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호 특집I] 교화(敎化)의 이념과 방향

100호 특집I-오늘의 보살, 무엇을 할 것인가

2008-05-14     월주 스님

     [1] 현세주의(現世主義)와 보살도(菩薩道)

   현대가 지닌 특성 중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삶의 원리가 유동적인 점일 것이다. 모든 것이 전환하기 때문에 삶의 목적이나 의의에 있어서 뚜렷한 이념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유동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확고한 원칙이 서 있지 않은 시대가 바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인 것이다.
   이와 같은 현대의 특성을 가리켜「불확실성의 시대」,「전환의 시대」라고 역사학자들은 표명하곤 한다.
   현대 속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꼭 이렇게 살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확고한 신념이나 주장이 없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그저 막연하게 살아가고 있다. 선비들과 같은, 가문에 오명을 남기지 않기 위해 청렴하고 강직하게 살고 가겠다는 삶의 지표도 없다.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평범하고 탈 없이, 물질을 축적하며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가면 그만이라는 정도의 인생관과 가치관만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은 현대인들의 삶의 모습은 곧 현대문명이 지닌 현세주의에서 기인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대문명을 기계 · 물질 · 과학 문명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기계나 물질이나 과학 따위가 인간을 제쳐 버리고서 현대문명의 성격을 결정하는 데에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는 셈이다.
   기계 · 물질 · 과학 따위는 모두 현세주의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내세나 영원이나 죽음에 대한 문제를 생각할 수 없이 인간들을 현세주의화시켜 버리고 말았다. 완전할 정도로 현세주의에 물든 인간들은 현대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영원이나 내세에 대한 문제를 현대문명에서 거의 소외시켜버리고 말았다. 내세나 영원이나 죽음의 문제가 소외당해 버렸다는 말은 곧, 인간의 삶의 원리와 구경(究竟)에 대한 연구를 없애 버렸다는 것과 같은 맥락에 서는 것이다.
   우리들 인간의 생명의 끝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완전히 소외시켜 버리고, 어떻게 하면 물질을 많이 모으며 어떻게 하면 더욱 편하고 쉽고 만족스런 삶을 살 것인가 하는 방향으로만 계속적으로 쏠려 나가는 것이 현세주의가 지향하는 현대문명의 속성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삶의 끝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그 어떤 현대인들보다 월등하게 우수한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살아가면서도 불안을 느끼고, 인간실격을 스스로 감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불교인은 현세주의가 지니고 있는 이와 같이 무서운 병페점을 깊이 인식해서, 오늘이라는 이 시대 속에서 문명의 이점을 살리는 실제를 기반으로 하여 그 위에 삶의 구경에 대한 깊은 연구와 수행을 통해 확고한 어떤 원리를 엮어내어 대중을 교화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사명감을 지녀야 될 때라고 생각한다. 만일 오늘을 사는 불교인들이 이 현세주의의 사조에 휩쓸려 삶의 원리를 확고하게 마련하지 못하고 유동적인 원리에 편승하여 부유(浮遊)한다면 불교의 앞날은 기약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현대문명이 소외시켜 버린 삶의 구경에 대한 가장 완전한 비전인 보살도를, 현세주의의 풍미로 광란하고 있는 실제 속에 불어 넣어야 하는 것이다.

     [2] 보살이 추구해야 할 교화이념

   보살은 불도를 닦아 보리를 구하고 아울러 뭇중생을 교화하는, 부처님 다음가는 지위에 있는 성인을 말한다. 또 교화라는 것은 불법으로 사람을 가르쳐서 선심(善心)을 가지게 하는 것을 뜻한다. 이념은 이성으로부터 얻은 최고의 개념으로 온갖 경험을 통제하는 주체를 뜻하는 말이다.
   승보(僧寶)이신 수승한 스님들이 온갖 경험으로부터 얻은 최고의 개념을 주체적인 사상으로 삼아 사람들을 가르치고 이끌어서 착한 마음을 갖도록 노력하는 것이 곧 보살이 추구할 교화의 이념이요 방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성으로부터 얻은 최고의 개념으로 온 경험을 통제하는 주체인 이념 가운데에서 가장 완전한 것은 보살의 이념일 것이며, 그것은 곧 보리로부터 얻어지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보살이 추구할 교화의 이념」을 성도(成道)하신 후 취하신 부처님의 행적 속에서 정확하게 볼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6년간 공부 끝에 도를 이루신 후 당신과 가장 인연 있는 중생 5비구를 맞아 먼저 21일간의 가르침을 폈다. 그때의 말씀 내용이 저 유명한 화엄학(華嚴學)의 내용이다. 그러나 5비구는 그 내용을 받아 간직할 능력이 없었다. 부처님은 그들이 당신이 하신 말씀의 내용을 알아듣지 못함을 보시고 곧 열반에 드시고자 했다. 그러나 중생을 저대로 그냥 버려둔 채 당신 혼자서만 열반에 드는 일이 온당치 못함을 느끼시고 다시 교화하실 뜻을 세우셨다. 그리고 말씀의 내용을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다시 설법의 문을 열었다. 그것이 곧 아함부 12년, 방등부 8년, 반야부 21년, 법화부 8년, 도합 49년 설법이다. 보살이 추구할 교화의 이념은 바로 부처님이 49년 설법하신 그 모습에서 찾아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교화하실 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으셨으며, 오직 사무치게 간절한 마음으로 너 나를 구별하지 않으시고 간절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셨다. 그 마음에서 교화의 이념을 찾아야 마땅하다. 문제는 오늘에서의 보살의 위상이며, 오늘의 보살이 과연「부처님의 간절한 마음」에 버금가는 간절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사무치게 간절한 마음」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처럼 간절한 마음을 갖기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안다. 더욱이 이념이나 진리를 향해 열리는 마음이 그토록 사무치게 간절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범부중생의 마음 가운데서 사무친 마음을 찾자면 그래도 연심(戀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 연심이 몇 년을 가고 몇 달을 가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면 쉬 비유가 되는 내용의 것이다. 항차 진리나 이념을 향해 열리는 마음이 12년, 8년, 21년, 또 8년, 이렇게 간절하고 간절하게 변함없이 계속해서 열릴 수 있을까.
   끝으로 적고 싶은 것은 재가신도 가운데서 포교능력이 있는 사람을 발굴하여 그들로 하여금 포교일선을 지키도록 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되겠다는 점이다. 그리고 수도가 다된 후라야 교화에 힘쓴다는 종래의 일반적인 통념을 버리고 수도와 교화를 병행해야 되겠다는 점을 강조해둔다. 
   또 오늘의 보살은 세상을 구체적으로 많이 알아야 하고, 몸소 시정(市井)에 뛰어 들어 실천하는 행동적인 보살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땅에서 현세주의를 추방하기 위해서는 산상(山上)에 앉아 있는 보살들이 시정으로 내려와야 하며, 물질과 기계로 오염된 현대인들의 가슴을 법음(法音)으로 세척해주지 않고서는 교화의 이념과 방향은 모색되기가 힘들으리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