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 튼튼, 불교교리 한 토막] 10. 열반적정(涅槃寂靜)

열반은 죽음이 아니다 _

2008-06-01     관리자


부처님 근본 교설 가운데 하나가 삼법인(三法印)입니다. ‘인(印)’이란 인증, 증명의 뜻입니다. 삼법인의 세 가지 도리에 의지하여 어떤 교설이나 이론을 인증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교설이나 이론이 삼법인의 내용에 맞으면 부처님 가르침이고, 맞지 않으면 마구니의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법인의 내용에 대해서 북방과 남방에 차이가 납니다. ‘삼법인’이라는 용어는 아함경이나 니까야 등 초기경전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삼법인이 무엇이다’라는 부처님의 똑 떨어진 말씀도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니까야에는 “무상(無常)한 것은 괴로움[苦]이다. 괴로운 것은 무아(無我)이다.”라는 구절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에 남방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개고(一切皆苦),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삼법인으로 정리합니다.
반면 아함경에는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다. 괴로운 것은 무아이다.”라는 구절뿐만 아니라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이다. 모든 것을 멸하면 곧 열반이다.”라는 구절과 “모든 행은 무상하고, 모든 행은 무아이며, 열반은 적정하다”라는 구절도 등장합니다. 이에 북방에서는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涅槃寂靜)’을 삼법인으로 정리합니다. ‘무상’과 ‘무아’에 ‘고’의 내용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 등으로 일체개고를 제외한다고 봅니다. 한편, 북방에서는 삼법인에 일체개고를 합쳐 사법인(四法印)이라고도 합니다.
‘삼법인이 무엇으로 되어있는가’가 이번 논의의 초점은 아니지만, 삼법인에서 ‘열반적정’이라는 내용을 전개하려다보니 서두가 길어졌습니다.

마음의 동요 없이 모든 것이 밝게 드러난 상태
‘열반’은 범어 니르바나(nirvana)를 음역한 것으로, ‘불어서 끈다’라는 뜻입니다. 즉, 열반이란 탐욕, 성냄, 어리석음 등 번뇌를 불어서 끈 상태, 타오르는 번뇌를 소멸시키고 깨달음의 지혜인 반야를 얻은 상태를 말합니다. 모든 번뇌가 사라진 상태는 참으로 고요하기에 열반적정이라고 합니다. 열반은 고요하기도 하지만 밝기도 합니다. 이를 적조(寂照)라고 합니다.
그런데 ‘열반’을 죽음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스님이 목숨을 다할 때 보통 ‘열반하셨다’라고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열반을 죽음으로 생각한 서양 학자도 있었습니다. 열반이 죽음 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죽음과 관련된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부처님이 45년 동안 가르침을 펴시고 구시나가라에서 돌아가실 때를 ‘열반’이라고 합니다.
만약 부처님의 죽음이 열반이라면 부처님 이전의 삶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유여의열반(有餘依涅盤),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과 관련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번뇌는 끊었지만 아직 육체는 있기 때문에 ‘나머지 의지할 것[餘依]’이 있다는 뜻에서 유여의열반이라고 하고, 이 몸마저 버렸을 때를 무여의열반이라고 풀이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풀이도 더 깊이 생각해야겠지만 보통 이때 육체의 유무가 부각됩니다.
이에 마음을 강조하는 불교에서는 육체를 열반, 완전한 열반으로 가는 장애물로 본다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논리적 비약이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잡아함경』 제29권(809경)을 보면 부처님 당시에도 그런 예가 있습니다. 탐욕과 집착을 다스리고자 ‘몸을 더럽다고 살펴보라’는 부정관(不淨觀)에 대한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여 목숨을 던져버린 제자가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죽음을 불교의 최종 목적지인 열반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죽음이 열반이라면 이처럼 힘들게 수행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열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또한 마음 작용으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마음 작용에 의해 온갖 분별과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이 온갖 분별과 괴로움은 알음알이와 번뇌에 의해 반복해서 일어나게 됩니다. 알음알이와 번뇌가 사라지면 모든 분별과 괴로움은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중생들과 함께 하려면 말이 필요합니다. 다시 중생들에게 모습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늘 적정(寂靜)한 상태에서 중생들과 함께하십니다. 늘 평온하고 늘 그 자리입니다. 마음의 동요가 없습니다. 분별이 사라진 상태, 고요하다는 말조차 끊어진 상태, 그러면서 모든 것이 밝게 드러나는 상태를 열반이라고 합니다.
굳이 말한다면 분별없는 그 자리에 머문 것을 무여의열반이라 하고, 다시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 모습을 나타내는 것을 유여의열반이라고 합니다. 육체의 유무가 중심이 아닙니다. 따라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구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드셨다는 것은 육체를 버렸다는 의미보다는 다시 분별없는 그 자리에 드셨다는 뜻입니다.
보통 스님께서 ‘열반하셨다’, ‘입적(入寂)하셨다’라고 하는 것은 스님의 정진수행을 칭송함으로써 불자에게 신심과 발심을 심어주고자 하는 가르침이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