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로마에서 꽃핀 간다라 불교미술

오아시스 실크로드를 가다 7 / 파키스탄 탁실라

2008-07-30     관리자

▲ 섬세하게 조각된 부처님의 발에 예배하고 싶었다.


부처님이 걸어 나올 것만 같은 탁실라 박물관

간다라는 원래 간다라족이 사는 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간다라 지역이라고 하면 파키스탄의 페샤와르와 탁실라를 포함하여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잘랄라바드 지대를 뜻한다. 기원전 4세기에 8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간다라 지역에 들어와 주둔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곳을 떠날 때 많은 병사들을 남겨두고 떠났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만들어 놓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 그리스인들은 우상과 신전이 없는 이 새로운 종교를 위하여, 불상을 만들고 사원을 지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화려한 간다라 불교예술이 탄생한 것이리라. 그 후 간다라 지역은 아쇼카 왕의 전법을 계기로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점차 흥성했다.

간다라는 원래 간다라족이 사는 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간다라 지역이라고 하면 파키스탄의 페샤와르와 탁실라를 포함하여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잘랄라바드 지대를 뜻한다. 기원전 4세기에 8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간다라 지역에 들어와 주둔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곳을 떠날 때 많은 병사들을 남겨두고 떠났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만들어 놓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 그리스인들은 우상과 신전이 없는 이 새로운 종교를 위하여, 불상을 만들고 사원을 지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화려한 간다라 불교예술이 탄생한 것이리라. 그 후 간다라 지역은 아쇼카 왕의 전법을 계기로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점차 흥성했다.

▲ 탁실라 박물관에 전시된 불상.

탁실라는 불교문화는 물론, 진리탐구와 지식 전수의 중심지로서 오늘날의 대학과 같은 곳이었다. 또 탁실라에서 발굴되는 유물들이 로마양식과 닮아있기에 탁실라를 가리켜 ‘동양의 로마’라 칭하기도 한다. 탁실라는 비르마운드, 줄리안 사원, 모흐라 모라두, 잔디알 사원, 시드캅 등 수많은 유적지가 있으며, 1980년 유네스코로부터 대단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탁실라 박물관의 정원은 정갈하게 가꾸어져 있고, 분홍빛 부겐빌리아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탁실라 주변에서 발굴된 불상과 동전, 고대 항아리 등이 전시되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모흐라 모라두에서 발굴된 일곱 스투파의 복제품이 사람들을 반겨준다. 가사의 주름이 섬세하게 잡혀 있어 불상은 금방이라도 자리를 털고 걸어 나올 것만 같다.
박물관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줄리안 사원이 있다. 줄리안 사원에는 여러 기의 작은 스투파들과 불상들이 있다. 사원에는 스님들의 거처인 요사채가 있는데, 2층으로 된 구조물이며 한 층에 29개의 방이 있었다고 한다.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어 올라가 보았다.
이 줄리안 사원에서 옛 수행자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사방을 돌로 쌓아 만든 방인데, 한 사람이 기거하기에 적합한 크기의 방이다. 부처님을 모실 수 있는 감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럿이 예불을 보기도 하였지만 혼자서 고즈넉하게 예불을 보았을 것 같다. 두세 벌의 가사와 발우, 그리고 몇 권의 경전이 소유한 물품의 전부였을지도 모를 어느 수행자의 방에 앉아보았다.

▲ 줄리안 사원에 전시된 소탑의 한 부분.

▲ 줄리안 사원의 전체 전경

 

마우리야 왕조를 이어 이곳을 지배한 그리스인들은 불교에 상당히 매료되었다. 메난드로스 왕은 카불 분지, 페샤와르 분지, 스와트, 탁실라를 거점으로 해서 나라를 다스렸다. 불교경전에는 그리스인 왕 메난드로스와 인도의 승려인 나가세나가 서로 문답을 주고받았던 것을 기록한 『밀란다팡하』라는 경전이 있다. 한역으로는 『나선비구경』이라고도 한다. 메난드로스 왕과 나가세나 비구가 주고받은 문답은 깊은 사유와 철학이 담겨 있으며 굉장히 세련된 문답이라고 할 수 있다.

▲ 다르마라지카 사원에는 크고 작은 탑들의 기단부가 남아있다.
줄리안 사원의 입장권으로 다르마라지카 사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산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풀로 뒤덮인 스투파가 보인다. 아쇼카 왕이 다르마라지카 스투파를 만들면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유골을 모셨다고 한다. ‘잠자는 악공’, ‘고뇌하는 악공’이 출토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많은 불상들이 파괴되었으며, 거대한 부처님의 두 발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그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너무나 정교하게 조각해 놓은 발톱, 그 발에 입 맞추고 싶었다. 평생을 길에서 보낸 부처님의 일대기를 떠올리면서 그 발이 바로 법륜(法輪)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과 그의 계승자들에 의해 눈부시게 발전한 불교는 5세기에 등장한 에프탈 왕조의 미히라쿨라 왕에 의해 절멸하고 만다. 현장 법사는 미히라쿨라 왕에 의해 사원이 파괴되고 승려들을 비롯한 9억이나 되는 사람들이 살육됨으로써 불교가 거의 절멸되었다고 『대당서역기』에 적고 있다.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달리다

▲ 해질녘 염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
















▲ 우리의 70년대를 연상케 하는 이발소 풍경이다.
▲ 더 이상 사람이 탈 수 없을 것 같은데 마을버스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카라코람 하이웨이(KKH)’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고속도로가 아니라 고도가 높은 도로를 말한다. 원래는 사람이나 말이 간신히 지나다닐 수 있는 좁고 가파른 길이었다. 이 길은 동서교역의 통로였기에 비단, 도자기, 향신료를 비롯한 많은 물품들이 오고갔다. 또 혜초 스님을 비롯하여 천축으로 법을 구하러 가는 많은 구법승들이 넘나들었던 길이었다.
카라코람 하이웨이는 잘 닦여진 길이지만 아래로 내려다보면 까마득한 절벽이요, 위로 쳐다보면 커다란 바위덩이가 아래로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계속해서 인더스 강을 끼고 달리는데 그 강물은 잿빛을 띤 흙탕물이라 마음을 시원하게 달래주지는 못하였다.
카라코람 하이웨이에는 수백 개의 암각화로 유명한 칠라스가 있다. 칠라스는 옛날부터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동서교역의 중요한 루트로 이용되어 왔다. 동물이나 사냥꾼 등 선사시대부터 새겨진 암각화가 있으며, 기원전후 1세기 사이에 불교를 주제로 해서 조성된 암각화들도 있다. 그 뒤 5세기부터 8세기까지 또다시 수많은 암각화들이 새겨졌는데, 이 암각화들은 간다라미술의 전통을 잇고 있다. 암각화를 보기 위해서 다리를 건넜다. 산도 아니요, 언덕도 아닌 그 곳에는 가시가 많은 사막의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윤기가 도는 갈색 바위들은 햇빛을 받아 더욱 빛났고, 바위 표면에는 부처님과 법륜, 불탑들이 얇게 새겨져 있다. 불탑의 양식이 우리나라나 중국의 양식과 닮아 있기에 천축으로 가는 구법승이 그렸을 것이라 추측해 보았다. 사무치게 부처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오롯이 새겨진 불탑에 삼배를 올렸다.
칠라스를 지나 베샴에 도착하니 밤이다. 베샴은 전기사정이 좋지 않은지 온 동네가 어둠에 잠겨 있다. 다음날 이른 아침을 먹고 또 다시 길을 떠났다. 전날 하루 종일 보고 온 풍광이 또 다시 눈앞에 펼쳐진다.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바위투성이의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처져 있는 이곳을 지나면서 혜초 스님은 이렇게 심경을 토로하였다.

“그대는 서쪽 이역이 멀다 하고 / 이 몸은 동쪽이 멀다고 탄식하노라.
길은 험하고 산마루는 눈으로 덮여있는데 / 험한 골짜기에는 도적떼가 길을 트는구나.
하늘을 나는 새도 깎아지른 산에 놀라고 / 사람은 기우뚱거리는 다리 건너기 힘드네.
평생에 눈물 흘린 일이 없었는데 / 오늘만은 하염없이 눈물 뿌리도다.”

평생에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는 혜초 스님의 두렵고 암담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 칠라스의 바위에 새겨진 불상과 불탑. 구법승들의 향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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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윤정 _ 1998년 「수필공원」으로 등단하였고, 현재 지하철 ‘풍경소리’작가이자 편집위원, 현대불교신문 객원기자, ‘사진집단 일우’ 회원이다. 저서로는 인도 네팔 기행집 『신들의 땅에서 찾은 행복 한 줌』, 금강경 에세이집 『마음의 눈』, 『당신의 아침을 위하여』, 『잣나무는 언제 부처가 되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