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의 빛으로 촛불을 삼을지니

선어유희(禪語遊戱) 7

2008-07-30     관리자


1980년대 황지우 시인은 사람들이 꽃으로 빛나는 세상을 이룬다는 ‘화엄(華嚴: 꽃으로 장엄된)광주’를 노래했다. 2008년도에는 수십만 개의 촛불을 밝힌 광화문에서 숭례문으로 이어지는 거리는 ‘화엄(火嚴: 촛불로 장엄된) 서울’이라고 어떤 언론에서 이름 붙였다. 현대의 촛불은 종교적 신앙의미를 넘어서서 자기의사를 표시하는 또다른 수단으로 승화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앞에 촛불은 또다른 모습으로 등장한 것이다.
본래 촛불은 종교적인 색깔이었다. 촛불 자체가 성역을 성역답게 하는 장치요, 또 시설이었기 때문이다. 불가(佛家)에서 촛불은 무명(無明)의 어둠을 몰아내고 세속의 번뇌와 때를 태워버리는 상징물이었다. 마음의 탐욕을 제거하여 어두운 사바세계를 밝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광명이기도 했다. 법신인 비로자나불은 ‘광명변조(光明遍照:빛으로 두루 비춤)’로 번역된다. 부처님의 초기제자인 가섭 삼형제(마하가섭과는 다른 인물임)는 본래 불을 숭배하던 배화(拜火)교도였다. 밖으로 나타난 유형의 불을 섬길 것이 아니라 마음 속의 불을 밝히라는 가르침을 듣고서 세존께 귀의했다. 그리고 부처님 역시 포살을 행할 때는 반드시 등불을 켜도록 하셨다.
시청 앞 광장의 수많은 촛불은 맨촛불이 아니었다. 종이컵으로 감싸안은 촛불이었다. 선어록에서 말하는 ‘등롱(燈籠)’의 모습 그것이었다. 등롱은 촛불을 바람으로부터 보호하고 또 모기 나방들이 달려들어 불에 태워지는 것을 막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다. 선사들은 여름밤에 등불을 사용할 때 꼭 등롱을 갖추도록 했다. 그건 지혜의 불인 동시에 자비의 불이 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하겠다. 오늘의 종이컵 촛불 역시 그 등롱의 교훈을 그대로 잇고 있었다.
하지만 등롱은 노주(露柱: 기둥)와 함께 때로는 무정물(無情物) 내지는 비정물(非情物)의 대명사로 사용된다. 그러나 그 무정물은 무정물로 끝나지 않았다. 유정물(有情物)로서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법이라고 하는 진리였다. 그래서 부용도해(1043~1118) 선사는 “법의 요체를 들려주니 등롱이 귀를 기울인다(能談法要 燈籠側耳)”고 말했고 대혜(1089~1163) 선사는 “등롱이 모자를 벗고 천태산으로 올라간다(燈籠脫帽上天台)”고 한소리 했던 것이다.
그리고 기타대지(祈陀大智 1289~1366) 선사는 이런 선시까지 남겨 놓았다.

나무 돌이 설법하고 사람이 듣나니 無情說法有情聽
바람이 차가운 숲을 흔드니 낙엽은 뜰에 가득하네 風攪寒林葉滿庭
담벽에 사람은 없지만 거기에 귀가 있나니 牆壁無人却有耳
등롱과 노주가 또한 귓속말을 주고 받네 燈籠露柱且低聲

하지만 등롱은 불과 함께 할 때만이 제 역할이 주어진다. 등롱 속의 촛불은 자기를 태워서 주변을 밝힌다. 스스로가 촛불이 되고 스스로 진리가 될 때 그 촛불은 진짜 촛불이 된다. 일본 천태종 본거지 히에이산(比叡山) 엔라쿠지(延曆寺) 근본중당(根本中堂)에는 1,200년 동안 꺼지지 않고 본당을 밝히고 있는 ‘불멸의 법등’이 오늘까지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묵묵히 한 분야에서 정진한다면 언젠가 이 세상의 한 줄기 빛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리에게 좀더 의미있는 등불이 되라고 이런 유훈을 남기신 것이다.

“스스로를 등불 삼고 진리를 등불 삼으라(自燈明 法燈明)”
그렇게 될 때 그 빛은 바로 영원한 나의 장명등(長明燈)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종의 촛불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 촛불은 깨침의 촛불이어야 했다.

용담숭신(782~865) 선사와 덕산선감(782~865) 선사의 촛불은 깨달음을 위한 매개체였다. 용담을 찾아간 덕산은 오랫동안 이런저런 저간의 이야기를 나눈 후 방문을 나섰다. 그런데 이미 바깥은 깜깜해져 신발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방안으로 들어왔다.
“왜 돌아왔는가?”
“문 밖이 어둡습니다.”
그러자 용담 선사는 종이에 불을 붙여 덕산 스님에게 건네주었다. 그가 불을 받으려는 순간 ‘훅’하고 그 불을 꺼버렸다. 그 순간 덕산은 그 자리에서 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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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_ 해인사로 출가했다. 해인사승가대학, 실상사 화엄학림, 동국대(경주)에서 경전과 선어록을 강의했다. 월간 「해인」 편집장과 조계종총무원 신도국장·기획국장을 거쳐 현재 재정국장 소임을 맡고 있다. 번역서에는 『선림승보전』 상·하(장경각 간)가 있다. 불교계의 여러 매체와 일간지 등에 깊이와 대중성을 함께 갖춘 글을 써왔으며, 최근 『아름다운 인생은 얼굴에 남는다』를 펴내 독자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