수입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따라서 육식과잉의 식문화를 개선하기 위한 대안 제시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더구나 불살생을 중요한 계율로 삼고 사찰음식이 친환경, 웰빙문화로 확산되고 있는 시점에서 불교는 더욱 그래야 하지 않았을까.
뜻밖에도 이런 지적은 개신교 쪽에서 제기됐다. 개신교 신자 교수들의 단체인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는 6월 10일 발표한 성명서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밀어붙이기식 리더십과 이로 인한 소통단절, 쇠고기 수입 협상의 졸속 타결 등을 지적하면서 기독교의 입장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생명·평화 차원에서 창조질서의 회복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육류 소비를 줄이며, 가두어 기른 동물과 과도한 호르몬 사용을 한 동물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 이익에 눈이 먼 대량생산의 ‘공장식 축산업’이 광우병을 비롯해 닭, 오리, 돼지 등의 떼죽음과 대량 살처분을 초래했다는 것, 광우병 문제만이 아니라 과도한 농약 사용, 좁은 닭장과 과도한 항생제 사용 등 국내 가축 사육의 열악한 환경 등 식품 전반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는 것 등을 이들은 지적했다.
따라서 이번 종교계의 시국집회는 참여 자체는 정당했으나 내용은 아쉬웠다. 진정으로 생명·평화를 지키는 길은 광우병을 막는 데서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처음부터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부가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사실상 접게 된 것은 촛불시위가 거둔 최대의 수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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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동 _ 서울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경향신문 기자를 거쳐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산중에서 길을 물었더니』, 『하늘로 열린 땅 티베트 타클라마칸 기행』, 『선방에서 길을 물었더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