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수기] 이곳에 석굴을 파라(上)

신앙수기-은혜의 대행에 이르기까지

2008-06-25     임성환

     [1] 크나큰 원력 속에서

   부처님 모시고 수행할 불도량을 세우겠다고 권선문을 들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지내온 지난 날, 그 동안에 겪은 수많은 일들, 그리고 그런 일들을 통하여 이룩된 나의 불자로서의 성장과 불사의 진행……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면 오직 인생이라는 한 삶이 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화주책을 들고 여러 큰스님 회상을 두루 다니고, 수많은 법회에 참석하고, 수많은 스님들 신도님들을 만나는 사이 저는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고 또한 배웠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참기 어려운 수모와 고통은 이것이 저에게 인간형성의 교재였다고 생각합니다.
   화주책을 들고 다니는 지 14년, 불사는 이제 막 시작의 단계입니다. 건평 200평의 2층 법당이 금주산 산허리에 진좌했고, 그리고 산봉우리에 2미터의 부처님 존상이 우뚝 서고, 석굴법당 약 200평의 바탕이 형성되었으니 이만 하면 겉모양만으로도 족히 시작은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저에게 이와 같은 불사를 해낼 수 있었던 믿음과 발원에 뜻을 합해 준 여러 불자님들 그리고 보다 우리들의 발심정진을 통하여 이 땅 위에 크신 뜻을 이루고자 하신 불보살님의 원력의 지행은 참으로 존귀하고 막중한 감격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 도량이 우리나라 평화통일의 결정적 계기가 되고 거룩한 평화와 번영이라는 부처님의 성스러운 뜻을 이루려는 대보살의 근거지가 되자면 앞으로 많은 일들을 해야 합니다. 석굴법당을 완성하고 부처님과 여러 우리나라 조사님들을 모시며 거룩한 뜻을 따라 수행할 대보살들의 수련도량이 되자면 우리 앞에 많은 일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저는 부처님의 인도를 받아 끝 모를 이 일에 몸을 던졌습니다. 언제 완성될 지 기약할 길 없는 거창한 불사를 향하여 앞으로만 내어닫는 생활을 계속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미숙한 저 한 사람의 일이 아니라 불보살님의 구세의지의 나타남임만큼 불사는 결정코 이룩될 것을 확신합니다. 부처님의 위신력은 막힘이 없고, 부처님의 대지혜와 방편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과 오늘을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심정진을 꾸준히 인도하시면서 필경 구세원력을 이룩하시는 거룩하신 불보살님을 저는 잘 알기 때문입니다.

     [2] 쓰러진 아기를 안고

   저는 처음부터 국토통일을 발원한 거창한 불사를 생각조차 한 일이 없습니다. 다만 제 어린 것이 현대의학으로 고치지 못할 불치의 병이 들었을 때 다만 어미된 몸으로 그를 구하든지 죽이든지 결판 짓겠다는 뜻에서 부처님 앞에 기도한 것이 그 시작입니다. 저의 지난 일을 모두 기록할 수 없으나 우선 편집자의 요청을 버리지 않는다는 범위에서 몇 자 적어 보겠습니다.
   저는 신심이 돈독하신 부모님의 덕화인 듯 어려서부터 부처님이 좋았습니다. 저의 집 곁에 있던 서울 옥수동 미타사 부처님은 저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따뜻한 미소입니다. 언제부터인지 부처님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대학에서 법학을 하고 법학도로서의 수업을 한다고 책에 묻혀보니 저는 엉뚱하게 법학보다도 철학에 관심이 기울여졌고, 특히 불교학에 대해서는 무엇인지 끊지 못할 유혹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세속의 법학과 불교의 경전을 친근히 하면서 젊은 날을 지냈습니다. 대학을 나온 뒤 신문사 편집부에 근무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고 동국대학 총장을 지냈던 백성욱 박사님과도 그 당시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몇 번인가 백 박사님을 찾았을 때 저에게는 유독 고마운 배려를 해주셨습니다. 매일 금강경강의를 해주신 것입니다.
   그 후 결혼한 후에도 절에 열심히 나갔습니다. 교학에 깊이 잠입했다기보다는 그저 절이 좋아서 절에 찾아가는 열성신도가 되었습니다. 그때는 우리 불교계가 혁신기라도 맞았는 듯, 크게 동요하고 있었습니다. 소위 불교정화 운동이 한참이었고 저도 그 중심인 조계사와 선학원을 출근하다시피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래서 당대의 선지식이신 동산 · 효봉 · 원오 여러 큰스님을 뵈올 수 있었습니다. 그때 받은 불명이 오늘의 무심행입니다.
   원래 불자라면 차분한 수행이 첫째의 기초인데 그 무렵 저는 젊다는 이유에서였는지 그저 행복에 들뜬 명자불자가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이윽고 저에게는 인생일대의 최대의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그것은 여덟 달 난 첫딸이 막 기고 일어서며 재롱부리던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진 것입니다. 뇌성소아마비였습니다. 아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호흡만 근근이 하는 식물인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미친 듯이 식물 같은 육체덩어리를 부둥켜안고 병원과 병원을 뛰어다녔습니다. 그 사이에 수없이 울고 불며 속을 태웠습니다. 그러기를 6년이 지나던 어느 날,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부산 아주머니가 저에게 통봉을 내렸습니다.『이 잡것아! 병원에 갖다 준 돈 백분지 일만 가지고 백일기도나 해봐라. 그렇게 병원에 미쳐서 무엇이 된다더냐.』하며 욕으로 핀잔을 했습니다. 저는 이 말에 정신이 들었습니다. 절에서 만난 인연으로 친해진 아주머니였는데 그 말씀 한 마디에 꿈이 깬 것 같았습니다.
   그 무렵 저는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소문난 의사라면 모조리 찾아 다녔고, 최신 의료법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쫓아다닌 끝에 기진맥진했던 그때였습니다. 이런 병신자식 세상에 살려 두느니 차라리 같이 죽자, 동해바다에 뛰어들자, 제 마음은 그렇게 굳어 있었습니다. 결행을 3일 앞둔 그때에 저는 정말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부산아주머니는 저에게「미친년」이라고 욕을 했습니다. 정말 그 말이 저에게 새로운 전진의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3] 백일기도의 영험

   저희 집안 언니 되시는 분이 출가하시어 강원도 홍성 용문사에 계셨습니다. 저는 아기를 안고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강원도 맑은 물은 단풍에 젖어 있었고 산과 산을 이은 흰 구름은 저를 현실의 세계에서 꿈나라로 달리게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100일을 기약하고 결사적인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15년 전의 일입니다. 아기를 곁에 뉘어 놓고 부처님 앞에 서서 관세음보살만 불렀습니다. 밤이고 낮이고 쉬지 않았습니다. 죽기를 결심하고 시작한 기도였기에 밥 먹는 시간도 염불은 생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를 50일, 그렇게도 곱던 단풍도 지고 어느덧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밤낮 불같은 마음으로 염불하고 있던 어느 날 옆에 누워 있던 식물 같은 고깃덩어리가 소리를 내기 시작 하였습니다. 정말 신기한 소리였습니다. 6년 만에 들어 보는 울음소리입니다. 밤낮으로 울기를 7일이 계속되었습니다. 저는 딸의 몸을 몇 번인가 살펴봤지만 이유 없이 울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저의 염불은 더욱 열을 더하여 갔습니다. 관세음보살 부르는 소리 하나하나 잊지 않도록 염불을 계속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온몸 마디마디에 반점이 솟아 있었고 그곳을 아파해서 긁어주면 딱지가 떨어졌습니다. 그러기를 몇 번인가를 반복했습니다. 딸이 운 것은 옴 몸 마디마디가 아팠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부처님의 자비하신 신력이 잠든 어린 생명을 일깨워 주신 것 같았습니다. 온 몸에 생기가 흐르고 막힌 것이 통하고 나쁜 독소가 밖으로 밀려 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딸은 차차 힘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부축하면 일어서는 상태까지 왔습니다.
   이 신기함, 그 무렵의 감동을 어떻게 다 말하겠습니까? 부처님 앞에 아이를 뉘여 놓고 염불할 때는「이 자식 죽이든지 살리든지 부처님께 맡깁니다」한 것이었는데 부처님은 명백하게 한 생명을 살려 주셨고 죽음을 결심했던 저의 생명도 살려 주셨습니다.

     [4] 금룡암으로

   처음 제가 아이 병을 기도로 고치겠다고 하니 남편은 찬성하지를 않았습니다. 정신없는 사람으로 보인 모양입니다.
  『정신 나간 소리 그만 하시오. 돌덩이 부처가 어떻게 병을 고친단 말이오……』
   미쳐도 그만 미치라는 태도였습니다. 그럴 것도 당연합니다. 저의 남편의 무신을 조금도 탓할 것이 못됩니다. 우리들은 부처님에게 막연한 행운은 기대했어도 병을 고쳐 준다고는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의학이 손을 든 불치병을 기도로 고칠 아무 근거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힘써 설득했습니다. 우리가 해볼 것은 다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제까지 부처님께는 매달려 보지 않았으니 마지막 소원을 걸어 보자고 반복 청을 했습니다.
  『당신 소원이 정 그렇다니 한번은 해보시오.』
   이렇게 해서 시작된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백일 이내에 아이가 일어나 앉은 것입니다.
   딸은 밥상 앞에 앉혀 놓으면 먹을 생각이 나는 성 싶었습니다. 수저를 보면 손이 약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기를 수십 차례, 마침내 어린 것은 수저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의 감격을 짐작해 보십시오.
   백일기도가 끝나도 저의 기도는 계속되었습니다.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증거를 두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온 가족이 기뻐서 협력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남편도 저보다 더 열심스런 신자가 되었습니다. 걸어지지 않는 것을 걷게 하고, 잡혀지지 않는 것을 잡게 하려고 남편은 눈물겨운 부정(父情)을 발휘했습니다. 매를 손에 쥐고 가죽만 붙은 어린 것의 종아리를 때려가면서 아이를 단련시켰습니다. 딸은 매에 못 이겨서 노력하고 또 노력했습니다. 한 걸음 걷다 넘어지고 매 한번 맞고 또 두 걸음 걷고 이런 눈물겨운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저의 온 집안이 기도와 환성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백일기도를 마치고, 기도할 절을 생각할 무렵 우연히 지금의 금룡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수려한 산, 웅건하면서도 조화를 이룬 장엄한 이 산이 따뜻한 훈기로써 저를 맞이해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쉽게 이야기가 진행되어 3평정도 되는 법당이 있는 금룡사를 갖게 되었습니다.
   기도는 다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염불은 계속되고 아이는 또 울고 마디마디에서 반점과 부스럼은 계속해서 나고…… 딸의 병은 급속도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는 중에 해는 몇 번이고 바뀌고 신록과 단풍이 몇 번인가 뒤바뀌며 흘러갔습니다. 저는 눈으로 가득 덮인 산골을 내다보며 염불을 계속했습니다. 아이도 곁에 앉아서 입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러기를 얼마가 흘렀는지 드디어 딸은「화엄성중」을 부르게 되고 그 다음부터는 저 혼자서도 곧잘 부르게 되었습니다.

     [5] 신기한 위신력

   언젠가는 새벽 3시에 염불하고 있는데 아이도 열심히 화엄성중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살그머니 나와 일을 보고 있는데 낮 12시가 되어도 아이의 염불소리는 끊이지 않고 들려왔습니다. 제가 문을 열고 법당에 들어서자 그때야 부시시 일어섰습니다.
  『그렇게 오래 앉아서 다리 아프지 않니?』
   아이는 태연했습니다.「엄마 내가 오래 있었어?」하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리고서 좀 있다 말을 이었습니다.
  『엄마 ! 나 뭐 봤다. 하늘에서 꽃이 막 내려오고 또 천사라는 사람이 내려 왔어. 그리고 나더러, 너 다리 아프니? 다리 펴는 운동법을 가르쳐 줄께……하면서 운동법을 가르쳐 주었어.』
하더니 팔다리를 움직여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딸 현정이는 혼자서 곧잘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산골 물도 소리 없이 흐르고 산 둘레에 연둣빛 향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어느 날, 딸은 법당에서 기도하고 저는 밖에서 공양 올릴 준비를 하고 있는데 별안간 법당에서 딱! 하고 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는 무슨 일이라도 났는가 싶어 얼른 법당 문을 열고 보니 딸은 이거 보라는 듯이 저를 쳐다보고 제 다리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정말 기적이 일어나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딸은 일어설 때 두 발가락으로 일어서고 발꿈치가 땅에 닿지 않았었습니다. 그렇던 것이 딱 하는 순간에 발뒤꿈치가 땅에 닿았던 것입니다.
  『엄마 이것 봐! 이렇게 붙었다.』
   딸은 신기한 듯이 제 얼굴과 제 다리를 번갈아 쳐다봤습니다. 저는 딸을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그때부터 현정이는 잘 걷게 되었고 팔도 움직이고 말도 제법 하게 되었습니다.
   걸음이 정상화되면서 완치까지에는 5년이 걸렸는데, 그 사이 저의 남편은 아버지로서 눈물겨운 강훈련을 계속 시켰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