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직소포에 마음의 고름을 씻고

마음으로 떠나는 산사여행 / 산상무쟁처 부안 봉래산 월명암

2008-05-24     관리자

▲ 하늘에 걸린 월명암 대웅전에 앉아 솔바람 소리를 듣는다. 청아한 하늘의 솔바람 소리가 조선의 기구한 여인 이매창의 불 가슴도 녹여주었을 터이다.
길은 사람을 거듭나게 한다. 길을 걷다 보면 죽어 있던 몸과 마음의 근육이 눈을 번쩍 뜨고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거듭나기의 두 번째 여정으로 나는 전북 내변산에 있는 월명암(月明庵)을 찾았다. 월명암은 대둔산 태고사, 백양사 운문암과 더불어 호남의 3대 영지(靈地)인데다, 내 마음의 암이 처음으로 발병했던 고교시절, 불온한 알코올에 혼곤히 젖어 걸은 이후 오랫동안 추체험(追體驗)으로만 남아 있는 길이기도 하다.
우리네 인생길이 그러하듯 모든 길에는 높고 낮음, 길고 짧음, 급함과 느림, 직선과 곡선이 있기 마련이다. 월명암 오르는 길도 그렇게 여러 가지 갈래가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짧고 급한 직선의 길은 남여치탐방지원센터에서 쌍선봉-낙조대를 거쳐 월명암에 갔다가 그대로 되돌아오는 길(2시간)과 내변산탐방지원센터에서 낙조대로 올라 월명암에 들렀다가 쌍선봉을 거쳐 남여치탐방지원센터로 내려오는 길(2시간)이 있다. 가장 멀고 더디고 느린 곡선의 길로는 내소사탐방지원센터에서 관음봉삼거리-재백이고개-직소폭포-자연보호헌장탑을 거쳐 월명암에 들렀다 남여치탐방지원센터로 내려오는 길(5시간)이 있고, 그보다 한 호흡 짧은 길로 원암탐방지원센터에서 곧바로 재백이고개로 올라 직소폭포-자연보호헌장탑-월명암-남여치탐방지원센터로 내려오는 길(4시간)이 있다.

▲ 몸과 마음의 관능을 일깨우는 직소폭포. 그래서 직소폭포는 월명암 가는 길의 핵이다. 이곳에서 속세 것을 말끔히 씻고 월명암에 올라야 영과 육의 맑은 귀가 번쩍 틘다.
느림의 행복과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곡선의 길 _
마음이 급한 사람은 이 가운데 가장 짧은 직선 길을 택하면 된다. 그러나 그런 직선 길은 우리네 삶이 또한 그러하듯 정상은 빠르지만 느림의 행복과 숲의 깃이 주는 여유를 맛볼 수 없다. 반면에 멀고 더디고 느린 곡선 길은 길의 행복과 여유가 깊다. 특히 몸과 마음의 근육이 죽어 있는 사람은 그런 곡선의 길일수록 더 깊은 죽살이의 행복과 기쁨을 맛볼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나는 버겁지만 가장 멀고 더디고 느린 곡선 길을 택해 월명암에 오르기로 했다.
내소사 곡선 길은 처음부터 말랑말랑한 흙의 감촉으로 내 몸과 마음의 근육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그 부드러운 감촉은 곧바로 땀과 노동의 역동성으로 내 몸과 마음의 근육에 싱싱하게 전이되어 십 수 년 동안 항우울제에 절어 있던 마음의 암벽에 엔도르핀의 물보라를 일으켰다. 그런 나에게 화답이라도 하듯 알몸의 졸참나무와 굴참나무, 합다리나무, 팥배나무들이 줄지어 반갑게 잔가지를 흔들어 주었다. 청설모 삼형제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선행하며 월명암 가는 길을 끌어 주었다.
관음봉삼거리를 지나 재백이고개로 가는 동안 외변산 갈매기 떼울음 소리가 귓전을 세차게 때렸다. 월명암 가는 길, 부디 무거웠던 반생명의 짐 몽땅 부려놓고 삶의 역동을 얻어가라는 갈매기들의 관음기도 소리다. 이윽고 직소폭포. 콸콸콸 일직선으로 쏟아지는 천년의 폭포소리가 땀에 흥건히 젖은 몸과 마음의 근육을 일시에 풀어준다. 그리고 오목가슴 한 가운데로 온전히 폭포를 맞는 순간 죽어 있던 마음의 관능도 번쩍 눈을 뜬다.

▲ 자식을 거느리듯 여러 산봉우리를 한 품에 싸잡아 안고 있는 월명암. 그 까닭에 월명암은 예부터 호남의 3대 영지로 알려졌다.
그렇다. 여자의 둔덕 같은 두툼한 얼음벽 사이로 비상의 포말로 날아오르는 겨울 직소포는 여름 직소포보다 훨씬 관능적이고 생명적이다. 그러면서도 다른 데 곁눈 주지 않고 수직으로 뻗어 내리는 곧음의 정신은 매섭다. 멀고 더디고 느리더라도 반생명의 영화보다는 남루의 정도를 걸어가라는 큰 외침으로 들린다(그러기에 직소포는 월명암 가는 길의 핵이다. 이 핵 없이 월명암에 오른들 우리 생에 겹겹이 쌓인 반생명의 잡때는 쉽게 씻겨지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 직선의 포말은 생명의 날개가 되어 내 마음의 늪에 찐득찐득 고여 있는 암의 피고름을 청하게 씻어준다. 그렇게 한 시간쯤 포말의 탄력에 몸과 마음을 내맡기면 온몸이 활시위처럼 팽팽히 당겨진다. 그리고 그 역동성은 근육으로 전이돼 곧바로 월명암으로 뻗친다.
월명암은 내변산 하늘 중턱에 새집처럼 둥우리를 틀고 있다. 구불텅구불텅 좁게 난 오솔길을 따라 둥우리에 들자 먼저 청아한 겨울 솔바람 소리가 팔만 사천 법문이 되어 마음의 백팔번뇌를 맑게 헹궈 준다. 지나가는 겨울새들의 추운 갈증을 위해 암자 마루에 마련해 둔 뜨거운 연잎차가 겨울 월명암의 다스하고 자비로운 불성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러기에 조선의 기구한 여인 이매창도 오늘 나처럼 ‘월명암에 올라서(登月明庵)’ ‘독수공방 외로이 병에 찌든 이 몸 / 굶고 떨며 사십 년 세월 길게도 살았네 / 묻노니 사람살이가 얼마나 되는가? / 어느 날도 울지 않은 적 없네’라고 한했던 반생명의 마음을 ‘하늘에 기대어 절간을 지었기에 / 풍경소리 맑게 울려 하늘을 꿰뚫네 / 나그네 마음도 도솔천에나 올라온 듯 / 황정경을 읽고 나서 적송자를 뵈오리다’라며 밝고 청한 생명의 마음으로 바꿔 내려갔을 터이다.

▲ 9년째 주지 소임을 맡아 월명암 중창불사에 힘쓰고 있는 천곡 스님
세상사 번뇌망상 눈보라에 날리고 _
이처럼 내변산의 또 다른 이름인 봉래산 중턱에 둥지를 틀고 있는 월명암은 신라 문무왕 12년(692년) 인도의 유마(維摩) 거사, 중국의 방(龐) 거사와 함께 세계 3대 거사로 숭앙되는 부설(浮說) 거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월명암이 마음앓이를 많이 하는 중생들의 둥지가 된 것은 산상무쟁처(山上無諍處)의 양택지로 전해 내려오기 때문이다. 9년째 주지 소임을 맡아 월명암 중창불사에 힘쓰고 있는 천곡(天谷) 스님은 이에 대해 “월명암은 빈부귀천, 높고 낮음, 배우고 못 배움에 상관없이 아무리 죄가 깊어도 열심히 공부하면 부설 거사처럼 다 성불할 수 있는 복된 곳”이라면서 “힘들게 올라온 만큼 월명암은 온갖 세상사 크고 무거운 번뇌 망상과 고뇌를 다 떨쳐 버리고 희망만 생겨서 가는 산상무쟁처”라는 말로 알기 쉽게 법문을 들려준다.
천곡 스님의 법문은 월명암 창건 설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월명암을 창건한 부설 거사는 당초 스님이었는데 변산의 한 암자에서 영희, 영조 두 도반 스님과 수행하다 강원도 오대산으로 가던 중 김제에서 묘화(妙華)라는 여인을 만나 결혼함으로써 파계했으나 더욱 열심히 수행해 훗날 큰 도를 이룬 분으로서, 월명암은 부설 거사와 묘화 부인 사이에 태어난 딸과 아들인 월명(月明)과 등운(登雲) 가운데 딸인 월명을 위해 지어준 암자다. 말하자면 월명암은 부설 거사처럼 파계의 원죄가 있어도 불철주야 수행을 계속하면 부처님처럼 성불할 수 있다는 차별 없는 평등의 중생구제사상을 이면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천곡 스님과 따스한 다담(茶談)을 나눈 뒤 월명암이 주는 또 하나의 초대장인 낙조대에 오르려 했으나 갑자기 짙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람에 서해 낙조에로의 즐거운 초대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월명무애(月明霧涯)라 했던가. 안개는 아니지만 능선과 절벽과 소나무 숲에 습자지처럼 내려 쌓이는 눈꽃이 내 마음의 모든 풍경을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하나로 단일화해 주었다. 그리하여 월명암 입구에 조용히 나부끼고 서 있는 『잡보장경』 한 구절이 내 마음의 싱싱한 근육이 되어 순백의 동화 속으로 빨려 들었다.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
무엇을 들었다고 쉽게 행동하지 말고
그것이 사실인지 깊이 생각하여 이치가 명확할 때 과감히 행동하라
벙어리처럼 침묵하고 임금처럼 말하며 눈처럼 냉정하고 불처럼 뜨거워라
태산 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
역경을 참아 이겨내고 형편이 잘 풀릴 때를 조심하라
재물을 오물처럼 볼 줄도 알고 터지는 분노를 잘 다스려라
때로는 마음껏 풍류를 즐기고
사슴처럼 두려워할 줄 알고 호랑이처럼 무섭고 사나워라
이것이 지혜로운 이의 삶이니라.


부안 봉래산 월명암: _ 063) 582 -7890, www.wolmyung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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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영_1986년 서울신문에 시와 200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각각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수렵도』 『퍽 환한 하늘』 『아무도 너의 깊이를 모른다』 등과 동화책으로 『아름다운 철도원 김행균』 『발가락이 꼬물꼬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