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스님이 들려주는 절집 이야기 3] 참 나를 만나다...

금강 스님이 들려주는 절집 이야기 3 참선(參禪)

2008-05-23     금강


●                                    백양사 운문암에 방부를 들이다

 

 


10여 년 전 백양사에서 서옹 큰스님을 모시고 살 때의 일이다. ‘참사람운동’을 맡아서 수행프로그램을 만들고, 한국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무차선회’를 주관하다가 평소에 살고 싶었던 백양사 운문암에 방부를 들였다.

서옹 큰스님께, “스님을 모시고 참사람운동 일을 하다 보니 저의 공부가 보잘 것 없음을 알았습니다. 스님의 말씀을 듣고 발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스님을 잘 모시지 못하고 그르치기만 하는 것 같으니, 선원에서 정진하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리니 순순히 승낙을 해 주시고, 조주 스님의 ‘무’자 화두를 주셨다.
사실 정진은 핑계였고 선원으로 도망갔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무차선회’라는 큰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하다 보니 지쳐서 쉬고 싶었다. 더구나 백양사 주지스님이 총무원장 선거에 출마하신다니 도와주지 않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옛날부터 스님들이 발심하여 공부나 기도를 한다고 하면 맡기려던 일도 철회하는 게 절집 풍습이다. 그런 처지를 익히 알고 있는 나는 종종 그 방법을 이용해 천일기도나 선원 정진을 핑계로 위기를 모면하곤 한다.

 

선원에 다니는 스님들도 마음에 맞는 수행처를 찾기란 쉽지 않다. 선지식이 계시거나 공부 분위기가 좋은 선원은 공부하고자 하는 스님들로 일찍부터 문전성시를 이룬다. 그래서 해제날(공부 끝나는 날)이 다가오면 다음 철에 살 곳을 정한 뒤에 찾아가야 한다.
동안거든 하안거든 해제가 끝나는 다음날은 언제나 다음 철에 살 곳을 찾아가 살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방부를 들여야 한다. 이때 방부하는 인원이 많으면 다른 곳을 찾아야 한다. 나도 어느 한 철 방부 들이러 오는 스님들을 맞이하는 지객 소임을 맡은 적이 있었다. 규모가 작은 선원이라 함께 살 수 있는 스님들은 제한되어 있는데 그보다 많은 스님들이 방부를 들여 난감했다. 꼭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몇 년 뒤 다른 곳에서 만나면 그때의 섭섭함을 두고두고 이야기하는 스님이 있어 난처한 일도 있었다.
선방에 한 철 나기 위한 방부를 들이고 나면 누구나 소임을 맡게 된다.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는 선방 생활에서 작은 일들은 분업으로 이루어진다. 입승(대표), 명등(전등 조절), 정통(화장실 청소), 지전(방 청소), 욕두(욕실 청소), 다각(차, 과일 준비), 화대(방 온도 조절), 마호(옷 풀 준비) 같은 소임이 있다. 운문암 선방에서 나는 해우소 청소인 정통을 자원했다. 대중스님들에게 가장 복을 많이 지으며 공부할 수 있는 곳이다. 눈이 오는 날은 방선 시간만 되면 빗자루를 들고 해우소까지 눈을 쓸었다.

●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예나 지금이나 나는 차를 즐겨 마신다. 선원에 가서도 차 마시는 습관은 계속되었다. 아니 참선을 하면서 차를 마시는 맛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맛이라 믿고 있다. 차를 한 철 가장 중요한 양식처럼 여겨 내가 마시는 석 달 동안의 차는 꼭 준비해서 선원에 들어간다. 자연히 스님들도 내가 내어주는 차가 맛있다며 나를 ‘팽주(烹主:차를 다려내는 사람) 전문’으로 지목한다.
어느 날은 발심하여 공부를 지극히 하고 싶은데 스님들이 찻상 앞에서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귀찮아서 지대방이나 뒤꼍에 숨으면 내 이름을 부르며 찾아다니곤 한다.
그러다 어느 날 꾀를 내어 피한 곳이 선방이었다. 선방에는 늘 좌복이 깔려 있고, 좌복에 앉아 있으면 찾지 않는 것이 절집 불문율이다. 하루 세 끼 공양을 하고 포행을 마친 뒤 꼭 차를 마시는데, 이때를 피하기 위해서 밥을 먹자마자 좌복에 턱 하니 앉아버리는 것이다. 그런 내 잔꾀에 스님들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자 더 이상 나를 찾지 않게 되었다.

 

▲ 봉암사 선원. 일반인의 출입이 일체 동제되고 있는 조계종립 특별선원


선방의 정진시간은 12시간이다. 그러나 포행시간까지 반납하고 좌복에 앉다 보니 나의 정진시간은 자연히 16시간으로 늘어났다. 잠자는 시간만 빼고 하루 종일 앉아서 참선을 하는 것이다. 참선 이외에는 달리 하는 일이 없자 밤에도 잠이 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그럴 때도 나름의 요령이 생겼다. 밤 10시에 불을 끄면 대중스님들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 조용히 일어나 가부좌를 틀고 정진을 하는 것이다.
화두가 성성하다는 것이 이러한 것인가? 그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희열이었으며 충만함이었다. 무아일여의 경지에 들어 현실로 다시 돌아오니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는 노스님들의 경험이 무얼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차를 마시는 번거로움을 피할 요량으로 시작한 일이 뜻밖의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게 겨울이 깊어 갔고 나도 깊어만 갔다.

●                   참선, 늘 여여하게 깨어 열린 삶을 가르치는 공부법 

 

 

 

 


그러던 어느 날 옆에 앉은 스님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그 동안은 법랍(출가 나이)이나 선원 경력, 몸가짐으로 스님들을 판단하여 따랐는데 보는 눈이 달라졌다. 눈여겨보지 않았던 스님들이 서서히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눈을 들어 밖을 보는데도 평소에 내가 아름답고, 추하다고 판단했던 것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눈에 보여지거나 내 가치 판단으로 평가하는 눈이 아니라 진정으로 보고자 하는 눈이 생겨난 것 같았다. 보는 것마다 아름답고 행복해 보이고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꽉 막힌 작은 선방에서 뿜어대던 열기가 밖으로 나오면서 새로운 희열로 바꾸어진 것 같았다. 우리가 평소에 보고 듣고 알았던 것들이 실은 얼마나 잘못된 착각이었는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참선은 우리가 지금 여기서 느끼는 고통에 찬 현실이 실은 실체가 없는 것임을 일러주는 공부법이다. 그 고통이 고통 아닌 행복임을 일러주는 공부이며 늘 여여하게 깨어 열린 삶을 살라고 가르치는 공부법이다.

동안거 한 철. 백 일을 오롯이 나, 참나와 만난 시간이었다. 산문 밖은 아직 잔설이 남아 있었다. 매운 바람이 백암산 골짜기를 타고 휙휙 지나갔다. 그러나 한 철 값진 양식을 장만한 나는 춥지 않았다. 숨이 끊기는 순간까지 수행은 이어질 터이나 좌복 위에 끈끈하게 묻혀 놓은 수행의 때를 생각하면 든든했다. 잔설을 뚫고 싹을 밀어 올리는 복수초 노란 꽃망울 속에 이미 봄은 와 있었다. 걸망을 지고 만행 길 나선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