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닦는 길

살아있는 명법문

2008-06-01     관리자

● 고려불교를 일으키시고 우리 한국불교사상사의 큰스님이신 보조국사 지눌 스님의 많은 저술 중에서 ‘마음 닦는 길’이라는 뜻으로 제목을 붙인 수심결(修心訣)이 있습니다. 분량이 많지는 않지만 불교의 핵심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수심결에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이야기가 들어있습니다. 익히 들어오고 알고 있는 것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나나니’라는 곤충이 있습니다. 나나니는 알을 낳지 않는답니다. 풀숲에 가서 남이 낳은 알을 물어다가 기둥이나 밀짚 같은 틈새에다 넣어놓고는, 입구를 막아놓고 날개를 펄럭펄럭 하면서 계속하여 ‘날 닮아라, 날 닮아라, …’ 하면서 다라니를 외는데, 그러면 신기하게도 며칠 후에 그 알에서 자기를 닮은 것이 나온답니다.
이것이 나나니 교육인데, 우리 절집 교육도 나나니 교육입니다. 매일 했던 것을 또 하게 되는 반복의 연속입니다. 정말로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 해서 한 번 근본의 영원한 생명에 귀의하면 되는데, 중생업이란 것이 잠재되었다가 튀어나오고 또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해나가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부처를 닮아가고, 영원한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마음 닦는 방법에 대해서 많이 듣고 공부도 하셨겠지만, 오늘 또 나나니 교육처럼 한 번 더 해보겠습니다. 그럼 여러분과 함께 수심결의 서두 부분을 읽으며 마음 닦는 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부처를 찾아라 】
“삼계를 윤회하는 뜨거운 번뇌의 고통은 마치 불난 집과 같은 것이다. 그런 고통을 어찌 참으면서 그대로 머물러 받으려고 하는가? 그런 윤회를 벗어나려면 부처를 찾는 길밖엔 없으니, 부처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부처는 곧 이 마음이다. 이 마음을 어찌 멀리서 찾으려 하는가? 이 몸을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중생세계는 일체가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세상 사는 재미가 좋다고 합니다. 돈을 솔솔 버는 재미, 서로 사랑하는 재미, 진급하는 재미 등 좋은 것도 많은데 왜 고통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통은 즐거움까지도 모두 포함합니다.
왜 겨울이 춥습니까? 여름이 따뜻한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춥습니다. 영하 60도에서 피는 꽃도 있고, 용광로 600도에서 살아가는 바이러스도 있답니다. 상대적인 관계 때문에 우리가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고통의 반대는 즐거움인데, 그 고락의 씨앗까지 다 포함하여 일체가 고통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온도 차이가 없는 곳에서는 춥고 더움을 못 느끼지만 조금이라도 높고 낮음의 차이가 생기면 그때부터 분별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거기서부터 고통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상대적인 모든 것을 다 아울러서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그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은 추운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이 언젠가는 좋은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봄이 오더라도 언젠가는 봄꽃이 다 흩어지고, 낙엽이 지며, 다시 찬바람이 몰아치는 계절이 옵니다. 그런 가운데도 다시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그것이 윤회입니다. 이렇게 윤회하는 것이 끝이 없습니다.
그러한 끊임없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부처를 찾는 길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부처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부처는 곧 이 마음인데 이 마음을 어찌 멀리서 찾으려 하는가? 이 몸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고, 이렇듯 수심결은 그 서두를 가장 잘 압축시켜 놓고 있습니다. 다음 구절부터는 마음을 찾아가는 방법을 서술해가고 있습니다.

【 진리를 밖에서 찾지 말라 】
“이 몸은 거짓이면서 무상한 것이니 생겨났다 없어졌다 하지만, 참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끊어지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육체는 죽어 흩어지면 다시 본래요소인 불기운 바람기운 등으로 환원되어 버리지만, 한 물건[一物]은 항상 신령스러워 하늘을 덮고 땅을 덮는다’고 하였다. 슬프다! 요즘 사람들은 길을 잃은 지 오래 되어 자기의 마음이 참 부처인 줄 모르고 자기의 성품이 참 진리인 줄 몰라서, 진리를 멀리 성인들에게서나 구하고 부처를 찾으면서도 자기의 마음을 살펴보지 않는다.”
우리가 태어날 때 어디서 왔으며 죽을 때 어디로 갑니까? 태어나는 것은 한 조각 뜬구름이 생겨나는 것이요, 죽는다는 것은 한 조각 뜬구름이 사라져 가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이 뜬구름은 실체가 없듯이, 우리가 나고 죽으며 가고 오는 것도 그와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뜬구름은 인연 따라 생겼다 사라졌다 하지만 저 푸른 하늘은 영원하듯이, 우리들 본래의 참 성품도 그와 같이 영원한 것이니 그 영원한 본래의 빛, 영원한 진리, 영원한 생명을 찾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성품 밖에 진리가 있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소견에 굳게 집착하여 불도를 구하는 사람은 아무리 오랜 세월 동안 몸을 불사르고 팔을 태우며, 뼈를 두드려 골수를 내고, 피를 짜내어 경전을 쓰며, 눕지 않고 언제나 앉아 좌선하면서 하루에 아침 한 끼만 먹으며, 나아가 모든 대장경을 줄줄 다 읽고, 갖가지 고행을 모두 닦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모래를 삶아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수고로움만 더할 뿐 아무 이익이 없는 것이다.”
‘진리를 밖에서 찾지 말라. 밖에서 들어온 보배는 진짜 보배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 집안에 있는 그 보배, 즉 내 몸 속에 감추어진 마니보배가 진짜 보배입니다. 그래서 밖을 향해서 찾는 것은 모두 헛일이라는 내용입니다.

【 자기 근본의 실체를 찾아서 】
“다만 자기의 마음을 알면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진리를 구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체 중생을 두루 살펴보니 모두 여래의 지혜와 덕상(德相)을 갖추고 있다’고 하셨으며, 또 ‘일체중생의 가지가지 허망된 생각이 모두 여래의 원만히 깨달은 묘한 마음에서 일어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여의고서 부처를 이룰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바라건대 모든 수행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밖에서 구하지 말라. 마음의 성품은 깨끗하여 본래부터 스스로 원만한 것이니 다만 망녕된 생각만 여의면 곧 그대로 부처이다.”
부처님이 태어나시면서 동서남북으로 사방을 걸으시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말씀하시고,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을 이루시고는 “내가 일체중생을 다 두루 살펴보니 나와 똑같은 지혜와 덕성을 갖추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초전법륜에서는 사성제와 8정도를 설하시고, 열반에 드실 때는 “자등명 법등명, 자기의 등을 밝히고 진리의 등을 밝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말씀이 알고 보면 모두 똑같은 내용의 말씀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각각의 방편들은 모두 중생의 마음자리를 깨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하는 갖가지 방편이 있는데, 경을 읽는 것이나 염불을 하는 것, 주력(呪力), 육바라밀수행, 또는 사경을 하는 이런 모든 것은 알고 보면 모두 한곳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은 영원한 빛, 진리, 생명으로 돌아간다는 그것은, 자기 근본의 실체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불교가 복잡하고 어렵다고들 하지만, 알고 보면 불교수행만큼 간단한 것이 없어요. 팔만대장경, 수천수만 방편들도 다 알고 보면 이 한마음 ‘여래의 진실한 뜻’을 깨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여러분께서는 오늘이 휴일날인데도 이렇게 아침 일찍 법회에 나오시고, 저도 여러분께 부처님 경전 말씀과 보조 국사 같은 대 선지식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자체가 저에게는 큰 공부이며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여러분께 한 말씀드리기 위해서 제 스스로를 한번 돌아보게 되니, 여러분께 한량없는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