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아시스 실크로드를 가다 3] 터키 페르가마

삶과 죽음 그리고 불사(不死)의 욕망

2008-05-23     월간 불광

 

 

▲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트라이누스 신전
터키의 페르가마는 페르가몬 왕국의 수도였으며, 약 150년 동안 헬레니즘 문명이 꽃을 피웠던 소아시아의 중심도시였다. 페르가마 어디에서 보아도 높은 산에 위치한 아크로폴리스가 보인다. 그리스인들의 삶의 중심은 ‘도시의 시민 공동체’라는 의미를 지닌 폴리스였다. 대부분의 아크로폴리스에는 신전(神殿)과 원형극장과 경기장, 아고라(시장) 등이 있다. 특히 그리스인들에게 있어 신들에 대한 숭배는 공적인 삶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으며,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일에 이르기까지 삶 전체를 관통했다.
고대 페르가몬 왕국의 상징적 건물인 트라이누스 신전은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서 있다. 로마에서는 황제가 죽으면 신으로 격상하여 신전을 지어 모시는 일이 많았다. 트라이누스 신전의 기단에는 여러 개의 하얀 대리석 기둥이 세워져 있어 웅장함을 더하였다.

 

 

 

 

 

▲ 아스클레피온으로 가는 길에는 기둥들이 도열해 있다.

트라이누스 신전을 돌아가면 도서관 터가 있다. 유메네스 2세가 세운 이 도서관은 장서가 무려 20만 권으로 당시 세계에서 둘째로 큰 도서관이었다. 당시 이집트에는 알렉산드리아에 장서 50만 권을 보유한 도서관이 있었다. 페르가몬의 도서관이 커지는 것을 염려하여 이집트에서는 파피루스의 수출을 금하였다. 궁하면 통한다고 페르가몬에서는 양피지를 발견하여 책을 만들었다. 로마의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를 공격할 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것을 사죄하는 뜻으로 페르가몬의 그 많은 책을 클레오파트라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이 거대한 도서관은 640년 아랍의 침입 때 불타고 말았다.

 

 

 

 

 

 

▲ '차이 에비'에서 게임을 즐기는 남자들
진정한 불사(不死)는_____ 지금은 대부분 터만 남아있지만, 페르가몬의 아크로폴리스에도 많은 신전들이 있었다. 에우메네스 2세 때 이민족과의 전쟁에서 이긴 것을 기념하여 지었다는 제우스 신전을 비롯하여 아테나 신전, 디오니소스 신전, 곡물과 대지의 여신인 데메테르 신전 등이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왜 이렇게 많은 신들이 필요했을까?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을 선고 받은 유한의 생명을 지녔기 때문에 항상 무한의 생명을 갈망하였다. 인간은 죽어야 하는 존재이므로 죽음을 초월하는 강력한 그 무엇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이 고안해 낸 것이 죽음을 초월하는 불사(不死)의 신인 것이다. 불사는 인간의 욕망 중 가장 강렬한 욕망이 아닐까 싶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불사에 이르는 길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 아스클레피온의 입구에는 부활을 상징하는 뱀이 조각되어 있다.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그것을 불사라고 한다. 그리고 여덟 가지의 성스러운 길이야말로 불사에 이르는 길이다.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正念), 올바른 집중이다.”
아크로폴리스를 내려와서 마을 구경을 하였다. ‘터키의 하루는 차이(홍차)로 시작해서 차이로 끝난다’고 할 만큼 터키인들은 차를 즐겨 마신다. 그래서인지 작은 마을에 ‘차이 에비(찻집)’가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차도 마시고 아픈 다리도 쉴 겸 해서 들어갔더니 여러 가지 게임을 즐기고 있는 남자들뿐이다. 남자들의 전용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차이 에비’에서 마신 차이 맛은 오래도록 기억되었다.

죽음은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_____ 페르가마에 가면 꼭 보아야 할 것이 아스클레피온이다. BC 4세기에 세워진 아스클레피온은 치료의 신인 아스클레피우스의 이름을 딴 병원이었다. 병원으로 들어가는 길 양 옆으로 기둥들이 늘어서 있다.
아스클레피우스는 아폴론과 데살로니카의 공주 콜로니스가 낳은 아들인데, 그의 의술은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경지까지 발전하였다. 이에 화가 난 하데스(죽음의 신)가 제우스에게 불평을 털어놓자, 제우스는 하데스의 불평에 일리가 있다고 여기고 번개를 던져 아스클레피우스를 죽였다.

 

 

 

 

 

 

▲ 에게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앗소스으ㅏ 아테나 신전

수백 년 동안 아스클레피온에 들어온 환자가 죽어서 나가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중증의 환자들을 받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아스클레피온의 입구에는 “신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죽음은 이곳에 들어갈 수 없다.”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입구에는 부활을 상징하는 뱀이 조각된 대리석 기둥이 있다. 이 치료센터가 사용했던 의술은 현대의 자연치유법과 흡사하다. 환자에게 적절한 운동과 명상, 음악 감상, 독서, 온천치료법을 사용하였다.
지금은 소실되어 없지만 입원실이라고 할 수 있는 ‘잠의 방’이 있었다. 이곳에서 하루를 보낸 환자는 신관에게 밤에 꾼 꿈을 보고하였다. 신관은 아스클레피우스의 계시에 의해 꿈을 해석하여 그에 맞는 치료와 처방전을 내렸다고 한다. 도서관 앞 정원에는 당시 치료에 쓰였다고 하는 성스러운 샘물이 아직도 흐르고 있다. 샘물 앞에는 80미터 길이의 터널이 있는데 환자들이 이곳을 지나갈 때 천장의 구멍을 통해서 의사들이 용기와 격려를 보냄으로써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고 한다. 혼신을 다하여 치료에 임하였던 의사들의 노력 덕분에 죽음의 신조차도 이곳에 출입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앗소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나다_____ 에게(Aegean)해 바다를 끼고 많은 도시국가들이 건설되었는데, 이곳에서 여러 명의 철학자들이 태어났다. 아리스토텔레스가 3년 동안 머물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앗소스를 찾았다. 앗소스는 지금은 작은 항구도시로 남아 있지만 고대에는 소아시아지역의 예술적 커뮤니티의 중심이었다. 추운 겨울이라 그런지 여행객은 나밖에 없었다.
아크로폴리스는 에게해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도리아 양식으로 지어진 아테나 신전의 기둥은 아름다웠다. 어이없게도 아테나 신전 앞에서 너무나 추워서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앗소스의 성주인 헤르미스의 초대로 이곳에 오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곳에서 철학 학교를 열어 후학들을 지도했으며, 개기 월식이나 바다의 밀물과 썰물 등 실증적 지식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과 행복한 삶은 이성, 도덕성, 의욕 이 세 가지가 갖추어질 때 가능하다. 행복한 삶이 명예, 명성, 재산, 지식의 획득에 달려 있다고 성급하게 규정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였다.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내려와서 마을을 가로질러 가면 성 밖에 네크로폴리스가 있다. 네크로폴리스는 묘지(墓地)인데 수많은 석관들이 놓여있다. 오랜 세월 동안 석관의 유골은 흔적조차 없어졌다. 뚜껑이 없는 석관에는 물이 가득 고여 있고 그곳에 푸른 하늘이 내려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