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호 특집I] 현대의 보살도(菩薩道)

100호 특집I-오늘의 보살, 무엇을 할 것인가

2008-05-13     이기영

   산업사회라는 현대에 들어 왔다고 해서 보살도 자체에 무슨 변화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원리원칙에는 변함이 없다. 보살은 여전히 모든 불자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삶의 과정이요, 그 보살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의 절실한 자각적 이타행(利他行)의 원이 있어야 하고, 그 생활의 패턴으로서는 십바라밀이 있다.
   인간이 사는 세상은 그 먼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 앞으로 올 미래에 있어서나 인연 따라 이뤄지는 변화무상한 것이다. 지금은, 그리고 미래는 예전과 달리 고도의 과학기술이 발전, 각 방면에 응용되고 또 국제간의 교류가 옛 이웃마을 사이의 관계보다도 더 가까워져, 좀처럼 옛날 암흑시대의 인습이 채 사라지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뒤따라가기가 힘들 정도로 너무 앞질러 가기 때문에 저 변하지 않는 원칙들을 잘 적용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따름이다.
   나는 감히 지난날을「암흑시대」라고 표현해 놓고 이에 대한 나의 소감을 약간 말해야겠다고 느꼈다. 생각해 보면 오늘 우리네 텔레비전에 자주 등장하는 옛날 갓 쓰고 망건 쓰고 상투 틀고 씨받이가 어떻고, 암행어사가 어떻고, 사또가 어떻고 하던 시대는 암흑시대라 할만도 하지 뭔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봉건적이라 할 수 있는 낡은 인습에 얽매어 눈이 떠 있어도 인생의 앞이 안 보이는 그런 시대, 반야의 지혜가 없는 무명의 장야(無明長夜)가 암흑시대가 아니고 무엇인가?
   불교를 알고 보살의 길을 간다는 것은 말이나 형식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나는 요새, 바깥이 저렇게 환하게 밝아진 과학기술문명의 시대에도 무명의 장야 속에서 헤어날 줄 모르는 「불교신도」들이 있는 것 같아 암흑시대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이 시대에 남아 있구나 하는 느낌을 갖는다.
   불교는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다. 한 인간이 불교를 믿으면 그 인간의 모든 생활의 구석구석이 밝아져야 할 것이다. 불교가 하나의 등불이기 때문이다. 빛이 우리 안에 생겨 우리 자신들의 생각과 말, 행동을 밝혀 줄 때, 우리는 불교를 제대로 믿고 따르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그 빛이 무엇인가? 어디서 생기는가? 옳게 생각하고 옳게 판단하고 결심하고, 올바른 생활을 믿고 가는 마음의 힘, 이것이 빛이다. 그런데 평소에 복이나 빌다가 돈이 계속 잘 벌린다든가 감투가 계속 유지된다든가, 기타 집안에 별 환난이 없을 때에는 다 부처님 보살님 덕택이라고 가서 엎드려 절하고 그 신심을 온갖 요란스런 방법으로 과시하다가, 일단 무슨 인연소치로 어려움을 당하면 쉽게 무너져 걷잡을 수 없는 비탄과 실의에 빠져, 지난 날 그렇게 호언장담하던 신심이 하루아침에 산산조각이 나, 불교, 또는 부처 믿어 보아야 소용없다고 갑자기 도끼를 들고 안방으로 쳐들어가는 격의 후레자식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이것이 무명의 장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불교를 잘못 가르친 책임, 잘못 배운 결과가 서서히 이런 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불교란, 아니 보살도란, 시주하는 금액의 다과로 그 신심과 효용의 정도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반야지혜를 그 스스로 얼마나 온전하게 실현했느냐 하는데 따라 그 사람의 불교 신심, 보살로서의 자격, 그리고 이에 따른 공덕의 실효가 나타나는 것이다
   현대가 옛날 불교전성시대, 정법이 봉행되던 시대와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현대의 사람들이 너무나 불교를 모르고 기복적 미신의 분위기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이와 같은 오늘날 정세는 반드시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른 산업사회의 특징 때문에 생긴 경향만은 아니다. 아직도 전근대적인 인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생활의식이 팽배하기 때문에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는 옛날 원효대사가 하시던 말씀도 그 다를 이야기하면 알아듣지 못하고 따라서 그 일부 쉬운 것만을 이야기해야 알아 들을까말까 하는 상태가 나타난다.
   보살영락본업경이라는 보살도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경에 원효대사가 주석을 붙인 것이 있다. 이것이 신라통일을 이룩한 당시의 엘리트들의 생활의식의 기본이 되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는데, 거기에 보살의 첫 걸음으로 스물네 가지 원(願)을 발하고, 그 원의 달성을 위해 신명을 바쳐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뭐니뭐니해도 보살도의 기본은 반야바라밀다에 있다. 원효대사는 이 보살영락본업경의 십바라밀다를 십반야바라밀다라고도 부르고 있는데, 이는 십바라밀다의 기본이 반야바라밀다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같은 본업경의 스물네 가지 원 가운데에서도 그 일관된 철학은 역시 반야바라밀다이다.
   진정한 지혜의 완성, 이것이 제일이라는 의식, 그리고 그것을 위한 부단한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불자나 보살이 될 수 없다. 그 지혜의 완성을 향한 신념과 결심과 노력이 현대의 보살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엇보다도 귀중한 가치가 되는 것이다.
   감투나 재물이 떠나갔다고 하자, 그것 때문에 실의와 좌절에 빠진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옹졸한 사람,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다. 여태까지 무엇이 가장 귀한 가치인가를 잘 몰랐다는 이야기밖에는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차피 한번은 죽어가게 마련이다. 그것을 잊어버리고 매일 통곡으로 지새고, 나아가 부처님을 원망하고 불법을 비방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정말 구제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반야심경을 왜 외워왔던가?
   어디 이 세상에 언제나 내 것이라는 것,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변하지도 않는 그런 내 것이란 것이 어디 있던가? 잘못 생각해 온 것이다.「오법연성(悟法緣成) 멸계상심(滅計常心) 오상대법(悟相待法) 멸계아심(滅計我心)하라」고 했다. 앞서 말한 스물네 가지 원에서는,「……모든 현상, 사물이 다 연(緣)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항상 변하지 않고 남아 있다는 생각을 없애라. 또 나라는 존재 그것이 서로 다른 것,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관련으로 빚어진 현상임을 깨닫고, 나, 나 하는 생각을 없애라. 해상속가(解相續假)하고 멸계단심(滅計斷心)하라」라고도 하였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허무가 아니다. 끊일 줄 모르게 이어지고 또 이어진 복잡한 인연, 잠정적이며 변화무상한 것이기는 하나 허무가 아닌 현실, 그 현실을 허무로 돌리는 생각을 없애라.
   철저하게 무아(無我)라는 사실, 무상(無常)이라는 사실 고(苦)와 공(空)이라는 사실을 알고 평소부터 그렇게 대처해 나가는 정신의 훈련이 보살되고자 하는 초발심자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리고 허무에도 떨어지지 않는 일, 무애한 연기(緣起)를 이룩해 가는 일, 인과의 도리가 빚어내는 갖가지 현상의 비밀을 알아내는 지혜, 이것들을 키워가는 것이 올바로 보살의 길을 가는 소치가 되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일이 다 반야바라밀다를 실천하는 가운데에서만 이루어진다. 보살도, 그것은 결국 반야바라밀다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