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화왕산에서 출구를 찾다

마음으로 떠나는 산사여행 - 허공의 불타, 창녕 화왕산 관룡사

2008-06-01     관리자


▲ 허공의 불타인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의 육계 위에 까치 부처 한 마리가 앉아 있다. 이 까치부처님도 지금 그리운 봄의 출구를 찾고 있으리라.
마음이 양명한 사람에게 봄은 오히려 출구가 없다. 보리밭 사이 길로 환하게 물결쳐오는 불의 그리움과 연모 때문이다. 출구 없는 연두의 계절, 가곡 ‘보리밭’은 그 불의 그리움과 연모의 숨결을 가장 은유적으로 표현한 수사학적 노래다.

    ‘보리밭 사이 길로 걸어가면 /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 돌아보면 아무도 뵈지 않고 /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양명한 봄의 그리움과 연모의 정을 이처럼 상징적으로 잘 묘사한 노래도 드물다. 그래서 가곡 ‘보리밭’은 선남선녀들의 마음속에서 ‘봄처녀’의 설렘을 압도하고, ‘목련꽃 그늘 아래서’의 애달픔을 뛰어넘는다. 봄이 오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남몰래 정신병원을 찾는 것도 바로 봄이 지닌 그런 멜랑콜리한 정조와 양명한 불의 이중적 속성 때문이다. 반생명의 관능을 자극하며 대책 없이 타오르는 그리움과 연모의 불길로 봄앓이를 하는 선남선녀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봄 화왕산(火旺山)은 더욱 양명한 불이다. 불 ‘火’자, 왕성할 ‘旺’자, 산 이름에서부터 대책 없는 봄의 불길로 환하다. 양명한 그 산불은 곧 화왕산 억새밭으로 번져 금빛 게으른 황소의 싯누런 허벅지로 사람들의 마음을 달군다. 하지만 그 불은 뜨겁지만, 천박하지 않다.

【 약사전 석조약사여래 앞에서 허영과 허세의 옷을 벗다 】
관룡사(觀龍寺)는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화왕산 남서쪽 기슭에 있다. 창녕읍에서 자동차로 20여 분 거리다. 화왕산 남서쪽 기슭은 사림(寺林)의 숲이다. 관룡사 외에도 삼성암, 청련사, 법성사, 충효사, 중생사, 극락암, 구봉사 등의 사찰이 즐비하게 터를 잡고 있다. 빽빽이 들어선 이 사림의 숲이 어쩌면 화왕산의 불의 광기를 수미산 너럭바위처럼 꽉 다잡아 주고 있을 터이다.
그 가운데서도 관룡사는 화왕산의 젖통을 풍만하게 길러 주는 보물과 문화재의 창고다. 우선 보물만 해도 약사전(보물 제146호), 약사전 석조약사여래불좌상(보물 제519호), 대웅전(보물 제212호), 용선대(龍船臺)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295호) 등 네 점이 있다. 그리고 약사전 삼층석탑(경남유형문화재 제11호)을 비롯해, 관룡사의 일주문격인 석장승(경남민속자료 제6호), 원음각(경남문화재자료 제140호), 부도(경남문화재자료 제19호) 등 다섯 점의 문화재가 있다.

▲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칠성각과 응진전, 산령각, 명부전이 배치되어 있고 왼쪽 앞쪽으로 원음각과 범종루, 오른쪽 앞쪽으로 약사전과 삼층석탑이 배치되어 있는 관룡사는 조금 산만하면서도 맑고 아기자기한 동선을 갖고 있다.

양명한 불의 마음으로 관룡사를 찾는 이들이 가장 먼저 들르는 곳은 약사전이다. 통일신라 이후 그 숱한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약사전은 유일하게 한 번도 잿더미가 되지 않은 관룡사의 보물 중 보물이다. 약사전의 영험함이 그 험난했던 근·현대사의 모든 재앙을 순일하게 피해가게 했다고 한다. 관룡사를 찾는 선남선녀들이 가장 먼저 약사전에 들러 치병(治病)기도를 하는 것도 바로 약사전의 그런 영험함을 믿기 때문이다.
약사전 석조약사여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두 손바닥으로 마왕 파순의 항복을 받고 있다. 그 때문에 약사전 석조약사여래의 두 손바닥은 치병기도를 하는 중생들의 간절한 바람으로 시커멓게 손때가 묻어 있다. 나도 석조약사여래 앞에 양명한 불의 마음을 조아린다. 그리고 반세기 동안 내 삶을 조롱했던 온갖 허영과 허세의 옷을 벗고 약사여래의 두 손바닥에 백전백패한 내 삶의 손바닥을 원단 그대로 올려놓는다. 따스한 느낌이 전해져 온다. 목젖이 메이고 마음의 근육이 꿈틀거린다.

▲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 앞에서 108배를 하고 있는 저 여인은 어떤 봄앓이를 안고 이곳에 올랐을까. 쉴 새 없이 절하며 봄의 출구를 찾는 여인에게 불타는 묵연히 귀 기울이고 있다.

이 순간 석조약사여래는 돌로 만든 인위의 부처가 아니라 중생의 아픈 피와 살로 빚은 인간의 부처다. 또한 이 순간 석조약사여래는 돌로 만든 한갓 돌부처가 아니라 중생의 따스한 피와 온기가 살아 도는 가장 인간적인 부처다. 매·난·국·죽. 약사전 벽면에 그려진 천년의 사군자 또한 이곳에서 기도하는 중생들의 연두 빛 여린 정신에 맑고 차가운 출항의 샘물을 부어 준다. 오랜 세월의 부침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온고의 정신과 고결한 군자의 숨결로 중생들의 마른 물관부에 싱싱한 생의 고로쇠 수액을 가득 채워 주는 것이다.
약사전 석조약사여래좌상과 함께 중생들의 손때가 가장 많이 탄 곳은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이다. 해발 680m, 통일신라 때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허공의 불타로 빚은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은 남산타워처럼 우람하다. 그러나 조금도 권위적이지 않다. 위압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너무나 평민적이어서 생의 출구가 닫힌 중생들이 마음 놓고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출구를 찾고 있다.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 역시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마왕 파순의 항복을 받아내는 그 손바닥으로 용선대 석조석가여래 또한 연두처럼 여리고 양명한 중생들의 아픔과 염원을 한 올 한 올 비단처럼 풀어주고 있는 것이다.
붐비는 선남선녀들 속에서 문득 빨간 등산 재킷을 입은 한 여인이 왼손에 108염주를 움켜쥐고 허공의 불타를 향해 쉼 없이 108배를 한다. 열심히 절을 하는 저 빨간 재킷 여인의 닫혀 있는 속마음이 궁금하다. 저 여인도 오늘 나처럼 대책 없는 생의 출구를 찾아 여기에 오른 것일까? 그러고 보면 오늘 여기에 이르기까지 내 삶의 여정은 참으로 불가해한 신비였다. 네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네가 있는 입아아입(入我我入)의 중중무진한 삶 속에서 나는 수많은 살생과 투도(偸盜)와 망어와 사음과 음주를 했다. 오늘 내 뼛속의 삶이 백전백패한 채 불치의 병으로 허덕이고 있는 것도 어쩜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연기법을 무시하고 제 멋대로 산 죄가 매우 크리라.

▲ 관룡사 가는 길, 창년군 창녕읍 술정리에 있는 동삼층석탑. 국보 제 34호인 이 동삼층석탑은 불국사 석가탑에 버금가는 직선의 아름다움으로 가슴 뭉클하게 한다.

【 대웅전 쇠서로 마음의 출구를 핥다 】
쇠서는 소의 혓바닥이다. 관룡사의 또 하나의 보물인 대웅전은 전국에 있는 사찰의 대웅전 가운데서도 쇠서의 조형미가 가장 빼어나다. 관룡사 대웅전의 쇠서는 함부로 혓바닥을 놀리지 않는 절제된 소의 고요한 아름다움과 넘치지 않는 부드러움을 동시에 갖고 있다. 약간 모자란 듯 짧고 부족한 쇠서로 관룡사 대웅전은 중생들의 간지럽고 아픈 곳을 소 혓바닥처럼 기어이 싹싹 핥아 주는 것이다.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을 봉안하고 있는 수미단과 아(亞)자 천장의 섬세한 문양과 채색도 보물로서의 관룡사 대웅전의 고전적 질감을 무진장으로 간직하고 있다. 관룡사 대웅전은 조선 태종 원년(1401)에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9년(1617)과 영조 25년(1749)에 중창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쇠락해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 말사로 등록되어 있지만, 신라 때만 해도 관룡사는 8대 사찰의 하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창건 연대는 내물왕 39년(394)이라고 하나 확실치 않다.

쇠서는 소의 혓바닥이다. 관룡사의 또 하나의 보물인 대웅전은 전국에 있는 사찰의 대웅전 가운데서도 쇠서의 조형미가 가장 빼어나다. 관룡사 대웅전의 쇠서는 함부로 혓바닥을 놀리지 않는 절제된 소의 고요한 아름다움과 넘치지 않는 부드러움을 동시에 갖고 있다. 약간 모자란 듯 짧고 부족한 쇠서로 관룡사 대웅전은 중생들의 간지럽고 아픈 곳을 소 혓바닥처럼 기어이 싹싹 핥아 주는 것이다.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을 봉안하고 있는 수미단과 아(亞)자 천장의 섬세한 문양과 채색도 보물로서의 관룡사 대웅전의 고전적 질감을 무진장으로 간직하고 있다. 관룡사 대웅전은 조선 태종 원년(1401)에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9년(1617)과 영조 25년(1749)에 중창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쇠락해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 말사로 등록되어 있지만, 신라 때만 해도 관룡사는 8대 사찰의 하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창건 연대는 내물왕 39년(394)이라고 하나 확실치 않다.

▲ 관룡사 주지 석담 스님은 염불수행을 주력으로 하는 염불승이다. 대웅전에 49재가 있어 석담 스님의 낭랑한 염불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관룡사(觀龍寺)라는 절집 이름은 원효대사가 제자 송파와 함께 절 뒤편 화왕산 병풍바위 아래서 백일기도를 하던 중, 화왕산 정상 연못에서 갑자기 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지었다는 전설이 묻어 있다. 그 전설 때문일까? 지금 관룡사 부속 암자인 병풍바위 아래 청룡암에서는 법희라는 노스님 한 분이 하루 한 끼씩 생식만 하며 노구를 이끌고 승천을 기다리고 있다.
관룡사 석장승 아래로 내려와 다시 올려다 보는 화왕산의 봄은 살아 있는 것들을 더욱 살아 있게 하는 불의 뜨거움이 있다. 그 양명한 불의 뜨거움은 아직 남정네의 손길이 한 번도 닿지 않은 숫처녀의 젖꼭지처럼 이제 막 몽우리를 맺기 시작한 진달래와 벚꽃에게 기어이 봄 폭탄을 설치하고 있다. 그 꽃 폭탄이 터지면 화왕산 관룡들은 아픈 중생들의 바람과 염원을 안고 또 한 번 승천하리라.
관룡사를 발아래 두고 용선대에서 병풍바위를 에돌아 창녕읍으로 내려오는 길, 내 마음의 밭두렁에 불이 붙었다. 그리고 그 불길은 화왕산 아랫자락 보리밭 사이 길을 지나며 수십 년간 항우울제에 찌든 내 마음의 반근육을 생명의 근육으로 쇄신하고 있었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거기 내 봄의 출구가 진달래처럼 활짝 문을 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