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첫 이슬람 수도인 라호르에서, 고행하는 붓다상, 앞에 서다

오아시스 실크로드를 가다 6 / 파키스탄 라호르

2008-07-14     관리자

▲ 아우랑제브가 지었다는 바드샤히 모스크. 너무나 넓어 가슴까지 텅 비어 버리는 느낌이었다.

유물로만 남은 불교의 자취를 찾아

▲ 더운 날씨 때문인지 거리에서 팔고 있는 라시(야쿠르트에 얼음을 탄 음료)는 인기였다.

라호르 공항에 곧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오자, 조금은 흥분되었다. 간다라미술(B.C 1세기~A.D 7세기까지 지금의 파키스탄 북서부와 아프가니스탄 동부지역에서 발달한 불교 미술양식)의 보고(寶庫)이며 그 어느 곳보다도 많은 불교 유적지와 유물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원래는 같은 민족이었지만 종교상의 이유로 해서 1947년 영국으로부터 분리 독립하게 되었다. 인도는 국교는 없지만 힌두교도가 많고, 파키스탄은 이슬람교가 국교이며 국민의 97%가 이슬람교도이다. 파키스탄에서는 이슬람교도의 5대의무인 신앙고백, 희사, 예배, 금식, 성지순례가 모든 가치기준의 척도가 된다.

▲ 파키스탄의 영화관. 영화 포스터가 매우 관능적이라 놀랐다.
라호르는 파키스탄 제2의 도시이며 상업중심지로서 500만 명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다. 11세기 초에 가즈니라는 투르크족이 마흐무드 가즈니를 왕으로 하여, 1022년 인도의 첫 이슬람 수도인 라호르를 세웠다. 그 후 무굴제국(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인도에 있었던 마지막 이슬람 제국)의 3대 황제인 악바르가 수도를 델리에서 라호르로 옮기고 14년간 라호르 성(城)을 건축했다. 1981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라호르 성과 살리마르 정원이 무굴제국의 흔적으로 남아있다. 무굴이라는 말은 인도에서 ‘몽골’을 부르는 말이다. 무굴제국은 동서교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유럽의 런던이나 파리보다 더 번창하였다고 한다.
오토릭샤들이 아침 출근자들을 위해서 대기하고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짜이를 파는 노점상이 있기에 짜이 한 잔을 주문했다. 이곳 또한 인도와 다를 바 없이 새벽부터 짜이 가게에는 남자들이 몰려 있었다.

▲ 아침에 나귀 4마리를 몰고 가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고행하는 붓다상’을 통해 선열을 느끼다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라호르 박물관은 영국의 지배를 받던 1864년에 세워졌으며 무굴양식과 영국의 건축양식인 고딕양식을 혼합하여 설계되어졌기 때문에 그 분위기가 독특하다.

▲ 라호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행하는 붓다상'
이곳에 소장되어 있는 ‘고행하는 붓다상’은 간다라미술의 걸작품으로 꼽히는가 하면, 라호르를 세계적인 문화의 도시 반열에 올려놓는 데 큰 몫을 하였다. 시크리에서 출토된 ‘고행하는 붓다상’ 앞에 섰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만남이기에 첫사랑을 만난 것처럼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싯다르타 태자는 그 당시 인도의 수행자들이 행하던 어려운 고행만을 골라 수행하였다. 몇 톨의 쌀알이나 깨알과 한 모금의 물로 하루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의 눈은 해골처럼 움푹 들어가고 뺨은 가죽만 남았다. 몸은 뼈만 남은 앙상한 몰골로 변해갔다. 이러한 극단적인 단식을 행하던 모습을 조각한 것이 ‘고행하는 붓다상’이다. 선정인(禪定印)의 자세로 결가부좌하고 있는 붓다의 모습에서 선열(禪悅)이 느껴졌다.
시크리에서 발굴된 스투파에는 붓다의 일대기가 새겨져 있어,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붓다가 걸어가신 길을 떠올려 볼 수 있었다. 박물관에는 간다라지역에서 출토된 많은 불교유물들을 비롯하여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중국의 도자기와 비단 등도 전시되어 있다.
라호르의 큰 시장이 박물관에서 가깝다고 하기에 점심도 먹을 겸해서 가보았다. 가게마다 진열해 놓은 물품들이 통로를 가로 막았고, 사람들은 그 비좁은 통로 사이를 뚫고 다녀야만 했다. 일상용품을 파는 잡화점과 화려한 색의 차도르와 사리를 파는 옷가게들이 많았다. 어느 골목으로 들어서니 짜파티(밀가루를 얇게 밀어서 만든 일종의 빵)를 굽는 가게들이 연이어 있었다. 일명 먹자골목이다. 알고 있는 것이 짜파티와 카레뿐이기에 그것을 주문했는데 날씨가 더운 탓인지 잘 넘어가지 않았다.

자아로써 자아를 진압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

▲ 여러 가지 카레 종류를 파는 아저씨가 짜파티로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타지마할을 건축한 샤자한(1592~1666, 인도 무굴제국의 제5대 황제)은 제위에 오른 아그라보다도 라호르를 더 좋아하였다고 한다. 라호르 성에는 황제의 알현실을 비롯하여 작고 아름다운 진주 모스크와 90만 개의 보석으로 꾸며진 나울라카의 방이 있다. 샤자한의 왕비 뭄타지마할이 하늘의 별을 따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하늘의 별이라도 따주고 싶었던 샤자한은 그녀에게 거울 궁전을 지어주었다. 네 벽면을 온통 거울로 장식한 거울궁전은 화려하였다.
라호르는 무굴제국의 영화와 함께 슬픔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라호르에는 자한기르(1569~1627, 무굴제국의 제4대 황제)가 묻혀 있다. 그의 아들 샤자한은 라호르에서 반란을 일으켰는가 하면, 자한기르의 부인 누르자
▲ 화려한 문양의 니깝(눈만 내놓는 옷)을 입은 멋쟁이 여인들.
한을 라호르에 유배시키기도 했다.
라호르 성과 샤자한의 아들 아우랑제브(1618~1707, 무굴제국의 제6대 황제)가 지었다는 바드샤히 모스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신발을 맡기고 모스크에 들어서자, 너무나 넓은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건물 내부에 1만 명, 넓은 뜰에 9만 명이 예배를 볼 수 있는 무굴 최대의 모스크였다. 햇빛에 달구어진 정원을 걸어서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지만 어떤 모양과 상을 인정하지 않는 그들인지라 이맘이 앉는 자리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 대신 천장의 유리문을 통해 빛이 쏟아져 내렸다. 빛은 알라(Alla, 이슬람교의 유일·절대·전능의 신)를 상징한다.
▲ 라호르 성의 내부. 왕을 알현하기 위해 대기하는 장소인데 알현실은 2층에 있다.
그래서 모스크에는 수많은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설계되어져 있다.
이슬람의 어느 수피 시인은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은 뱀에 지나지 않거니와 보이지 않는 내면의 우상은 용(龍)과 같다. 우상 하나를 부수기는 쉬운 일이다. 그러나 자아를 진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라고 노래했다. 마음에 담고 있는 수많은 관념과 우상을 파괴한다는 것은 정녕 쉽지 않은 일이다.
샤자한에 의해 세워진 왕족들의 휴양지 살리마르 정원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복잡했다. 마차와 오토릭샤와 오토바이와 자동차가 한데 어울려 달리는 도로는 이방인의 눈에는 너무나 혼란스럽고 불안했다. 아름드리 큰 나무와 온갖 화초들이 있는 살리마르 정원은 전형적인 무굴정원이다. 분수 가운데에는 왕을 위한 대리석 옥좌가 마련되어 있고 호수 중앙에는 무희가 춤을 출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있다고 해서 잔뜩 기대했는데 뿜어져 나오는 물은 아이들 오줌줄기와도 같았다.
잠시 대리석 옥좌에 앉아서 왕이 된 기분으로 분수를 둘러보았다. 실망 대신 상상을 해보았다. 어둠을 밝힌 램프불은 물에 반사되어 화려한 꽃을 수놓았을 것이고, 무희들의 춤사위는 관능적이었을 것이며, 바람에 실려 온 향기로운 장미향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었을 것 같다. 아무래도 오줌줄기같이 흘러내리는 분수보다 동네 꼬마들이 물에 들어가서 신나게 물장난하는 모습이 훨씬 아름답고 생기 가득하였다. 날씨도 더운데 나도 풍덩 물에 빠지고 싶었다.

 

▲ 전통적인 무굴정원이라 할 수 있는 살리마르 정원.

-------------------------------------------------

문윤정 _ 1998년 「수필공원」으로 등단하였고, 현재 지하철 ‘풍경소리’작가이자 편집위원, 현대불교신문 객원기자, ‘사진집단 일우’ 회원이다. 저서로는 인도 네팔 기행집 『신들의 땅에서 찾은 행복 한줌』, 금강경 에세이집 『마음의 눈』, 『당신의 아침을 위하여』, 『잣나무는 언제 부처가 되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