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호 특집I] 산업경제의 이념과 방향

100호 특집I-오늘의 보살, 무엇을 할 것인가

2008-05-20     정병조

     [1] 현대산업경제의 한계

   현대경제는 산업화와 기계화를 바탕으로 발전하여 왔다. 재래의 가내수공업 형태에서 공업화에로의 비약이 이루어지면서 우리의 경제는 새로운 전기(轉機)를 맞게 되었다. 그 결과 소비는 미덕이라는 달콤한 유혹의 성찬이 거리낌 없이 토로되기에 이르르기도한 것이다.
   사실, 소비를 미덕이라고 강조하는 재정이론은 이미 1930년대 케인즈에 의해 주창된바 있었다. 이것은 대량생산에 의한 공급과잉을 타개하기 위해 내세운 하나의 궁여지책이었다. 과학의 급속한 발전은 원자재의 개발을 촉진시켰고, 더구나 기술의 혁신으로 말미암은 생산의 증대는 걷잡을 수 없는 물가의 하락과 경기 후퇴를 가져왔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자원이란 무진장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비록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끊임없는 과학의 발전은 새로운 대체 에너지를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과 기대가 지배적이었다. 이것은 물론 과학에 대한 맹신이 빚은 엄청난 오해의 결과였다.
   그러나 오늘날 산업경제는 전혀 새로운 국면에 봉착하게 되었다.
   첫째, 원료나 자원이 무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간들은 깨닫게 되었다.
   둘째, 모든 산업은 전산화의 추세에 밀려들고, 급기야 과학이 과학을 다스리는 비인간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셋째, 인간의 행복이 과연 물질적 풍요에만 있는가 하는 근원적 회의의식의 대두이다. 소비와 생산의 균형에만 초점을 맞추던 경제이론은 이제 퇴색하고 말았다. 생활의 편의를 추구하면서도 자연을 그리워하고, 과학의 힘을 배척하려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힘을 빌어야 하는 이율배반이 현대의 사회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떤 절대적인 힘이나 이론이나 영웅의 출현에도 감동하지 않는 불감(不感)의 중증(重症)에 걸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막연한 불안과 예측하기 힘든 미래를 응시하는 이「불확실성의 시대」를 묵묵히 걷고 있을 따름이다.
   여기에 인간 심성(心性)의 무한한 자유와 존엄성을 일깨우는 불교의 입장이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필연성이 있다. 과연 불교는 어떠한 가치관과 윤리의식을 토대로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처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이 시대의 과제일 수 있다.

     [2] 불교의 산업경제관

   현대산업경제의 치명적 모순은 노동과 생산, 소득과 분배, 그리고 인간과 기계를 이원화 시키는 이원론적 양극화의 추세이다. 산업사회는 객관세계의 모든 사물들을 냉정한 타자(他者)로 분석하고 검토하였다. 더구나 인간이라는 주관만을 강조한 나머지 모든 인간 이외의 대상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서구적 개념의 휴머니즘일 뿐, 불교적 견지의 자연관은 아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에고(Ego)를 위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가치관일 수 없다.
   불교는 동체대비(同體大悲)를 이상으로 삼는다. 나와 너를 가로막는 어떠한 몰이해의 장벽일지라도 그것은 극복되어야 한다. 그 극복을 위한 초보의 단계가 일상적 안목의「그릇된 자기」를 초월하는 일이다. 사섭(四攝)이나 사무량(四無量), 혹은 육바라밀(六波羅密)의 실천적 덕목들은 모두 나와 남과의 정당한 관계수립을 도모하는 자비행이다. 그릇된 나를 버릴 때 우리의 이원적 사고는 지양된다.
   예컨대 공장에서 기계를 다루는 숙련공이 있다고 하자. 산업사회의 안목에서 볼 때 그는 생산이라는 거대한 조직의 순환을 위한 자그마한 부속품일 따름이다. 그가 맡은 바 일에 소홀할 때 언제든지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이다. 숙련공에게는 기계나 그가 생산하는 물건에 대한 애착심보다는 얼마나 기계처럼 정확히 일을 수행하느냐 하는「기능」만이 강조된다.
   그러나 불교의 입장은 다르다. 먼저 그 숙련공에게 필요한 것은 회사와의 일치감이라고 본다. 내가 없으면 생산이 있을 수 없고, 생산이 원활치 못하면 내가 존재할 수 없다고 하는 동질성을 강조하게 된다. 자기 헌신을 통해 얻어지는 값진 노동의 대가가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하는 소박한 자부심의 현양(顯揚)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사고를 좀 더 향상시키면, 나라고 하는 존재의 가치는 일체 속에 존재한다는 초월적 상상에로까지 진전하게 된다.
   불행히도 오늘의 산업경제는 이 일원적 사고의 주입에 등한하고 있는 듯하다. 한 자루의 볼펜을 아끼는 마음, 성실한 근무 태도, 투철한 직업의식은 결코 구호나 봉급이상으로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나와 회사를 일체화시키는 불교적 교육방법의 도입이 우리의 당면과제인 것이다.

     [3] 불교의 경제윤리관

   불교의 목적은 완전한 자아의 실현에 있다. 인간의 경제생활이 하나의 수단이라면, 이 삶의 방편 또한 진실한 나를 실현하려는 불교적 의지에 맞도록 전개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불교는 부정한 방법에 의한 경제행위를 죄악시한다. 우리가 부를 축적하기 위한 자세로서 정직 · 근면 · 성실을 도모한다면 그것은 긍정적일 수 있다. 그러나 사기 · 협잡 · 효행에 의한 경제행위는 올바른 생활수단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 과보는 비록 현세에서가 아니라 할지라도 언제든지 받아야 하는 숙명으로 이해하고 있다.
   모여진 재부(財富)의 균형 있는 분배도 또한 중요한 과제중의 하나이다. 재산은 결코 나 혼자만의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소비될 성질은 아님을 강조하다. 중생을 이롭게 하는 요익유정(饒益有情)의 이상을 위하여 그것은 쓰여져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의 축적을 위하여 많은 이들의 고통과 희생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불교는 결코 재물 자체를 죄악시하는 관념적 유심(唯心)절대주의가 아니다. 오온(五蘊)이 비록 삼독(三毒)에 물들여진바 되었다 하더라도, 그 무상한 오온을 떠나 따로 대각(大覺)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추구할 이상이 있는 것처럼, 경제생활을 기반으로 하는 현실도 긍정되어야 할 대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균형 있는 생산, 절제 있는 소배, 재물의 중생을 향한 회향(廻向), 이런 것들은 결국 우리의 마음 쓰임새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기에《정명경(淨名經)》에 이르기를,「마음이 맑으면 대지(大地)가 맑아진다」고 했다. 이기와 독선과 자기 과시의 매연들이 뿜어대는 공해가 우리의 시대를 어지럽히고 있다.
   현대의 보살들은 바로 그와 같은 공해를 정화시키는 산업사회의 활력소로서 그 실력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