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체험의 건강학

현대인의 정신건강/불교의 건강원리

2008-06-04     관리자
 
수행을 많이 쌓은 스님들이 대체로 성품이 유유(悠悠)하고 유순한 것은 타고난 성품에도 일부 기인하겠지만 이미지체험 같은 명상체험이 축적된 결과의 측면이 많다.
이미지체험을 하기 위한 명상을 할 때에도 좌선명상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혼침’이나 ‘산란’이 찾아오는 일이 있다. ‘혼침’은 이미지 훈련이나 명상중에 잠이 들어 버리거나 우울한 기분에 빠지는 상태를 말한다. 말하자면 마음의 움직임이 내부에서 솟아 올라오는 힘에 사로잡혀 침울해지는 상태이다. 명상중에는 마음이 착 가라앉고 조용해야 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조용한 가운데에서도 정신에 또렷함이 있고 팽팽한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산란’은 반대로 끊임없이 외부의 자극에 신경이 쓰이고 잡념이 일어나는 상태이다.
만약 혼침상태에 빠질 것 같은 예감이 들면 자리에서 일어나 부근을 잠시 걷도록 하며 기분이 다시 맑아지면 자리에 앉아서 이미지 체험훈련을 계속하도록 한다. 좌선에서는 좌선중에 잠시 일어나서 걷다가 다시 좌선을 하는데 그렇게 잠시 걷는 것을 경행(徑行)이라고 한다는 것은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미지체험 훈련중에도 잠시 일어나서 걸을 때에는 경행(徑行)의 규칙에 따라서 하면 된다. 경행중에는 되도록이면 몸을 요동시키지 않도록 하면서 조용 조용하게 걷는데 그것은 경행중에도 마음의 동요가 크게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고 뇌파의 변동이 알파파에서 베타파로 최소화 되도록 하려는 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다시 마음의 명상상태로 쉽게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니까.
여기에서 좌선명상과 이미지체험 명상의 차이에 관해 잠시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좌선의 경우에는 대체로 궁극적인 깨달음의 경지를 말할 뿐이고 수행도중에서 체험하는 체험내용은 모두 거절한다는 태도를 취하지만, 밀교 도교(道敎)등의 이미지체험의 명상에서는 수행과정에서 나타나는 온갖 경험에 관해 논의하는 한편, 병리적인 경험은 물리치면서 바로 진보로 나아가도록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중국의 당나라 때의 불교와 도교의 명상법, 밀교의 명상법에서는 이미지체험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했던 것에 비하여 송(宋)대 이후에 활발하게 되었던 좌선에서는 이른 바 ‘무념무상(無念無想)’을 목표로 삼으면서 이미지체험의 가치는 부정하려는 경향이 강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심리학의 견지에서 본다면 이미지 체험을 다루는 편이 ‘무념무상’을 다루는 것보다는 가시적(可視的)이고 구체적이어서 연구의 실마리를 얻기가 쉽다는 면이 있다. 이것은 이미지명상과 좌선명상의 우열을 따지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니 독자들께서는 오해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객관적 과학주의의 태도와 계몽적 합리주의의 세례를 받은 우리들 현대인은 현실세계를 초월하는 신불(神佛)이나 제령(諸靈), 만다라의 이미지체험이 가져다 주는 감동과 외경과 환의의 심리를 이제는 이해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고대의 종교적 선각자들에게 있어서 이미지체험의 세계는 실재의 질서, 현실이상의 반응과 힘을 가진 존재의 질서였다. 그들 이미지체험의 세계에는 상상적인 것과 원상적(原像的)인 것의 두가지가 있다고 볼 수가 있다. 심리학자 융은 그와 같은 초월적인 질서에 근거를 갖는 이미지를 개인적 무의식의 영역을 넘어선 집합적 무의식의 원형(元型)이라고 명명한 일이 있다. 그런 원형의 이미지가 말하자면 원상적(原像的)인 이미지이다.
원상적 이미지는 우리의 의식에 일상적으로 경험되는 외계의 사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혼’의 내부에서 전개되어 오는 보이지 않는 질서의 세계이며 정신적 우주의 패러다임(모형)이다. 고대의 종교적 선각자들의 체험세계를 공감적으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와 같은 원상적 이미지의 체험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와 같은 이미지체험을 거듭하는 것은 우리에게 우주속에서의 질서감과 중심감(中心感)을 가져다 주고 존재의 영원성 같은 것을 실감시켜 주기 때문에 우리의 정신적 건강과 행복에도 많은 보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우리가 불교를 역사적으로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이미지체험은 불가결한 요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고대인의 사상이라는 것은 원래 그들의 그 내부에서 살고 있던 정신세계, 심리상황의 산물이니 만큼 지적 차원으로 까지 추상화된 사상, 즉 경전 같은 서책만을 가지고 논하다가는 생명이 없는 시든 꽃을 분석하고 꽃의 아름다움을 이해한 척하는 것과 같은 결과가 될 것이다.
선종(禪宗)에서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강조하는 의미도 바로 그와 같은 체험을 중시하자는 말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양(梁)무제가 달마선사에게 “성스러운 진리(聖諦) 가운데에서 으뜸되는 것은 무엇인가요?” 하고 물었을 때에 달마선사가 “휑뎅그렁하게 텅 비었을 뿐 성스러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廓然無聖)라고 대답한 것이 바로 좌선(坐禪)중의 원상적(原像的) 이미지체험의 세계를 말한 것이라고 나는 보고 있는 것이다. 아무런 대립개념이 없는 ‘무(無)’ ‘공(空)’의 이미지적 체험세계와 노자(老子)의 ‘도(道)의 이미지’ ‘상제지선(象帝之先)의 이미지’ ‘무상지상(無狀之狀)의 이미지’ ‘무물지상(無物之狀)의 이미지’의 체험세계도 모두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원래 인도문화의 전통을 잇는 불교와 힌두교의 흐름에서는 사상적 표현과 예술적 표현을 결부시키는 매개항(媒介項)으로서 명상에서의 이미지체험이 전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예를 들면 교의학(敎義學)에서 말하는 ‘공(空)’이라든가 ‘열반(涅槃)’ 같은 개념에 대응하는 예술적 표현이 그림이나 조각으로 표현되는 숭고한 여래(如來)나 보살의 모습인 것이다. 또 ‘번뇌’나 ‘업고(業苦)’의 개념을 구체적 이미지를 가지고 표현한 것이 아귀나 축생이나 아수라 따위의 모습이다. 그리고 부동명왕(不動明王)은 수행자의 자세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모습이다. 불교의 역사를 종교사적 측면과 예술사적 측면에서 아울러서 살펴보면 이와 같은 사상적 표현과 예술적 표현의 공동의 모태인 수행과 명상의 이미지체험이 경시되는 사태를 맞게된 때에 불교의 사상적 측면과 예술적 측면도 함께 쇠퇴되었던 것을 우리는 알 수 있게된다. 그러나 반대로 수행과 명상이 활발하던 때에는 불꽃 튀는 사상적 전개가 있었고 많은 종교적 예술작품들이 쏟아져 나왔었다. 이런점은 중국의 선종사(禪宗史)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출가자에게 뿐만 아니라 재가자에게도 수행과 명상체험을 장려하는 시민운동 정신적 생활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자는 운동도 되는 것이다.
선(禪)의 언행이나 밀교가 이해하기 어려운 근본원인은 그 사상을 표현할 어구의 어려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론적 교의나 언행의 배경에 있는 심리적 체험내용에 있다. 서구의 계몽적 합리주의와 실증주의는 인간의 정신생활에서 초월적 측면을 배제시키는 데에 주도적 역할을 해왔다. 그래서 근대화 이후의 우리들 동양인은 비과학적, 미신적이라는 이유로 조상들이 살아온 정신생활의 많은 영역을 내버려야 했었다.
이런 태도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된 이제는 우리는 고대 명상인의 심리세계의 내부에 공감적으로 비집고 들어가서 그들이 감득하고 있던 정신적 우주상의 패러다임을 복원해보는 노력을 하는 가운데에서 우리의 정신생활의 내용을 다시 풍부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