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법구] 좋은 도반은 수행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

2008-05-23     오한숙희

내가 대학신입생이 되었을 때 이런 말을 들었다. “인생에서 백 권의 책과 열 명의 친구와 한 분의 스승을 얻는다면 성공한 것이다.” 그때만 해도 친구가 많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게 나라고 자부하던 터라 열 명 정도의 친구야 문제없다고 생각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는 ‘친구’와 ‘아는 사람’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일로써 알게 된 사람들은 유통기한이 있는 상품처럼 일이 끝나면 관계도 끝이었다. 사회생활에서 친구를 얻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영숙이는 내가 사회생활에서 얻은 유일한 친구이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들어간 직장, 남성중심적이며 어쩐지 군대와 닮은 분위기는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평등하고 민주적으로 자라난 나를 부적응자로 만들어버렸다. 영숙과 나는 구내식당에서 처음 만났다. 최고경영자의 비서였던 그는 결재를 받으러 가는 부서장급에게만 노출되는 ‘고급’ 평사원이었다. 거의 파장인 식당에서 만난 둘은 동갑이라는 사실에 친근감을 더하여 직장생활의 짝꿍이 되어 버렸다.

겨우겨우 일 년을 채우고 대학원 진학을 명분으로 직장을 그만두던 날, 영숙과 작별의 시간을 가졌다. 학비 걱정에서 벗어나 이제 돈 번다고 좋아했건만 다시 떠나야 하는 신세가 된 것도 불안했고 사회부적응자라는 자격지심도 작용하여, ‘너는 비서실 같은 무풍지대에 있어서 몰라’라며 상사들에 대한 흉과 이런저런 불만을 늘어놓았다. 내내 빙긋이 웃기만 하던 영숙이가 헤어질 무렵 딱 한마디를 했다. 그것도 웃으면서.

“비서실에는 네가 모르는 또 다른 바람이 많이 불어. 무풍지대만은 아냐. 잘 가. 어려운 일 있으면 연락하구.”

대학원에 다니면서 나는 어려운 고비 때마다 영숙이의 이 한마디를 떠올리며 힘을 내곤 했다.
지난 가을, 오랜만에 영숙이를 만났다. 건강하고 활기찬 것이 전보다 훨씬 젊어보였다. 1년째 퇴근 후 헬스클럽을 다닌다고 했다. ‘역시 서방님이 돈 잘 벌어다 주고 살림 잘 거들어 주는 사모님은 다르네.’ 나는 그 무렵 몹시 지쳐 있었다. 몸도 많이 약해져 있었다. 보양식이라며 오리탕을 사줘서 잘 먹고 나오는데 근처 가게에서 비타민을 사서 쥐어주며 영숙이가 말했다.

“나도 힘든 거 많아. 살림하고 자식 키우고 직장 다니고…. 남편이 돕는다 해도 남편으로 인해 생기는 어려움은 또 따로 있어. 헬스클럽이 나로서는 돌파구야. 언제든지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연락해. 내가 다 사 줄게.”

나는 눈물이 왈칵 솟았다. 그의 배려 깊은 우정에도 그랬지만, 힘들어도 묵묵히 돌파구를 찾아 온 한 인간에 대한 감동이었다.

예의 빙긋 웃는 표정으로 회사 점심시간 종료에 맞춰 종종걸음 치는 영숙이. ‘그래, 다들 힘들지만 베풀면서 이기고 사는 거야.’ 어떤 힘을 얻는 순간 부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좋은 도반은 수행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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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한숙희 _ 이화여대에서 사회학과 여성학을 공부했다. 20여 년 동안 여성의 의식과 삶을 발전시키는 데 앞장서 왔으며, 3,000여 회의 여성학 강의를 했다. KBS TV ‘생방송 여성’을 시작으로 여러 방송사에서 교양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며, 현재도 방송과 강연, 집필 등 대중적인 여성학자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그래, 수다로 풀자』 『딸, 이렇게 키워라』 『딸들에게 희망을』 『부부 성공시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