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수(龍樹)의 운동 부정론

-중론 관거래품(觀去來品)을 중심으로-

2008-06-05     관리자
 

- 목 차 -

1. 중론(中論)의 취지

2. 거래(去來)의 의미

3. 반야경에서의 불래불거(不來不去)

4. 팔불게(八不偈)에서의 불래불거

5. 관거래품의 논리

   ①무상성(無常性)과 지각(知覺)

   ②모습과 실재

   ③주체와 작용의 불일불리(不一不異)


1. 중론의 취지

관거래품의 사상을 논의하기 전에 먼저 중론의 저술 동기와 그 취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500여년이 흐르면서 불교는 그 교리 해석의 차이로 말미암아 2부 18종으로 나뉘어져 방대한 아비달마(論部)교학의 난립상을 보이게 된다. 부처님 생존시에 행하신 교설은 철저한 대기설법(對機說法)으로 일관되어 있었다. 즉 응병여약(應病與藥)의 형태로 병에 따라 약을 주듯이 때에 따라 곳에 따라 상대방의 됨됨이에 맞추어 다양한 설법을 베푸셨던 것이다. 어떤 때는 자아가 있다(自我)고 하시고 어떤 때는 자아가 없다(無我)고 하시며, 때로는 영원하다(常)고 하시고, 때로는 삼업(三業)을 부지런히 행하여 모든 선법(善法)을 포섭하라고 하시고, 때로는 모든 법이 그 짓는 모습이 없다고 하셨다.

부처님은 어떤 도그마를 세우기 위해 설법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 목전의 중생을 해탈케 하는데 목적을 두셨기에 상대방의 속박된 양상에 맞추어 이렇게 다양한 교설을 베푸셨던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열반 후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런 부처님의 의도는 점차 망각하게 되고 부처님이 설하신 문자의 해석에만 경도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됐던 것이다. 예를 들어 5온, 12처, 18계설은 모두 무아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범주들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무아를 설명한다는 부처님의 의도는 소홀히 하게 되고, 5온 등의 각 구성요소의 정체가 무엇인지 탐구하는 데에 더 치중하게 되었다. 즉 불의(佛意)는 망각하고 문자만이 범람하는 주객전도의 상황이 야기되었다. 이에 용수보살이 분연히 일어나 불의(佛意)의 재현이라는 일대현실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중론(中論)은 용수보살의 가장 대표적인 저작으로 불교 내적으로는 사성제, 사연설(四緣說)을 위시하여 윤회와 열반 등 초기 불교의 여러 개념을 부정하고 있는데 자칫 그 취지를 오해하여 그 모든 것이 없음을 주장하는 것이 중론의 내용이라고 이해하게 되면 악취공(惡取空)에 떨어지고 만다. 이를 우려하여 대지도론에서 용수는 사연(四緣)을 예로 들어 자신의 진정한 의도를 설명한다. 즉 보살은 사연(四緣)으로부터 모든 법이 생하는 것을 관찰하지만 사연 자체가 실제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는 것이지 사연을 파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중론을 이해하고자 할 때도 용수가 아비달마적 불교에 대해 우려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용수의 의도는 도외시 하고 그 문자에 집착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2, 거래(去來)의 의미

하숙생이라는 유행가는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라는 구절로 시작해서 동일한 구절로 끝을 맺는다. 이것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통속적인 의문이지만 그 발상은 반야계 경전상에 등장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從何處來 至何處去)’는 구절과 맥을 같이 한다. 이렇게 이동 현상이 실재한다고 보고 그 시발점과 종착점을 찾으려는 사고방식은 비단 ‘인생’이라는 사실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물리적 운동은 물론이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온다’ ‘시간이 흘러간다’ ‘사후에 천상이나 지옥에 간다’는 식으로 계절이나 시간의 흐름을 위시하여 육취의 왕래, 심지어는 의식의 발생과 소멸까지 가고 온다는 분별의 틀에 맞추어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참된 진리에 몽매하게 만드는 실체론적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며 우리 중생은 그런 실체론적 사고방식의 굴레를 쓰고 생사윤회의 세계를 윤전하면서 살아간다.

용수보살은 중론 관거래품에서 그렇게 가고 오는 이동 현상에 대한 실체론적 분별을 엄밀한 논리에 의해 철저하게 논파하였다. 즉 거래(去來)가 있다고 보는 우리의 사고방식에 엄청난 오류가 있음을 밝힘으로써 운동의 공성(空性)을 논증하였다.


3. 반야경에서의 불래불거(不來不去)

거래를 부정하는 사상은 반야경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는 물음에 대해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다’라고 답을 내리는 것이 그것이다. 반야경에서는 그 까닭을 비유에 의해 설명한다. 예를 들어 보자.

「대품반야경」담무갈품을 보면 공후라는 악기의 소리를 예로 들어 모든 법이 무래무거(無來無去)임을 설명하고 있다. 공후는 기타모양으로 나무 막대로 그 줄을 두드려 소리를 내는 악기인 듯하다. 공후를 두드려 소리를 낼 때 우리는 흔히 그 줄에서 소리가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엄밀히 보면 그 소리는 여러 가지 인연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즉 공후의 몸통, 목체, 줄, 나무, 막대, 사람의 두들김 등이 그 소리가 있게끔 한 인연들이다. 그 중 어느 하나에서 소리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소리가 사라질 때도 그 중 어느한 곳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또 아지랑이를 물로 착각한 경우를 예로 들어 부처님의 법신이 무래무거임을 설명한다. 갈증에 시달리던 사람이 먼 곳에서 아지랑이가 움찔거리는 것을 보고 그것을 물로 착각하여 쫓아가 물을 구하려고 하는 경우에 그 물이 어디서 흘러온 것도 아니고 어디로 흘러가는 것도 아니듯이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무래무거라는 것이다.

불래불거 또는 무래무거라는 종지는 담무갈품 뿐만 아니라 함수품(含受品)에도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일체법이 무래무거임을 설명하면서 그 일체법으로서 5온을 위시하여 무위법에 이르기까지 총 303가지 현상을 열거하고 있다. 즉 부처님의 법신만 무래무거인 것이 아니라 모든 현상이 무래무거라는 것이다. 용수는 이에 대해 주석하면서 중론 관거래품의 게송을 축약하여 인용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반야경과 중론 관거래품에서의 불래불거라는 종거가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4. 팔불게서의 불래불거

중론 서두에서 용수는 불타 정각의 핵심을 팔불게(八不偈)로 정리하였다. 즉 불생불멸, 불상불단, 불일불이, 불래불출(不生不滅, 不常不斷, 不一不異, 不來不出)이 그것이다. 여기서 불래불출은 불래불거와 같은 의미이다. 관거래품은 팔불게 이후 전개되는 총 27품의 중론 중 제 2품에 위치하는데 관거래품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팔불게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팔불게는 네 쌍의 댓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각 쌍은 서로 독립된 의미가 아니라 공성(空性)에 대한 네가지 측면에서의 조망이라고 볼 수 있다.

청목의 주석에서는 이를 씨앗과 그것이 발아한 싹의 관계로 설명한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불생(不生)-싹이 씨앗과 관계없이 새롭게 생하는 것이 아니다. 불멸(不滅)-싹이 생길 때 씨앗이 완존히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불상(不常)-씨앗이 싹으로 항상되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불단(不斷)-싹이 씨앗과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불일(不一)-씨앗과 싹이 같은 것이 아니다. 불이(不二)-씨앗과 싹이 다른 것이 아니다. 불래(不來)-싹이 씨앗 아닌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불거(不去)-씨앗이 싹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팔불중도를설명하면서 씨앗과 싹의 관계를 예로 들었지만 인(因)과 과(果), 능(能)과 소(所), 체(體)와 용(用)이 모두 씨앗과 싹처럼 팔불중도적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월칭은 이런 쌍으로 부분과 전체, 보는 자와 보이는 것, 모습과 실재, 운동과 운동체 등을 열거하고 있다. 그러나 길장의 설명처럼 이 모든 쌍은 인(因)과 과(果)라는 용어에 포섭시킬 수 있다. 즉 팔불게는 시간적이거나 공간적인 인과 관계의 팔불중도적 공성을 요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팔불게 중 불래불거는 무슨 의미일까? ‘주체의 이동’이라는 측면에서 공성(空性)을 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월칭의 주석이나 일부 현대 학자들에 의하면 관거래품이 불래불거를 설명하기 위해 씌여졌다고 한다. 그러나 앞으로 고찰하겠지만 관거래품에서는 ‘이동현상’을 논파하면서 운동체와 운동의 불일불이적 측면도 논의하고 있다. 따라서 팔불게와 관거래품은 상호 포섭관계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5. 관거래품의 논리

중론내 다른 품에서 관거래품이 자주 거론되는 것으로 보아 관거래품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중론 이해의 관건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거래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물리적 운동 뿐만 아니라 의식의 발생, 시간이나 계절의 흐름, 육취의 왕래까지 모두 거래라는 개념에 포함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관거래품의 논리는 그 모든 이동현상의 공성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구체적으로 그 중에서 물리적 운동에 대입하여 그 논리를 분석해 보기로 하자.


   ①무상성(無常性)과 지각(知覺)

살아있는 우리 중생들은 분명히 우리 눈앞에서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을 지각하고 있고, 우리의 신체 또한 굽히고 일어나고 뻗치고 움츠리는 운동을 한다. 그러나 엄밀히 분석을 해보면 그런 움직임이 시간과 공간 속에 실재할 만한 여백이 없다. 이 세상 모든 사물은 한순간의 머무름도 없이 시시각각 변해가기 때문이다. 이미 흘러가버린 과거는 우리 목전에 나타난 적이 없다. 또 아직 흘러가지 않은 미래 또한 우리 목전에 나타날 수 없다. 따라서 과거와 미래가 실재한다고 말 할 수 없다. 이를 관거래품 제1게 전반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미 가버린 것은 가고 있지 않다. 아직 가지 않은 것도 가고 있지 않다’ 그러면 항상 현재만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라는 것이 우리의 지각에 포착되려면 단 한순간이라도 머물러 있어야 하는데 제행무상이라는 법인(法印)의 토대위에서 부단히 흘러가는 시간이라서 현재 역시 존재할 수 없다.

또 과거와 미래가 실재 있는 적은 없지만 우리의 관념속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도 현재만은 도저히 있을만한 틈이 없다. 왜냐하면 과거와 미래의 틈사이에 낀 현재가 어느 길이를 갖는 찰나라고 한다면 그 작은 길이의 현재 찰나 역시 다시 과거, 현재, 미래로 세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한히 세분해 나아가면 현재의 크기는 무한히 ‘0’에 수렴하게 되어 그 크기가 없어지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지금 앞으로 걸어가고 있을때 매 순간 발로 밟는 장소가 현재라고 할 때 그 장소에서 발의 앞쪽 반은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이고 뒷꿈치쪽 반은 아직 지나가지 않은 미래가 되어 현재라고 할만한 틈은 없다. 그것을 더 세분하여 발의 구성원소에 적용시켜도 마찬가지다. 각 구성 원소의 앞쪽 반은 과거이고 뒤쪽 반은 미래에 속하게 되니 아무리 세분하여도 현재라는 것이 있을 만한 여백이 없다. 이런 논리는 「금강경」에서는 과거심 불가득(過去心 不可得), 현재심 불가득(現在心 不可得), 미래심 불가득_(未來心 不可得)이라는 구절에 대한 설명이라고 볼 수 있다 (「금강경」의 산스크리트본에서는 과거심-미래심-현재심으로 관거래품 제1게와 동일한 순서로 그 불가득을 얘기한다). 비단 지나가는 발걸음이나 움직이는 운동체 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현상은 제1게의 논리에 대입하여 그 공성을 논증할 수 있다. 소리에 적용하면 이미 들린 것은 지금 들리지 않고 아직 들리지 않은것도 지금 들리지 않으며 그 양자를 떠나서 제3의 것은 있을 수 없다는식의 논리가 될 것이다.

이와 유사한 논리로 운동의 존재를 부정하는 서양철학자로서 고대희랍의 제논을 들 수 있다. 제논은 날아가는 화살은 날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위시하여 시공의 분할 가능성에 의거해서 4가지 예를 들어 운동의 불가능함을 논증했다. 그러나 제논의 논리는 정지된 가상의 시공속에서 단지 물리적 운동만을 부정한 것인 반면, 관거래품 제1게의 논리는 제행무상이라는 토대 위에서 비단 물리적 운동 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현상의 공성을 논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②모습과 실재

서양철학자 헤겔이나 베르그송등은 제논의 역리의 문제점을 해결하면서 운동의 존재 영역을 시간과 공간이 아닌 우리의 관념, 즉 정신의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즉 우리가 매 순간 느끼는 움직임의 느낌은 시공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의식 내에 있다는 것이다. 이를 현대철학자 블랙의 논리에 의해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매 순간 느끼는 움직임은 수학적으로 볼 때 속도라고 말할 수 있다. 속도는 운동체가 지나간 거리를 그 때 걸린 시간으로 나눈 값인데 우리가 느끼는 운동감, 즉 속도는 시간(이동 시간)이나 공간(이동 거리)과는 다른 영역에 있다. 또 만약 매 순간 순간의 속도를 구하려면 그 순간 이동한 거리를 미분하면 된다. 즉 우리는 매 순간 우리 인식의 미분 능력에 의해 속도감을 지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 베그르송, 블랙의 이런 식의 해결은 결국 움직임이라는 것이 우리의 의식 속에 ‘있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라 실체론적 사고방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용수는 이와 달리 제2게~제5게에 걸쳐 그렇게 지각된 움직임이 실재의 움직임이라고 볼 때 야기되는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본체(실재의 움직임)와 현상(지각된 움직임)이 불일불이 하다는 논리에 의해 이를 증명한다. 즉 지각된 움직임이 실재의 움직임이라고 보면 움직임이 지각과 실재의 양차원에 공존하게 되어 두개의 움직임이 있는 꽃이되니 모순이라고 한다. 「금강경」에서의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구절의 논증이라고 볼 수 있다.


   ③주체와 작용의 불일불이

관거래품 게송의 반 정도가 운동체와 운동의 불일불이성에 기반을 둔 논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서양철학적 운동비판론에서는 취급치 않았던 방향이며 이 논리가 관거래품 논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관거래품에서 얘기하는 ‘가는 놈이 간다’라는 말은 ‘운동체가 운동한다’라는 말로 바꿔쓸 수 있는데 이것은 한 가지 현상을 보고 분별을 일으켜 그 주체와 작용을 나누어서 생각하기에 야기되는 오류이다. 예를 들어 ‘얼음이 언다’라는 말을 쓸 경우 얼음은 이미 얼어있는 것인데 그것이 다시 언다고 하게 되니 오류인 것과 같은 논리이다. ‘꽃이 핀다’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꽃’하면 벌써 피어 있는 것인데 그것이 다시 ‘핀다’고 하게 되니 피는 것이 ‘꽃’과 ‘핀다’에 두 개가 있게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그런 오류를 채 느끼지 못하고 아무 의심없이 살아가고 있다. ‘내가 살아간다’고 할 경우도 ‘나’라는 아상(我相)은 살아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데 그것이 다시 ‘살아간다’고 하니 잘못이다. 이런 분별은 나와 나의 행위를 분열시키는 실존적 자기 소외 현상을 초래한다. 용수는 관거래품을 통해 이런 체용(體用)분열의 오류를 시정해 주는 것이다.


6. 결어

관거래품에 나타난 용수의 운동부정의 논리는 철저하게 인식비판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그 사상적 연원은 반야(般若) 공(空)사상에 두고 있다. 반야 공사상은 허무주의적 단멸론도 아니며 지적 만족을 위한 희론도 아니고 실생활과 동떨어진 형이상학도 아니다. 지혜와 자비에 토대를 둔 육바라밀 실천행의 한 단면이다. 관거래품의 논리는 비단 운동뿐만 아니라 모든 행(行)에 적용될 수 있으며 그 논리에 의해 우리 인간의 분별적 사고방식을 세척함으로써 ‘내가(體) 무엇을(相) 한다(用)’는 식의 분별을 내지 않는 진정한 대승 보살행의 지침이 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