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직소포에 마음의 고름을 씻고
마음으로 떠나는 산사여행 / 산상무쟁처 부안 봉래산 월명암
2008-05-24 관리자
우리네 인생길이 그러하듯 모든 길에는 높고 낮음, 길고 짧음, 급함과 느림, 직선과 곡선이 있기 마련이다. 월명암 오르는 길도 그렇게 여러 가지 갈래가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짧고 급한 직선의 길은 남여치탐방지원센터에서 쌍선봉-낙조대를 거쳐 월명암에 갔다가 그대로 되돌아오는 길(2시간)과 내변산탐방지원센터에서 낙조대로 올라 월명암에 들렀다가 쌍선봉을 거쳐 남여치탐방지원센터로 내려오는 길(2시간)이 있다. 가장 멀고 더디고 느린 곡선의 길로는 내소사탐방지원센터에서 관음봉삼거리-재백이고개-직소폭포-자연보호헌장탑을 거쳐 월명암에 들렀다 남여치탐방지원센터로 내려오는 길(5시간)이 있고, 그보다 한 호흡 짧은 길로 원암탐방지원센터에서 곧바로 재백이고개로 올라 직소폭포-자연보호헌장탑-월명암-남여치탐방지원센터로 내려오는 길(4시간)이 있다.
내소사 곡선 길은 처음부터 말랑말랑한 흙의 감촉으로 내 몸과 마음의 근육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그 부드러운 감촉은 곧바로 땀과 노동의 역동성으로 내 몸과 마음의 근육에 싱싱하게 전이되어 십 수 년 동안 항우울제에 절어 있던 마음의 암벽에 엔도르핀의 물보라를 일으켰다. 그런 나에게 화답이라도 하듯 알몸의 졸참나무와 굴참나무, 합다리나무, 팥배나무들이 줄지어 반갑게 잔가지를 흔들어 주었다. 청설모 삼형제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선행하며 월명암 가는 길을 끌어 주었다.
관음봉삼거리를 지나 재백이고개로 가는 동안 외변산 갈매기 떼울음 소리가 귓전을 세차게 때렸다. 월명암 가는 길, 부디 무거웠던 반생명의 짐 몽땅 부려놓고 삶의 역동을 얻어가라는 갈매기들의 관음기도 소리다. 이윽고 직소폭포. 콸콸콸 일직선으로 쏟아지는 천년의 폭포소리가 땀에 흥건히 젖은 몸과 마음의 근육을 일시에 풀어준다. 그리고 오목가슴 한 가운데로 온전히 폭포를 맞는 순간 죽어 있던 마음의 관능도 번쩍 눈을 뜬다.
월명암은 내변산 하늘 중턱에 새집처럼 둥우리를 틀고 있다. 구불텅구불텅 좁게 난 오솔길을 따라 둥우리에 들자 먼저 청아한 겨울 솔바람 소리가 팔만 사천 법문이 되어 마음의 백팔번뇌를 맑게 헹궈 준다. 지나가는 겨울새들의 추운 갈증을 위해 암자 마루에 마련해 둔 뜨거운 연잎차가 겨울 월명암의 다스하고 자비로운 불성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러기에 조선의 기구한 여인 이매창도 오늘 나처럼 ‘월명암에 올라서(登月明庵)’ ‘독수공방 외로이 병에 찌든 이 몸 / 굶고 떨며 사십 년 세월 길게도 살았네 / 묻노니 사람살이가 얼마나 되는가? / 어느 날도 울지 않은 적 없네’라고 한했던 반생명의 마음을 ‘하늘에 기대어 절간을 지었기에 / 풍경소리 맑게 울려 하늘을 꿰뚫네 / 나그네 마음도 도솔천에나 올라온 듯 / 황정경을 읽고 나서 적송자를 뵈오리다’라며 밝고 청한 생명의 마음으로 바꿔 내려갔을 터이다.
천곡 스님의 법문은 월명암 창건 설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월명암을 창건한 부설 거사는 당초 스님이었는데 변산의 한 암자에서 영희, 영조 두 도반 스님과 수행하다 강원도 오대산으로 가던 중 김제에서 묘화(妙華)라는 여인을 만나 결혼함으로써 파계했으나 더욱 열심히 수행해 훗날 큰 도를 이룬 분으로서, 월명암은 부설 거사와 묘화 부인 사이에 태어난 딸과 아들인 월명(月明)과 등운(登雲) 가운데 딸인 월명을 위해 지어준 암자다. 말하자면 월명암은 부설 거사처럼 파계의 원죄가 있어도 불철주야 수행을 계속하면 부처님처럼 성불할 수 있다는 차별 없는 평등의 중생구제사상을 이면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천곡 스님과 따스한 다담(茶談)을 나눈 뒤 월명암이 주는 또 하나의 초대장인 낙조대에 오르려 했으나 갑자기 짙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람에 서해 낙조에로의 즐거운 초대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월명무애(月明霧涯)라 했던가. 안개는 아니지만 능선과 절벽과 소나무 숲에 습자지처럼 내려 쌓이는 눈꽃이 내 마음의 모든 풍경을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하나로 단일화해 주었다. 그리하여 월명암 입구에 조용히 나부끼고 서 있는 『잡보장경』 한 구절이 내 마음의 싱싱한 근육이 되어 순백의 동화 속으로 빨려 들었다.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
무엇을 들었다고 쉽게 행동하지 말고
그것이 사실인지 깊이 생각하여 이치가 명확할 때 과감히 행동하라
벙어리처럼 침묵하고 임금처럼 말하며 눈처럼 냉정하고 불처럼 뜨거워라
태산 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
역경을 참아 이겨내고 형편이 잘 풀릴 때를 조심하라
재물을 오물처럼 볼 줄도 알고 터지는 분노를 잘 다스려라
때로는 마음껏 풍류를 즐기고
사슴처럼 두려워할 줄 알고 호랑이처럼 무섭고 사나워라
이것이 지혜로운 이의 삶이니라.
부안 봉래산 월명암: _ 063) 582 -7890, www.wolmyung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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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영_1986년 서울신문에 시와 200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각각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수렵도』 『퍽 환한 하늘』 『아무도 너의 깊이를 모른다』 등과 동화책으로 『아름다운 철도원 김행균』 『발가락이 꼬물꼬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