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논단] 염불사상의 흐름

해외논단

2008-06-22     이시가미 젠노(石上善應)

     [1] 만인(萬人) 구원의 길

   불도의 수행은 자신을 연마하고 자기를 향상시키는데 있다. 그런데서 불교는 행(行)의 종교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반드시 모든 사람이 행을 닦아서 성인이 되기도 어렵다. 오늘날 불자들은 불상이나 탑사를 헌공하는 공덕이 크다고 알고 있다. 그렇다고 불상이나 탑사를 봉헌하는 것이 부처님의 참뜻에 맞는다고 한다면 많은 가난한 사람들은 소망을 이루기 어렵게 된다. 지혜가 많거나 특출한 인격이 부처님의 뜻에 맞는다고 한다면 대다수인 어리석은 사람들은 소망이 끊기고 만다. 또, 학문을 많이 한 사람만이 부처님의 뜻에 맞는다면 다수인 교학에 어두운 사람은 역시 절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다시, 계행을 잘 지키는 이가 부처님의 뜻에 맞는다면 예를 갖지 않은 사람들은 구원받을 길이 끊기고 만다.
   그렇지만 계 가진 사람은 적고 파계한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부처님은 이들을 차별하시지 않을 것이리라. 모두를 평등하게 구원해 주실 것이다. 이런데서 염불법문이 필요하게 된다. 염불만 하면 극락정토에 반드시 왕생하게 된다. 뱃속이 검다고 하여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부처님의 자비를 말할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염불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어리석은 사람들, 밑바닥에 깔린 사람들에게 있어 염불은 유일한 구원의 길인 것이다.

     [2] 관념(觀念)이냐 칭명(稱名)이냐

   염불의 의미도 불교의 흐름 속에서 크게 바뀌었다. 염불이라 하면 소리를 내어 부처님의 성호를 부르는 것이 상식인데 당초에는 그렇지가 않고 오히려 글자 그대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마음에 두는 쪽이 강하였었다. 염불에는 관상(觀像)과 칭명(稱名)의 두 의미가 있는데 처음에는, 성호를 기억하고 생각을 모으며 관상하는 것이 보통이고, 뒤에는 관상과 칭명이 중복하였고, 다시 그 뒤에는 칭명염불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흔히들 말하는 염불 · 염법(念法) · 염승(念僧)은 바로 불법승 삼보의 뜻을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또한 육념(六念)이라 하여 삼보를 염하는 외에 염계(念戒: 부처님의 계율을 생각하는 것), 염시(念施: 보시의 공덕을 생각하여 탐욕을 여의는 것), 염천(念天: 하늘을 생각하여 나쁜 마음을 버리는 것)의 뜻으로도 쓰였다. 여기의 염불이란 분명히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의 수승한 공덕을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악도에 가지 않고 천상에 태어나게 된다.
   현재 남방불교도 삼귀의 문을 부르고 있다. 한편에 부처님의 직제자에 대한 존경도 크다. 부처님 제자들은 전법 교화에 힘써 많은 신자를 가지고 있었다.
   부처님 제자에 대한 신앙은 언제부터인지 분명하지는 않으나 민중이 구하는 바로는 부처님이든 제자든 아무래도 좋았다. 율장에는,「야차」의 노여움을 받아 상인들이 탄 배가 폭풍을 만난 대문이 있다. 사람들은 그때 자기들이 믿는 온갖 신들의 이름을 부르고,「저의 재난을 면하게 하소서」하고 기도 한다. 그중에 부처님 제자인 부루나의 가호를 기도하자는 말이 나와,『저 성자 부루나에게 귀의하나이다.』이렇게 반복 기도한다. 그랬더니 부루나존자가 돛대 위에 가부좌한 모습으로 나타나 폭풍을 잠재워 주었다고 하였다.
   염불의「염」은 앞서도 말한 바처럼 기억하고 마음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특히 정토교의 원류의 하나로 드는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에는 염불의「염」은 첫째 열거(列擧)와 주시(注視)를 특질로 하고 지혜를 키워 준다 하였으며, 둘째로는 기억에 대하여 일상생활에 필요한 16종 방법을 들고 있다. 그리고 셋째로,「설사 백 년 동안 악한 일을 행하였더라도 한번 부처님을 염하면 그 사람은 천상에 태어난다」고 하였고, 그 말에 이어,「돌을 물에 던지면 가라앉지만 배위에 있는 큰 돌은 가라앉지 않는다」는 유명한 비유가 있다.
   법화경 보문품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선남자여! 어떤 사람이 사형을 받게 되더라도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큰소리로 부르면 처형자들의 칼이 부러진다.」또「선남자여, 어떤 사람이 죄가 있거나 없거나 큰 칼을 쓰고 수족이 결박 되었더라도 관세음보살을 염하면 곧 풀려나게 된다.」
   어쨌든 초기불교에서 명확하지 않았던 염이 어느 시기부터인지,「부르는 것, 소리를 내는 행위」가 첨가된 것 같다.
   불교수행에는 정신을 통일하여 부처님을 생각하는 행위는 바람직하다. 그 행위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 제자들과 많은 부처님에게로 발전한다. 불명경(佛名經)에는 3천불이 보이고 예배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일본에서는 염불이라 하면 아미타불 1불만을 소리 내어 부르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당(唐) 선도(善導) 대사는《무량수경》에 보이는 10념(十念)을 분명히 십성(十聲)으로 해석하였다. 
   무량수경에,「내가 만약 성불하면, 시방중생이 지극한 마음으로 나의 국토에 나고자 하여 십념(十念)까지 할 때 만약 그 사람이 나의 국토에 태어나지 않으면 정각을 이루지 않으리라」한 대목에 대하여 선도의 <관념법문(觀念法門)>에는,「내가 만약 성불할 때, 시방 중생이 나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원하고 나의 이름을 불러서 십성(十聲)에 이를 때 나의 원력에 의하여 저가 나의 국토에 나지 않는다면 정각을 이루지 않으리라」하여 십념을 십성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선도의 시대에 중국에서「염」을 소리로 내어 하는 것이 보편화한 것을 알 수 있다.

     [3] 만인을 위한 염불로

   일본에서는 관상염불과 구칭염불이 둘 다 행하여지면서도 관상 쪽이 수승하다는 의식이 강한 것 같다. 그러나 불교는 수승하다든다 못하다든가 하는 기준으로 판단될 수 없다. 번뇌를 가득 갖춘 범부인 우리들에게 필요하고 또 용이한 것이어야 한다. 일정한 장소나 특정인만이 할 수 있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언제 어디서든 누구이든 쉽게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여기에 이르러서 인간 자신을 응시한 데서 칭명염불이 우월하다고 할 수 있게 된다. 염불은 아미타불만을 입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것이 부처님을 향한 다른 길이 끊긴 대다수의 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간단한「나무아미타불」이면 되는 것이다.
   이런데서 염불은 한번 부르면 된다는 주장도 있게 된다. 법연(法然)은 일념에만 사로잡히는 주장을 물리쳤다. 매일 염불에 싸인 생활을 좋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때로는 1만 편 또는 6만 편을 불렀다. 어쨌든 아미타불의 맑은 세계가 열리면 된다.
   종교의 세계는 오만하여서는 안된다. 정토교에서는 더욱 그렇다.「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의 염불은 역시 우리들이 부처님의 본원을 믿고 부처님에게 내어 맡기는 염불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 대정대 교수


♧이 글은 일본「대법륜(大法輪)」49권 제11호에서의 초역(抄譯)이다. <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