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산(古靈山) 보광사(普光寺)

고사(古寺)의 맥박

2008-06-20     관리자

   불광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광탄행 버스를 타고 30분 남짓 가면「보광사 5km」란 팻말과 함께 왼쪽 야산 가득 자리 잡은 시립 벽제 공동묘지가 보인다. 봄볕 따스한 양달에 이야기하듯 옹기종기 모여 있는 묘지들과, 길옆에서 묘비석을 다듬고 있는 석공의 손길은 절을 찾는 이의 감회를 더욱 깊게 해 준다.
   그러나 버스는 무심히 길을 따라 굽이굽이 돌아, 10여분 후에 보광사 입구 마을에 다다랐다.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영장리 고령산 중턱 골짜기에는 숨은 듯 숨은 듯 보광사[普光寺 · 주지 도형(道馨) 스님]가 자리하고 있다. 멀리서 보면 우거진 수풀만 보이건만, 곧게 뻗은 능선과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깊은 골짜기 등 그 수려한 산세(山勢)로 명찰 보광사가 있음이 가히 짐작된다.
   보광사는 신라 진성 여왕 8년(894년) 도선(道詵) 국사가 창건한 비보(裨補) 사찰이다. 그리고 고려 고종 2년(1215년) 원진(元眞) 국사가 중창하고, 고려 우(禑)왕 14년 (1388년) 무학(無學) 대사가 3창(創)한 것이 임진왜란(1592년)시 병화(兵火)로 소실되어 광해군 14년(1622년) 설미(雪眉) · 덕인(德仁) 두 대사가 법당과 승당을 복원하고 현종8년(1667년) 지간(支干) · 석련(石蓮) 두 대사가 중수(重修)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건 시 도선 국사는, 풍수지리에 꼭 맞은 명당을 찾아 절을 세웠으나 맞은 편 산에서 절터를 내려다보고 있는 커다란 바위가 있어 절의 기가 쇠함에, 절 앞에 나무를 빽빽이 심어 바위의 눈길을 피하게 하였다고 한다.
   부처님 도량을 세움에 있어 자연의 조그만 흠조차도 용남하지 않았던 도선 국사의 세심한 배려 때문인지 보광사는 오랜 역사동안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하였다.
   나라가 위급한 때에는 나라를 구하는 호국도량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였고 태평성시에는 효를 기리는 도량이 되었다. 나라의 대소사의 기도 도량이었으며 임진왜란 시는 승병의 총 집결지이기도 하였다.
   얼마 전(1980년)에는 나라의 혼란을 맞아 남북통일과 국태민안을 기원하며 호국불상을 모셨다. 이 불상을 모시게 된 데에는 진기한 내력이 있다.
   보광사 대웅전에는 고려 2년 원진 국사가 절을 재창할 때 법민(法珉) 대사가 불상 5위를 조성해 봉안하였었다. 그런데 지난 1979년 8월, 칠월 백중을 기해 개금불사를 하던 중 부처님좌대 밑에서 여래진신사리(如來眞身舍利) 20과를 발견하였다.
   오색이 영롱한 사리를 친견한 교계와 학계 등 각계에서는 이 경사스러운 일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곧 신심이 돈독한 몇몇 불자들이 부처님사리 모시는 불사를 추진할 것에 뜻을 합쳤다. 이에 독실한 여러 신도들이 지극한 정성으로 높이 13m의 거대한 화강암 석가모니 불상을 조성하여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호국 영장 보광사의 맥박은 오늘에 더욱 새로워졌다.
  『이조 영조대왕은 효성이 지극하였지요. 대왕이 왕위에 오르기 몇 년 전 왕은 돌아가신 생모 최숙빈의 묏자리를 찾으러 여러 명산을 두루 다녔답니다. 그런데 이곳 고령산에 와서야 그 발길을 멈추고 이곳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숙빈의 묘를 만들고, 왕위에 오른 후에는 절 뒤에 어실각을 지어 어머니제사를 지내었다 합니다. 그리고 국운을 빌기 위하여, 부처님께서 마흔여덟 가지 서원으로 중생제도를 성취하는 것을 본따 48간의 기각을 세워 만세루(萬歲樓)를 지었답니다.』
   주지 스님의 설명대로「대웅보전(大雄寶殿」,「고령산(古靈山) 보광사(普光寺)」「만세루(萬歲樓)」의 현판 등은 영조대왕 친필 그대로 남아 있다.
   그 후에도 이조왕실은 보광사의 대소사에 참여하고 국운과 왕실의 번창을 비는 기도도량으로 삼았다. 조선말 영친왕의 생모 엄귀비는 영친왕의 만수를 기원코자 법당 안에 예불종을 조성 봉안하기도 하였다 한다. 
   영조 때의 모습그대로인 대웅전 단청은 그 시대 특유의 단청기법으로 유명하고, 청아하고 은은한 소리로 천지간 가득 울려 퍼져 중생을 고통에서 구원해내는 범종에는 아름다운 문양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기록이 새겨져 있어 그 사적(史的)가치가 더욱 크다.
   이 종은 1622년 설미 · 덕인 두 대사가 흔적만 남아있는 이 절터에 법당과 승당을 복원하고, 1631년 인조 9년 종의 필요성을 느껴 화주를 시작하였는데, 그때 도원 스님이 화주승이었다. 그러나 도원스님은 청동 80근을 모으고는 그만 중도에 입적하고 말았다. 이에 당시 주지인 학잠(學岑) 스님의 추(推)를 받아 신관(信寬) 스님이 그 뜻을 이어 시주를 구하여 3년만인 1634년에 청동 300근을 모아 종을 부었다.
   현재 보광사에는 도형 주지 스님을 모시고 10여 명의 스님과 300여 명의 신도들이 절의 긴 전통을 이어 법회를 열고 기도를 하며 불도에 정진하고 있다.
   또, 여러 큰 스님이 주석하였고 근세 대덕 용성 큰스님의 견성처(見性處)로 유명한 도솔암, 비구니 스님들이 거처하고 있는 영묘암, 1943년에 건립된 수구암 등의 산내 암자에서도 스님들의 정진의 열이 드높다.
   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 오늘의 불교로 새 다짐하고 있었다.
   아직 매서운 꽃샘바람이 골짜기를 지나고 있는 3월 초순, 보광사 계곡 수풀 새로 언뜻 언뜻 녹지 않은 눈이 하얗게 깔려 있었다.
   지긋한 미소와 자비로운 눈길로 북녘 하늘을 지켜보고 계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배례하고, 주지 스님 전에 합장하며 다시 돌아 본 보광사 전경, 기둥은 갈라지고 단청도 퇴색했건만 거기에는 오히려 그윽한 평화가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