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난 여인을 도반으로 삼다

마음으로 떠나는 산사여행 / 내 마음의 능동태 순천 조계산 송광사

2008-06-13     관리자
▲ 송광사를 품에 안은 조계산은 모성(母性)의 산이다. 깊이 들수록 더 정결하면서도 아늑한 모성의 산길은 별격(別格)의 치장이 전혀 없다. 그 산길을 닮아서일까. 포행에 나선 두 스님의 둣모습도 참으로 맑고 정결하다.


봄의 조계산은 내 마음에서 언제나 능동태다. 누가 손짓해 부르지 않아도 송광사 뒤편, 천자암 가는 돌무지 길섶 따라 기찻길 옆 오막살이처럼 옹기종기 피어 있는 얼레지 꽃길은 해마다 나를 길 뜬 설움에 젖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네 삶은 모두 자작극인지도 모른다. 스스로 자신의 삶의 경계에 무수한 꽃을 피우고, 그것을 자신의 ‘운명’이라는 수사학적 용어로 감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얼레지의 꽃말은 ‘질투’이다. ‘바람난 여인’이라고도 한다. 삶의 치장이 없는 굴참나무와 서어나무·비목나무 아래서 부끄러움도 잊은 채 치맛자락을 함부로 걷어 올리고 연분홍 볼을 붉히고 선 그 모습은 영락없는 ‘바람난 여인’이고 그 여인이 불러일으키는 ‘질투’다.
봄 조계산은 송광사 늙은 벚꽃과 선암사 늙은 매화와 함께 목련·산수유·현호색·뱀딸기꽃·제비꽃 등으로 현란하게 치장하고 있다. 그러나 얼레지 꽃 앞에서는 이 현란한 꽃의 치장도 한갓 부수적이다. 조계산 ‘바람난 여인’은 ‘질투’가 아니라 맑은 고요와 아름다움을 상실한 중생심을 따뜻이 위무해주는 불보살의 화현이기 때문이다. ‘바람난 여인’ 앞에 마음의 합장을 올리고 산길을 걷다보면 막막하고 짓눌리고 고단한 삶과 세상이 뒷간처럼 해우되고 비워지기 때문이다.

【 절집의 큰 절집 송광사 】
송광사의 ‘바람난 여인’을 만나기 위해선 먼저 청량각(淸凉閣) 앞에 서야 한다. 돌 무지개다리 위에 서 있는 이 맑고 서늘한 누각은 사바의 남섬부주에서 수미산의 불국토로 가는 첫 관문이다. 이 누각을 통과하면 일단 사바세상의 고해(苦海)를 건너는 셈이다.
송광사 청량각은 이중적 장치를 하고 있다. 들어갈 때 보면 청량각이지만 나오면서 보면 극락교라는 문패를 달고 있기 때문이다. 맑을 청(淸)자, 서늘할 량(凉)자, 이곳에 들어설 땐 세상사 탁한 번뇌와 고통에 찌든 몸과 마음을 맑고 시원한 불국토로 바꿔 돌아갈 땐 극락 같은 불보살의 몸과 마음으로 돌아가 걸림 없는 삶을 누리라는 이중적 변주로 읽힌다.
그래서 그런지 청량각엔 세 마리의 용이 산다. 두 마리는 누각 천장에서 육중한 머리와 몸통을 함께 내밀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 마리는 돌 무지개다리 천장에서 머리통만 거꾸로 내민 채 계곡물을 지키고 있다. 그래서 누각의 용은 쉽게 만날 수 있지만 돌 무지개다리 천장의 용은 눈여겨보지 않으면 좀체 만날 수 없다.
예부터 용은 물을 통해 들어오는 사악한 기운과 무리를 정화하고 제압하는 호법신장의 상징이었다. 우리가 사는 남섬부주를 ‘고통의 바다[苦海]’라 할 때 청량각을 지키는 세 마리 용은 그 고해에 살면서 그 고해를 건너가는 중생들의 사악한 기운과 떼를 맑게 씻겨주고 벗겨주는 신장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 내릴 '하(下)'자, 말 '마(馬)'자, 신분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이곳에서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하마비는 '내가 무엇'이라는 일체의 상(相)을 내려놓고 부처를 뵈러 가라는 하심(下心)의 가르침을 말없이 주고 있다.
▲ 송광사의 3대 명물 중 하나인 천자암 쌍향수(雙香樹). 천연기념물 88호인 이 쌍향수는 보조국사와 담당국사가 중국에서 가지고 온 지팡이를 꽂아 둔 것이 이렇게 자랐으며, 수령 800년의 전설을 담고 있다.

부도 비림(碑林)을 지나 일주문에 이르기 전 왼쪽 길섶에 서 있는 하마비(下馬碑) 역시 불보살을 뵈러가는 오탁악세의 우리네 마음을 다시 한 번 돌아보라 말없이 일러준다. 내릴 하(下), 말 마(馬), 하마비란 이곳에서부터는 세속적인 신분과 지위고하·빈부귀천을 모두 내려놓고 누구든지 내려서 똑같이 걸어가라는 속뜻을 담고 있다. ‘내가 무엇’이라는 일체의 상(相)과 만심(慢心)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진정한 불보살을 만날 수 없다는 가르침이다.
승보종찰답게 송광사는 돌조차도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선(修禪)하고 있다. ‘대승선종 조계산 송광사’ ‘승보종찰 조계총림’이라는 두 개의 문패를 달고 있는 송광사 일주문 돌계단 양쪽 소맷부리를 보면 화두를 든 듯 두 마리의 돌사자가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참선하고 앉아 있는 것이다.
‘승보종찰 조계총림’. 글자 그대로 송광사는 절집 중의 절집이다. 송광사를 절집 중의 절집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 불교의 최대 종단인 조계종의 근본도량이자, 불(佛)·법(法)·승(僧) 삼보 가운데 승보사찰이기 때문이다. 양산 영축산 통도사, 합천 가야산 해인사, 순천 조계산 송광사가 이들 불·법·승 삼보사찰이다.
송광사가 승보종찰로 꼽힌 것은 고려시대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을 비롯한 16명의 국사를 배출하고, 그 영정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도사는 신라 때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석가모니 부처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모시고 있어 불보사찰이라 하고, 해인사는 고려 팔만대장경을 유네스코에 등재된 장경각에 보관하고 있어 법보사찰이라 한다.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설법전·수선사·국사전·삼일암·하사당·관음전·승보전·종고루·약사전·영산전·지장전·천왕문·우화각 등 50여 채의 전각으로 이루어진 송광사의 공간연출은 장엄하면서도 정갈하다. 우리나라 최고의 대찰임에도 불구하고 별격(別格)의 치장과 꾸밈의 흔적이 전혀 없다.

▲ 108삼매를 상징하는 108평 규모의 '아(亞)'자형 송광사 대웅보전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과거불인 연등불과 미래불인 미륵불이 모셔져 있다. 이제 갓 출가한 한 행자승이 깊이 허리 굽혀 출가의 원을 다잡고 있다.


【 뜨겁게 타오르는 신 정혜결사 결의문 】
송광사는 모성(母性)의 절집이다. 모성은 정결하면서도 아늑하다. 송광사의 이런 분위기는 보조국사 지눌(1158~1210)에 의해 단행된 정혜결사(定慧結社)의 뜨거운 종풍이 오늘날까지 면면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정혜결사는 고려 후기 불교계가 권력과 정치 집단에 지나치게 밀착함으로써 불교 본래의 순수성을 상실한 채 교·선종의 대립과 갈등으로 혼탁해지자 지눌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정풍 수행운동이다. 즉, 불교수행의 핵인 정과 혜, 선과 화엄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인식 아래 그 두 가지를 함께 닦아가자는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수행실천운동이었던 것이다.
송광사의 그런 장엄 정결한 종풍은 100여 명의 스님들이 참석해 벌이는 새벽예불과 저녁예불에서 맑고 숭엄한 연꽃으로 피어난다.
“… 일찍이 보조국사께서는 도는 닦지 아니하고 이익의 길에서 헤매이며 불법을 욕되게 하고 옷과 음식만 허비함을 탄식하며 정혜결사를 결심하셨다. … 이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실천 덕목을 제정하여 정혜결사의 취지를 잇고자 한다.

1. 삭발일마다 대참회를 실시하여 출가의미를 새롭게 한다.
2. 예불, 공양, 울력에 신심을 다하며 항상 그 의미를 관한다.
3. 포살에 꼭 참여하며, 청규에 따라 화합한다.
4. 간경을 생활화하고 행주좌와에 늘 깨어 있도록 한다.
5. 어른을 공경하며, 이웃을 배려해주는 따뜻한 마음으로 솔선수범한다.
6.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법에 의지하며, 정식(情識)에 의지하지 않고 지혜에 의지한다. ….”

▲ 송광사 주지 영조스님
108삼매를 상징하는 108평 규모의 ‘아(亞)’자형 대웅보전에서 예불 끝머리마다 100여 명의 스님이 한 목소리로 낭독하는 ‘신 정혜결사 결의문’ 속엔 우리나라 불교계를 쇄신하겠다는 맑고 결연한 의지가 들어 있다.
금년 들어 4년제 주지 소임을 중임하고 있는 영조 스님의 언(言)과 변(辯)과 강(講)과 계(誡)는 그러나 낮고 문학적이고 서민적이다. ‘조고각하(照顧脚下)’. 송광사 사계 중에서도 봄에 막 터져 나와 햇살을 받기 시작한 꽃잎과 나뭇잎이 너무나 맑고 정결해 좋다는 영조 스님은 그 한 마디 언과 변과 강과 계로 허영과 오탁악세에 찌든 내 중생심에 맑은 물을 부어준다. 그렇다. ‘내 발밑을 바로보지 못하고’ 어떻게 본래면목의 나를 되찾으랴.
‘바람난 여인’ 얼레지 꽃을 도반 삼아 조계산을 넘는 동안 ‘바람난 여인’은 어느덧 송광사 불보살의 화현이 되어 내 탁오한 마음속에서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