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뿌연 절망 속에 내 스스로 희망이고 싶다

지혜의 향기 / 희망, 대한민국

2008-07-14     관리자

새벽 4시, 해 뜨는 시간이 빨라졌다 해도 간간히 켜진 가로등이 아니면 사물을 식별할 수 없는 시간에 한 집, 두 집 불이 켜진다. 농사꾼의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수입소가 밀려와 한우 값이 폭락해도 소에게 먹일 여물을 챙기는 손길은 쉴 수 없는 것이고, 쌀값이 전혀 수지가 맞지 않아도 논에 물 대는 손길은 바쁘기 그지없다. 충남 홍성으로 귀농한 지 6개월, 겨울에는 보지 못했던 분주한 모습을 보면서 정말 농촌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새벽마다 느끼게 된다.
내게 있어 이번 홍성에서의 삶은 3번째 귀농의 결과다. 대학에 다닐 때 여러 활동 중 가장 즐거웠던 일이 농촌봉사활동이었고, 패쇄적인 성격 때문에라도 농촌에 정착하고 싶었다. 그래서 지난 1998년과 2004년, 각각 전북 완주와 충남 홍성으로 귀농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첫 번째 귀농에서는 아무 준비도 없이 전업농을 하겠다고 뛰어들어 1년이 못되는 사이에 생활비를 바닥냈고, 두 번째 귀농에서는 생활비는 어디서라도 일해 벌자며 꾸역꾸역 일거리를 얻었으나 그동안 쌓인 업 때문에 몇 개월 일하지 못하고 쫓겨나면서 끝을 내고 말았다.
사실 지난 두 번의 귀농에서는 본격적인 농사를 시작도 못했었다. 농사 지을 땅을 구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다니며 허드렛일만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이번엔 1,200평 땅과 집을 얻어 부모님과 함께 정성껏 땅을 갈고 씨를 뿌리는 중이다. 그러나 그간 이 일 저 일 하며 돈을 번다고 농사일은 늙으신 부모님께 맡기기 일쑤였다. 그러다 본격적인 파종기인 5월에 접어들면서 조금씩 거들기 시작했는데, 농사일이 몸에 영 착 달라붙질 않는다. 그동안 도시에 길들여진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2~3시간 일하고 쓰러져 자기 일쑤인데, 주변 아는 분들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농사일하기 틀렸다”면서, 보통 뭐라고 하는 게 아니다.
잘 알려진 대로 홍성, 특히 그중 내가 살고 있는 홍동면은 유기농, 유기축산으로 유명한 곳인 만큼 농민들의 부지런함은 그 어느 곳보다 대단하다. 제초제나 농약, 화학비료를 안 쓰는 만큼 몸으로 그걸 때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타박을 받을 때는 오히려 난 그들에게 유기농보다 한 단계 낮지만 그래도 친환경농산물로 잘 팔리는 무농약 재배를 권유하곤 하는데, 그들은 그런 나를 정말 경멸스럽게 쳐다보곤 한다. “농사를 때려치우는 한이 있어도 유기농을 하겠다”는 것이다. 경멸스런 그들의 눈초리가 야속하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로 인해 뿌듯한 마음이 오롯이 솟구치곤 한다.
비록 난 현재 빠른 농촌적응을 위해 무농약 재배로 농사를 짓고 있지만, 미국 수입소로 인한 광우병과 유전자변형 농산물로 인해 먹을거리에 대한 불안이 커지는 이때, 아무리 힘들어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올곧게 자연과 인간을 위하는 마음을 펼치는 농민들이 있는 걸 보면, ‘아, 저렇게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래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어’라고 발그레 미소를 짓게 된다.
주변 상황이 어떻든 간에 끌려 다니는 게 아니라 스스로 주인이고 희망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부처님에게서 배운 큰 가르침을 이곳 농부들을 통해 확인하며 내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도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을까?” 특별히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시작한 농사는 아니지만 고집스러운 주변 농부를 보면서, 그들의 고집을 조금이나마 배워 나도 남들에게 뭔가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누구에겐가 절망하고 희망을 찾기 전에 내 스스로 주인공이고 희망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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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근 _ 인터넷 관련 잡지사 기자와 불교계에서 웹 기획자로 일하다, 지난해 충남 홍성군 홍동면으로 귀농해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