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오직 변화만이 영원하다

오아시스 실크로드를 가다 5 / 터키에서의 마지막 여정

2008-06-12     관리자
▲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 옛 영화는 온데간데 없고 133개의 석주 중 지금은 하나의 석주만이 남아 있다.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셀축’ 터미널에 내리자 오후의 햇살이 뜨겁게 내려쬐었다. 셀축은 세계 7대불가사의 유적지가 있으며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지인 ‘에페소스’로 유명하다. 셀축 박물관에 갔더니 점심시간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할 수 없이 박물관 앞의 노천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 박물관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때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몰려와서 그들의 전통 현악기인 ‘사즈’와 기타를 연주하였다. 그들은 처음에는 조금 낯설어했지만, 이방인을 위하여 몇 곡 연주해 주었다. 무슨 곡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음악에 대한 그들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셀축 박물관의 유물 중에는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아르테미스 여신상’으로 유명하다. 아르테미스 여신상은 겉으로는 스물네 개의 유방을 달고 있지만, 그 숫자는 상징적인 것에 불과할 뿐, 그녀는 수많은 가슴을 지녔을 것이다. 관세음보살이 천안(天眼)과 천수(千手)로 수많은 중생들의 고통을 알고 쓰다듬어 주듯이, 아르테미스 여신 또한 풍요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아낌없이 나누어 줄 것 같았다.
셀축 박물관에서 돌무시(미니버스)를 타고 조금만 가면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다. 지금은 약 20미터에 달하는 석주(石柱) 하나만 달랑 남아있지만, 기원전 580년 건축될 당시에는 아름드리 큰 기둥들 133개가 도열해 있었다고 한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은 기원전 356년에 한 정신병자의 방화로 소실된 것을 비롯하여, 일곱 번 건축되었다가 일곱 번 파괴되었다고 하니 신전의 운명치고는 참으로 고단하였다.
셀축은 또한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태어난 곳이기에 한번쯤 방문하고 싶었다. 인도의 ‘오쇼 라즈니쉬’는 헤라클레이토스를 ‘서양의 붓다’라고 칭하였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신전을 지키는 사제 가문의 출신이면서도, “신상에 기도를 드리는 것은 그 영웅과 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껍데기뿐인 집들과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고 비난하였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말하였으며, “삶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오직 변화만이 영원하다.”고 하였다. 그 당시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궤변만 늘어놓는다고 따돌림을 받았지만, 그야말로 우주의 진리를 정확하게 꿰뚫어 본 것이 아닌가 싶다.  

앙카라. 박물관에서. 만(卍). 자를. 보다. 이즈미르에서 밤차를 타고 지금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로 갔다. 터키는 기차보다는 버스노선이 발달하여 교통편 때문에 크게 고생하지는 않았다. 장거리 버스를 타면 식사와 차가 제공된다. 밤 10시에 출발한 버스는 아침 7시에 앙카라 터미널에 도착하였다. 터키의 수도인 만큼 참으로 번잡스러웠다. 어디를 먼저 갈까 생각하다가 택시를 타고 ‘아나톨리아 문명 박물관’으로 갔다. 그런데 택시기사는 수리중인 ‘민족지학 박물관’에 나를 내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약 6배 가까운 요금을 받아 챙겼다. 아침부터 힘이 쭉 빠졌다. 앙카라 또한 실크로드를 오고간 대상들의 길목이었기에 대상들을 위한 숙소인 ‘케르반사라이(Kervansaray)’가 군데군데 있다. 아나톨리아 박물관은 옥내시장과 케르반사라이를 겸하였던 건물이었는데, 아타투르크 대통령에 의해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 앙카라 박물관에서 조우한 '만(卍)' 자. 황금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 히타이트인들에게도 중요한 상징물인 것 같다.
▲ 경주 박물관에 진열된 유물과 유사한 오리모양 토기와 목걸이.
▲ 히타이트 유물인 지모신상

아나톨리아 박물관은 기원전 1,700년경 시작하여 약 500년간 존속하였던 히타이트제국의 유물 보고(寶庫)이다. 히타이트인들이 인류 최초로 철기를 사용하였다고 하지만, 토기에 관한 유물들이 훨씬 더 많이 발견되었다. 큰 바위에 얕은 양각으로 세밀하게 조각한 부조물들을 보면 석공기술도 뛰어나지만 새겨 넣은 문양들이 현대의 감각에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히타이트인들은 하늘의 신을 상징하는 황소를 숭배했으며, 풍우신에게 자주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황소 형상을 한 술잔, 쇄기 문자가 새겨진 점토판, 수많은 토기, 지모신상 등 이런 유물들 속에서 황금으로 된 ‘만(卍)’자를 발견하였다.
불교를 상징하는 만자가 어떤 경로로 이곳에 왔으며 히타이트인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궁금하였다. 만자는 인도의 힌두교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며, 태양의 생명력을 상징한다고도 하며,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전 세계에서 고대 행운의 상징이었다고도 한다. 히타이트인들이 황금으로 조각한 것을 보아 그들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상징물이었을 것 같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박물관을 중심으로 실크로드학을 연구한다는 비구니스님을 이스탄불에서 만났는데, “이 지구 전체가 하나의 실크로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스님의 말씀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 황금의 손으로 유명한 미다스왕의 무덤을 재현해 놓았다.

아나톨리아 문명박물관에는 프리기아 왕국의 미다스 왕 무덤을 모형으로 재현해 놓았는데 그 형태가 신라의 적석목곽묘와 유사하다고 한다. 만지는 것은 무엇이든 황금으로 변한다는 황금의 손과 당나귀로 유명한 미다스 왕은 전설 속의 인물이 아니라 실존 인물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라 왕족의 기원을 프리기아인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는데, 이곳 박물관에서 프리기아 왕국의 유물들을 통해 확인했다고나 할까. 금으로 된 팔찌나 목걸이, 그리고 오리 모양의 토기와 뿔잔 등이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경주 박물관에 전시된 것들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앙카라 박물관 앞에서 만난 터키 일가족.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였는데, 그들의 환한 미소가 너무 좋았다.


아름다운. 샤프란. 블루에. 취하다. 번잡한 앙카라에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옛 시골의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는 ‘샤프란 블루’로 가고 싶었다. 여행을 할 때는 철저한 계획 아래 움직이는 것도 좋지만 무계획이 편할 때도 있다. 다시 앙카라 터미널에서 ‘샤프란 블루’행 버스를 탔다. 길 양쪽으로 온통 눈밭이어서 바깥 풍경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샤프란 블루의 구시가지인 차르쉬는 잘 보존되어 있는 옛 전통가옥과 그 마을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하지만 차르쉬 마을은 결코 소란스럽지 않고 사람들 또한 순박하며 옛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어 여행객들이 며칠씩 푹 쉬었다 가는 곳이기도 하다.
다음 날 샤프란 블루 전체는 눈 속에 파묻혔다. 사방 어디에 눈을 주어도 오롯이 흰색만이 존재하는 그 순간 축복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반가워서 “규나이든!” 하고 아침인사를 건넸다.
샤프란 블루는 지중해와 흑해를 잇는 교역의 요충지였으며, 무역을 통해 많은 돈을 벌어들인 사람들은 호화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그들의 전통가옥은 1층은 돌로 쌓고 2층은 햇볕에 말린 벽돌과 짚을 섞어서 벽을 만들었는데, 2층이 주로 주거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영원한 것은 없다고 하더니 20세기에 들면서 무역량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차르쉬 마을도 쇠퇴해졌고, 이렇게 민가들만이 남게 되었다. 어느 민가의 초대를 받아 차이와 빵을 대접받기도 하였다. 그들의 소박한 삶과 순수함이 맘에 들어 해가 질 때까지 차르쉬에 머물렀다.
다음을 기약하면서 터키를 떠나왔다. 터키인들이 6.25전쟁 때 참전하였다는 그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친밀감을 느낄 수 있지만, 그보다는 한민족의 조상인 예맥족과 터키족의 조상인 흉노족이 모두 곰을 신성시하는 토템민족이라는 사실에 대해 나는 어떤 동질감마저 느꼈다.

▲ 흐드를륵 언덕에서 내려다 본 차르쉬 마을의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