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연 이야기] 인연에 순응하며 사는 길

2008-05-25     김영희

 

 
눈 오는 날 

눈 내리는 공원을 바라본다.
밤 사이 세상은 모두 사라지고
깨끗함만 홀로 빛나고 있다.

눈 덮인 산사를 생각해 본다.
새벽 목탁 소리에 빗장문 열고
대웅전 앞을 바라본다.
계절이 티 없는 거울같이
산 속에 펼쳐지고 있다.

사뿐사뿐 옮겨 놓은 두 개의 발자국
어느새 눈과 나는 한 몸 되어
따뜻한 부처님 미소 앞에 몸 녹이고 있다

눈 내리는 아침, 부엌에서 효창 공원을 내려다보니 앙상했던 가지에 눈꽃 핀 정경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때, 지난 연말 머물렀던 어느 산사의 새벽 풍경이 떠올랐다. 그때도 오늘과 같이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스님의 나지막한 목탁 소리에 정성스럽게 절을 하고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되새기며 나는 그동안 맺어 왔던 소중한 인연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남편과의 인연도 새삼 다시 되돌아보았고, 앞으로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바깥 공기는 차가웠지만 법당 안의 내 몸과 마음은 뜨거운 불덩이인 양 타고 있었다.

작년 언제인가, 절에 나간다고 하니까 친정 식구들이 무척 반기는 눈치였다. 외숙모님은 본인이 공부하시던 경전 을 주셨고, 친정 어머니는 내가 이제껏 보지 못했던 황금 불상을 주셨다. 염주와 더불어 3대째 간직하던 거라며 너와 인연이 있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뜻밖의 행운이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것이 너무나 큰 축복이라는 것을….

어린 시절에는 탑 주위를 맴돌기도 했고, 독경 소리가 정겹게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때에는 놀이에 빠져 친구들을 따라 교회에 가기도 했다. 20대가 훨씬 넘어 지금 다니고 있는 대원정사를 기웃거렸던 기억도 난다.

현재 나는 용산에 거주하면서 대원정사와 다시 인연을 맺고 주지스님이 운영하시는 차 명상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명상실 분위기가 너무 좋아, 언젠가 내가 꾸며보고 싶었던 방을 누군가 대신 만들어 준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죽는 날까지 자각하며 깨어 있으세요. 그래야 다음 생을 잘 맞이할 수 있답니다.”라는 스님의 말씀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명상 공부는 시간이 지날수록 잊고 지냈던 기억을 되살려 주었고, 새벽 예불 때마다 나의 존재를 깨워 주기 시작했다.

이렇게 절과의 인연을 되돌아보니 결혼 후 대기업에 근무하는 남편을 따라 홍콩에 가서 생활하던 때가 생각난다. 당시 나는 그곳에서 포교당에 다녔는데, 해외에서의 포교당은 친목단체와 같았다. 그래서 불교를 공부하기보다는 외로움을 달래고 영어도 배워보자는 심정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고, 마치 심심할 때마다 차 마시러 커피숍에 가듯이 자주 그곳을 찾아가곤 했다.

1993년, 주재원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남편은 국책사업의 하나인 레이저 통신 사업으로 중국·일본 등에 지사를 둔 큰 사업체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 후 나는 그 회사의 방계사업 가운데 하나였던 영화사와 신사동에 위치해 있던 오즈극장을 직접 운영하게 되었다. 명상수행과 더불어 불교 교리를 접해보니 상업 영화는 색계(色界), 아트 영화는 무색계(無色界)에 비유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당시 나는 내 성향대로 무색계 영화, 곧 아트 영화를 주로 상영했다.

오즈극장은 경영면에서는 큰 이윤을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상업 영화에 연연하지 않은 덕에 각종 영화제를 유치할 수 있었고, 많은 회원 덕분에 좌석 점유율 99.9% 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을 눈여겨 본 기업들이 아트 영화에 손을 뻗치게 되면서 오즈극장은 재작년에 문을 닫게 되었다.

불교와 문화 사업에 동시에 인연을 맺은 때문인지, 나는 불교야말로 사람들의 의식 수준을 한 차원 높임으로써 모든 문화 영역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깊고 깊은 정신 세계에서 우러난 불교의 탁월한 가르침들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세속적인 가치와는 거리가 있는 아트 영화에도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초적인 감각에 기울어지기 십상인 상업 영화가 누리는 대중적인 인기를 아트 영화가 나누어 가질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문화적인 저변은 얼마나 풍요로워질까?

돌이켜 보면 나는 명상 수행을 통해 많은 것을 얻은 것 같다. 명상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있는 불성, 그리고 나 자신에게 있는 불성을 보고자 노력하였다. 그러한 노력의 과정에서 나의 위치와 내면을 인식하게 되었고, 결국은 인과의 법칙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자 지금의 나와 내 주변의 모든 현상들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인과의 법칙에 의지하고 있는 것임이 분명해졌다.

언젠가 인연에 순응하며 사는 길이 가장 편하다는 설법을 들은 적이 있다. 비록 늦게 알게 되긴 했지만 부처님이 가르치신 인과의 법칙은 무시할 수 없는 진리임이 분명한 것 같다. 그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가는 길은 과연 무엇일까? 아직 초보 단계이긴 하지만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스스로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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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_ 시네마스페이스(주) 및 오즈극장의 대표이사, 극장협회 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MBC 대한민국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