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호 특집I] 오늘의 보살 무엇을 할 것인가?

2008-05-13     광덕 스님

     [1] 보살의 근본 성격

   보살은 불교의 꽃이다.「깨달음」이 지니는 진실과 아름다움을 스스로 실현하고 역사 위에 구현한다. 흔히들 보살을 일컬어「위로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한다」고 하며, 또는「중생을 깨닫게 한다」는 등 여러 말을 하나, 보살의 근본인 즉, 역사적 현실 속에 각성(覺性)을 확립하는 것이다. 위로 보리를 구한다고 하나 이것은 자성청정을 드러내어 확인하는 것이고, 하화중생이란 만행(萬行)을 전개하여 만행 속에서 자성의 청정을 보는 것이니, 이런 점에서는 구법(求法) 만행이 한 가지 구도의 길이고, 향상(向上) 향하(向下)를 나누어 볼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보살의 만행은 보다 깊은 측면이 있다. 오로지 중생과 세간의 완성을 향하여 순수하게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중생과 세간의 청정과 진실을 이루기 위하여 온갖 방편을 전개 한다.
   거기에는 혹은 약을 주고 혹은 양식을 주며, 혹은 집을 주고 혹은 지혜의 길을 열어 보인다. 필경 고난과 타락과 미혹으로부터 인간과 역사를 구원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보살의 본령이라 할 것이다. 
   큰 믿음이란 자신과 일체 중생의 본래면목이 여래 각성임을 믿는 것이며 동일법성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일체 중생과 세간을 밝히고 윤택하게 하고 완성으로 이끌기 위하여 전개하는 모든 행은 이것이 자기 본성의 묘용(妙用)인 것이다. 자신의 진실을 일체시 일체처 일체사에 드러내어 운용한다. 그러므로 보살도를 행한다 하나 행함이 없고, 보리를 구한다 하나 구함이 없고, 세간의 밝음을 향하여 헌신한다 하나 헌신하는 바가 없다
   또 이와 같은 보살의 행은 끝이 없다. 목적이 없다. 법성 생명이 영원하듯 보살의 활동 또한 영원무궁한 것이다.

     [2] 보살은 인간 수호자

   그러면 오늘의 보살은 어떠한 것일까? 현대 보살업의 핵심은 무엇이라 할 것인가?
   원래로 보살은 그 본질이 인간과 역사 위에 각성을 확립하는 데 있었다. 이 점은 현대에 있어서 조금도 다를 바가 있을 수 없다. 각성인간을 신앙하고 그 인간의 확립을 역사적 현실 위에서 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모든 인간은 그 본성이 각성임을 뜨겁게 신봉하고 그를 존경하며 각성의 여지없는 발휘를 돕는다. 그리고 개인적 또는 사회적으로 온갖 비인간적인 요소를 제거한다. 그리고 나아가 인간을 둘러싼 온갖 사회적 사상적 환경에서 각성 본분에 입각한 법성 질서의 실현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신성과 그 권위와 창조적 위덕을 여지없이 발휘케 하고 역사와 환경을 법성질서로 이루어 가는 것이다.
   오늘의 보살을 이런 점에 서서 볼 때 보살은 인간의 옹호자며 진실생명의 육성자며 인간을 위한 역사와 문명의 보존자라고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법성생명을 가꾸어 가는 보살은 우리에게 닥쳐오는 수많은 장애요인을 경계한다.
   첫째는 인간 개개인의 무관심과 안이성과 몰각적 경향이다. 나날이 무사 안일에 탐닉하여 죽음과 불행이 끊임없이 넘실대는 일상현실에 대한 인식이 없고 극복 의지가 없다. 보살은 이에 대하여 무상(無常)과 고와 죽음의 현실을 일깨워 준다.
   둘째는 유물론적 사고방식의 범람이다. 물질만이 생을 지탱하고 행복을 결정하는 지상가치로 보고 물질 추구에 광분한다. 이런 사상의 물결은 우리의 생이 물질 확보와 지배로써 연장되고 안정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그를 추구하게 된다. 보살은 이러한 물량이 원래로 공허하며 생명 방향을 그르치고 인생에 투쟁과 허무를 가져옴을 증언한다.
   셋째는 정신적 육체적 고난이다. 자연적 재난도 있고 사회적 재난도 있으며, 인위적 고난도 있다. 그중에서 공해와 전쟁은 인간에게 있어 파멸적 고난이다. 보살은 이에 대하여 지혜의 길을 열어 보이고 희망의 창구를 열어 주며, 또한 함께 울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몸부림친다. 그리고서 마음의 눈길을 근원으로 돌이킬 것을 가르치는 동행자(同行者)가 된다.
   넷째는 환락주의며 관능주의다. 인간이 육체이며 물질이며 자연종속자이며 수많은 변화 속의 유한자임을 아는 범부들이 오직 고에서 벗어나려고 환락으로 빠져든다. 찰나적 환락으로 자신을 몰아넣고 고와 불안에서 도피하며 망각을 기도한다. 보살은 이에 대하여 관능주의가 보다 큰 공허의 늪을 장만하는 것임을 일깨워 주며 웅혼한 자기 본성에 착안하고 꿋꿋하게 청청 자아를 가꾸어 갈 것을 밝혀 준다.
   다섯째는 사회 제도가 문제다. 인간 진실을 보지 못한 그릇된 인간 긍정을 목적하는 사회제도이거나, 야망을 무장한 사회가 인간의 신성과 권위와 존엄을 위해한다. 오늘날 세계 각국,온갖 사회에 벌어져 있는 수많은 제도는 이것이 인간 신성과 가치를 개방하고 제고하는 관점에서 비추어 볼 때 심히 위험스러운 점이 있다. 특히 인간성을 도외시한 교육이나 문화나 체제는 역사를 인간이 외출한 괴물로 바꾸어가는 것이다. 보살은 이 점을 고발하고 인간 신성을 보장 조성하는 사회제도인가를 끊임없이 조명한다.
   오늘날의 물량주의, 기능의주의 사회 풍조가 인간을 생산에 예속시키고 향락의 도구로 치닫게 하여, 물질과 능률을 가치의 왕좌에 올려놓으려 하는 경향을 보살은 슬퍼한다.

     [3] 보살이 가는 길

   보살은 본시 인간을 옹호하며 인간성을 수호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보살은 현대사회가 몰고 온 인간에 대한 온갖 위협에 대응하여 인간과 인간을 위한 역사와 문명을 지켜야 한다.
   부처님의 대자 무애위신력이 법성 생명에 충만함을 깊이 믿고, 그 위덕이 영원히 현전함을 확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보살은 그 마음을 청정히 하여 자신과 국토를 장엄함을 근본으로 한다. 그리고서 인간의 옹호자로 행동하는 것이니 그것은 첫째 자각운동으로 나타난다. 온 중생 모든 생명이 법성진여임을 자각하고 그 신성과 권위와 능력을 자각하고 발휘할 것을 추구한다.
   둘째는 청정자성을 은폐하고 위협하는, 온갖 사상적 사회적 시설을 제거하고 신성인간의 사회적 보장에 관심 둔다. 가치를 밖에 있는 것으로 보거나 안이나 무궤도한 편의주의를 배격하면서 인간의 참된 성장과 가치 충족에 헌신하는 것이다.
   화엄경 보현행원품에는 여래 공덕이 무한함을 말씀하시고 그 공덕을 이루는 방법으로 열 가지를 말씀하고 있다. 예경 · 찬탄 · 공양 · 참회 · 수희 · 청법 · 청불 주세 · 수학 · 수순 · 회향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중 수순장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중생들에 수순하여 가지가지로 섬기고 공양하기를 부모나 스승이나 부처님과 다름없이 받들되, 병든 자에게 의원이 되고 길 잃은 자에게 바른 길 가리키고 어두운 밤중에 광명이 되고, 가난한 이에게 보배를 얻게 한다.』
   보살은 이와 같이 일체 중생을 이익하게 하는데, 그 방편은 실로 무한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중생을 이익하게 하는「이익」의 내용이다. 병든 자에게 약을 주는 것이 이익이기는 하나 그는 필경 죽는 것이 아닌가. 가난한 자에게 떡을 주는 것이 이익이나 떡을 수미산처럼 주었더라도 그는 필경 죽는 몸이 아닌가. 그러므로 저를 참으로 이익 되게 하자면 약과 떡 외의 죽지 않는 법을 주어야 한다. 이에는「감로법」이야말로 약이나 떡으로 비유될 수 없는 결정적 이익이 된다.
   이점을 생각한다면 오늘의 보살이 온갖 구호 사업이나 사회복지 사업이나 문명비판이나, 기능 교육이나 정치나 산업경제 등 그 모두가 인간을 구하고 세간을 밝히는 보살도가 아닌 것은 아니로되 법을 열어 보리심을 발하게 하는 것이 최상의 길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불교 주변에는 사화 참여의 소리가 요란해진 지 오래하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보살은 원래가 인간 수호자요, 역사 옹호자요, 세간의 등불이 아닌가. 사회 참여의 목소리는 보살도의 보다 적극적인 전개를 목마르게 구하는 소리로 들리는 것이다.
   결론을 말하면, 오늘의 보살은 정법을 선양하여 개인적 자각이나 사회적 시설로 무지와 빈궁과 불의와 전쟁을 억제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조국과 세계에 평화를 싣고 겨레와 인류의 신성을 지켜가는 지혜와 양심의 공여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 땅 끝까지 법등을 밝혀 주는 것으로 핵심을 삼아야 한다. 보살은 필경 각성의 체현자로서 진리의 실현자요, 자비의 보전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