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도 없고 위아래도 없는 잔치

희망씨앗

2008-07-30     관리자


2008년 6월 10일 밤 9시, 촛불문화제의 공식적인 행사가 끝났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거리행진을 하면서 내 가슴 속 가득한 열정과 감동을 분출하고 싶지만, 오늘만은 차분히 앉아 글을 쓰기로 했다. 주위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이 현장을 보다 실감나게 그 누구보다 빨리 전하기 위해 노트북 자판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다. 나는 노트북 대신 노트에 볼펜으로 끼적이고 있다. ‘우리는 무적의 김밥 부대’의 일원이 준 생수를 마시면서 말이다.
촛불문화제에 참석한 이한열 열사 어머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어른거린다. 21년 전 민주주의를 위해 피와 눈물을 받쳐야 했던 그들,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다. ‘대통령 직선제’라는 소중한 권리를 위해서 그들은 그토록 치열하게 싸웠건만, 난 지난 대통령 선거 때 정치계에 환멸을 느껴 투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앞 높은 컨테이너 장벽에 누군가 재미난 플랜 카드를 걸어놓았다. “경축! 서울의 랜드마크 명박산성”. 사람들의 무한한 창의력에 무거운 마음을 한시름 털어버린다. 이런 재치있는 발상과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 시위를 한다는 것에 놀랄 따름이다. 잠시 서대문 쪽으로 걸었다. 도로 위 중앙선을 따라 2열로 가지런히 놓여있는 촛불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청와대 방향으로 올라가는 모든 길이 봉쇄되어 갑갑하고 짜증나지만 전경버스에 걸린 또 다른 플랜카드에 다시 한 번 웃는다. “곧 대통령이 타고 갈 차니 부수지 마세요~.” 먼저 살아간 사람들의 희생으로 싹튼 ‘자유’라는 소중한 가치가 21년이 지난 지금 이곳에서 새롭게 피어났다는 것을 농담 같은 이 말 속에서 느껴본다.
저 멀리 ‘아고라’라고 적힌 깃발도 보인다. 아고라는 요즘 인터넷에서 가장 유명한 토론방으로 촛불 문화제의 중심이기도 하다. 웹2.0을 기반으로 한 서비스들은 사용자의 자유로운 참여로 가치를 창출해내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하기에 적합한 사이버공간으로 요즘 각광받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를 지금 우리들이 실현해 나가고 있다. 실제로 전 세계 언론, 방송 매체들은 우리의 새로운 시위문화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다.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했을 때보다 더욱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다.
다시 광화문으로 발길을 돌린다.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훌쩍 넘었지만 거리는 여전히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들이 들고 있는 피켓에 쓰인 재치 넘치는 표현들과 각종 포스터를 패러디한 그림들에 웃음을 참을 수 없다. 길 한 편에는 오늘도 커피와 차를 공짜로 나눠주고 있는 ‘촛불 다방’이 보인다.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바쁘게 뛰어다니던 한 무리의 예비군들이 한 쪽 구석에서 잠시 쉬고 있으며, 묵묵히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들도 있다. 길 한 가운데에는 사물놀이와 함께 춤판이 벌어졌고, 김밥부대는 여전히 김밥과 생수를 공수하느라 바쁘다. 이순신 장군 동상 앞 컨테이너 장벽에서는 아직도 낙서판이 벌어져 있다. 낙서도 하나의 예술로 자리 잡은 이 시대에 저만큼 훌륭한 작품은 또 없을 것만 같다.
우리와 같이 촛불을 들고 있는 외국인들도 볼 수 있다. 물론 그들의 속내는 모르겠지만 분명 표정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지금 그들도 이 시간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남녀노소, 국경의 구분 없이 잔치판이 벌어진 이곳에는 좌우를 나눌 ‘건덕지’도 없으며, 위아래를 구별할 분위기도 아니다. 그야말로 ‘촛불 잔치’가 벌어진 것이다.
저 멀리서는 ‘아침 이슬’이 들린다. “아까 촛불문화제에 양희은, 안치환 씨 왔는데.”라며 늦게 온 나의 일행들에게 슬쩍 아쉬움을 부추겨 본다. 요즘 난 하루 종일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흥얼댄다. 이곳 촛불 잔치에 참여하면서 어떻게 사람들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 가는지를” 알았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람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속 좁은 편견도 매몰찬 아집도 없기에 그 어떠한 이념도 끼어들지 못한다. 그저 사람으로서 가지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애정과 배려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누가 뭐래도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다.
그런 이유 때문에 컨테이너 장벽 넘어 북악산 기슭에서 홀로 밤을 보내고 있을 그 분이 정말 딱하기 그지없다. 컨테이너에 가려 볼 수 없는 것인지 보기 싫어 컨테이너를 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아름다운 이 광경을 지금 아니면 언제 어디서 볼 수 있겠는가.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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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상연 _ 동국대 대학원 영화과 석사를 졸업하였고, 현재 영화평론가 협회 소속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