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호 특집I] 문학의 이념과 방향

100호 특집I-오늘의 보살, 무엇을 할 것인가

2008-05-15     이병주

   보살은 산스크리트어로 Bodhisattva로 보디살타(菩提薩陀)를 줄인 말이다. 쉽게 말해,「보디」는 각(覺)을 이루고 도(道)를 구하려는 마음, 또는「각」과「도」그것이고,「살타」는 용맹하다는 뜻이다. 즉, 용맹하게 용감하게「보디」를 구하는 사람을「보살」이라고 한다. 다시 진리를 탐구하고 체현(體現)하려는데 진지하고 성실한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된다. 그런 뜻에서, 학생이면 그 성실과 정진의 도(度)에 따라 모두가 보살로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보살이 추구하는 문학의 이념과 방향이라면 그것은 문학인이 추구하는 이념과 방향으로 되는 것이다. 진정한 문학인은 그가 신봉하는 주의와 종교가 어떠하건 보살심(菩薩心)을 가진 보살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보살을 이렇게 광범위하게 해석해야 되느냐고 반론을 일으킬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원래 불도(佛道)는 무상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인 것이다. 이를 확대하여 끝나지 않은 것이며, 이를 파고들어 추구함에 있어서 다할 수 없다는 뜻에서 그렇다.
   다만 경전의 해석에 있어서 되도록이면 선행된 스승의 준칙을 따른 것이 시간과 정력의 낭비를 적게 한다는 교훈만은 소홀히 할 수가 없다. 이를 확대 심화할 수 있다고 해서 전연 그것이 무원칙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보살이 추구하는 문학의 이념과 방향은 어떠해야 하는 것이냐 하는 것은 제기해 볼 문제이다.
   경(經) · 율(律) · 론(論) 삼장(三藏)을 전부 불교문학이라고 못할 바는 아니지만 불도는 문학이 노리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부분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고, 문학 또한 특히 현대문학의 개념에 있어서의 문학은 불도의 차원에서 벗어나는 영역을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그 합일점과 분기점을 살펴보는 것이 첫째로 중요한 일이다.
   문학은 보다 인간적인 진실, 나아가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이란 뭣일까, 이에 이르는 지혜가 무엇일까 하는 점에서 불도와 합일한다. 설혹 문학이, 인간의 행복은 끝끝내 불가능한 것이라고 증명할 경우에 있어서도 행복에의 동경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일 때 불도의 테두리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불도와 문학의 분기점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있다 불도는 반야지(般若智)를 추구한다. 반야지란 지순(至純)한 지혜를 말한다. 불구부정(不垢不淨) · 색심불이(色心不二) · 불생불사(不生不死)의 초월적인 지혜, 시방세계를 무(無)로 관조하여 영생불멸의 지혜를 정립함으로써 열반에 지복(至福)을 거는 정진적(精進的) 사상, 즉 묘체(妙諦)인 것이다.
   그런데 문학이 지향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세간지(世間智)이다. 다시 말하면, 희노애락에 집착하고 색욕(色慾) 물욕(物慾)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의 번뇌를 번뇌 그대로 긍정하고, 그 긍정 속에서 인간의 진실, 인간의 실상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따져 말하면 현대문학의 방향은 초월을 거부하고, 지순(至純)과 지복(至福)을 부인하여 망집(妄執)인물을 알면서도 그 망집을 통해 인간의 실상에 박도하려고 하는, 다시 말해 어떠한 고뇌도 그것을 인간적이란 것으로서 감내하려는, 그리고서 미의식(美意識)을 통해서만의 구제를 희구하는 일종의 비원(悲願)인 것이다.
   예컨대 불도인은 청정한 자연수(自然水)를 희구하고, 문학인은 유독한 술잔을 든다. 불도인의 목표가 묘체에 있고, 문학인의 목표는 망집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저 비원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럴 때 현대의 보살은 어떠한 문학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
   세간지를 섣불리 극복하려 들지 말고 끝끝 세간지의 양상과 내용에 집착하여 그 극한에서 묘체를 얻도록 하는 미적(美的)인 공략이 있을 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진여(眞如)의 상황을 증류수에 비교한다면, 증류수를 얻기 위해선 물을 비등케 해야 하는 것이다. 이 비등의 절차에 있어서, 반야지를 향한 정진과는 달리, 망집에 스스로를 불태우는, 그 불길을 이용해야 된다는 뜻이다. 즉 정진을 통해 스스로를 진여의 각자로서 온존하는 방법을 택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연료로 하여 스스로는 재가 되고 진여의 일례(一例)만을 남기는 살신(殺身)의 이법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그러지 못할 때 보살은「무상심심미묘법」을, 그것이「무상(無上)」인 까닭, 그것이「심심(甚深)」한 까닭, 그것이「미묘법(微妙法)」인 까닭을 감동적으로 묘사하는 설화(說話)문학을 노릴 뿐이다.
   그러나 지금 시대는 불법을 가장 필요로 하면서도 불법과는 멀어져 가는 애타는 사정에 있다. 이 애타는 사정에 불법만으로 대처할 순 없다. 인류를 일시에 파멸시킨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 시대에 앉아 물법의 홍통(弘通)만을 기다릴 순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날카로운 비판으로서의 문학이 등장해야만 한다. 현대의 보살이 추구하는 문학은 이 임무를 감당할 각오를 가져야 마땅하다.
   불법이 그 자체를 위해서도 불법 이외의 방법을 요구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느끼고, 보살은 스스로를 희생할 각오를 다져야 한다. 그러지 못하고선, 오늘날의 의미에 있어서의 문학을 보살과 결부하여 문제 설정할 필요가 없다고 나는 통감하는 것이다.
   그 문명비평의 첫째는 철학비평이다. 서구의 철학이 오늘날 세계관으로선 파산지경에 있다는 것은 그들 자신이 고백하고 있는 그대로다.
   유심론(唯心論)은 과학의 발달에 의해 빈혈상태에 빠져 있고, 유물론은 유심론적인 원로가 없으면 그 결론을 감당 못할 처지에 놓여 있다. 이러한 철학의 생리와 병리를 조명하는 역할이 불교의 철학이 되어야 할 것이며, 그러한 능력을 충분이 갖추고 있는 것이 또한 불교이다. 그 심심한 지혜를 사장해 둘 것이 아니라, 서양의 방법을 대담히 섭취하여 현대적인 체계로 정비하여 이윽고 서양철학을 구제하는 노력이 시급하다.
   불교적 문명비평의 다음은 과학비판이다.
   인류의 행복과는 동떨어진 거리로 독주하고 있는 과학을 어디까지나 인간의 행복을 중핵(中核)으로 해서 비판적으로 그 궤도를 수정해야 할 책무가 불교에 있다.
   이렇게 볼 때 보살의 문학은 이러한 책무의 이행을 내내 대외적으로 자주 고무하는 작용이 될 수밖에 없다.
   다시 거듭하거니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지 못한다면 보살과 문학과를 굳이 결부시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병주(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