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사 밝은 달!

2001-09-07     관리자

[청량사 밝은 달]

제가 도반들과 함께 봉화 청량사를 처음 찾은 것은 의과대학 졸업반인 79 년 가을로 생각됩니다. 어려웠던 6 년의 공부가 끝날 무렵이라 기념으로 추석 연휴를 이용해 가을 여행을 같이 간 것이지요.

지금처럼 가을빛 익어가는 산하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포장도 안된 길을 덜컹거리는 버스로 달려 도착한 청량사는, 낡은 법당과 쓰러질 듯한 요사채 한 채가 전부인 퇴락해 가던 이름없는 사찰이었습니다.

청량사에는 그 당시 늙으신 비구니 스님 한 분과 여자 어린이 한 명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노 비구니스님은 첩첩산골을 찾아 온 젊은 불자들이 기특하게 보였는지 청량사에서 하룻밤을 묵게 해 주셨습니다.

깊은 산엔 해가 일찍 지는 법(그 때만 해도 전기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앞 산의 윤곽마저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깜깜해진 절에서 할 일없이 노닥거리다 일찍 잠이 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절에서 잠만 잘 수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인지, 아니면 젊은 나이에 호승심 탓인지 좌우간 새벽녘에 잠이 깼습니다. 어렴풋한 창문을 열고 밖을 나가니, 아!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밤 하늘에 달이 둥그렇게 떠 있었습니다.

보름달이었는지 아닌지는 기억이 확실치 않으나 자는 동안 어느새 밤하늘에 그렇게 달이 휭그러이 떠 올랐던 것입니다. 어둡던 청량사 산 일대가 일거에 밝아지는데, 안 보이던 봉우리가 보이는 것은 물론 저 멀리 산들 역시 첩첩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밤하늘 높이 떠 온 누리 밝히던 그 달! 그리고 그 밝은 모습! 그것은 이십 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가슴에 진하게 남아 있는 장관입니다.

해가 아니고 달이어서 저 산 구석구석까지 뭐가 있는지 보이지는 않지만, 그리고 개울에 물 먹으러 온 저 축생이 토끼인지 너구리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산이 있구나, 축생이 물 먹으러 왔구나, 하는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지요.

그 후 부처님 공부를 하면서 깨달음에 관한 생각이 들 때마다 청량산 밝은 달이 생각납니다. 깨달음이 오는 모습도 이와 같지 않은가 하고 말입니다. 삼독과 무명에 덮여 사는 지금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이지만, 마음의 밝은 달이 떠 오르기 시작하면 그 깊던 산골이 뿌옇게 밝아 오듯 그렇게 밝아 오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마음의 밝은 달이 높이 떠 올라 삼계의 밤하늘을 비추일 때면, 청량사 산하가 그렇데 환히 빛을 발하듯 마음의 밤하늘도 그렇게 밝게 개어 가는 것은 아닌지....

구산 큰스님은 '조계산 달 따가거라!'라고 사자후를 설하셨지만, 그리고 저는 어리고 어리석어 조계산 달은 따지 못했지만, 젊은 날의 청량산 밝은 달은 지금도 제 가슴에 깊은 감동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종린 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