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문학] 서정주의 시 세계

불교와 국문학[6]

2008-04-10     김해성

  「연각(緣覺)」은「각독(覺獨)」과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다. 각독은 타의행심(他意行心)에 의타치 않고 독력으로 오각오득(悟覺悟得)하므로「각독」이라 한다.
   독력(獨力)의 세계는 곧 시(詩)의 세계와 동일성을 가졌다.
   그러므로 시와 독각―시와 독력은 어떤 대상이 없고 자력으로써 외연(外緣)을 보며 도리[道理: 내연(內緣)]를 깨달음으로 연각하는 순간―시와 대화한다.
   시와 독각은 위상(位相)을 같이 하며, 위좌(位座)를 같이 하고, 승중합화(僧衆合和)와 수행증득(修行證得)과 무사독오(無師獨悟)가 꼭 같은 도정에 선다. 시인의 독오와 영감작용은 이러한 외연과 내연의 수신수심(修身修心)없이는 불가능하다.
   진선미(眞善美)의 종합체와 시적 감응이란 언어와의 거리감을 절연(絶緣)하며 시작에서 종위(終位)까지 단독으로 수행을 하는 범주가 일상(一相)을 가린다. 곧 시의 대상은 묘리(妙理)의 근원에서 시시로 발하고 있으며 이 발아(發芽)는 시의 발심(發心)과도 같은 상각(相覺)이다.
  
     내 마음속 우리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가네.
     <동천(冬天)>전편

   <동천(冬天)> 작품은 아주 편상적(片想的)인 시상을 영원과 순간의 찰나에 조화―상화(相化)한 작품이다. 편상적인 시상의 작품은 비교적 단상적(短想的)인 자아(自我) 군소리 아니면, 철학적인 신묘(神妙)스런 언어의 나열에 빠지기 쉽다. 특히 현대시의 창작과정에서는 이러한 작품구성의 언어군이 많음은 한국시는 물론 세계적인 시단에서도 왕왕 있는 작역(作域)의 예임을 볼 수 있다.
   인간의 일체미에서 얻는 현색계(顯色界)와 형색계(形色界)와 묘촉계(妙觸界)와 공봉계(供奉界)는 곧 자연과의 조화―화목심(花木心)과의 조화―시공(時空)과의 조화가 있어야만 교묘한 시심의 개안(開眼)을 얻을 수가 있다.
   정주(廷柱) 시인의「시관」은 한 마디로 오정심관(五停心觀)과 사색계(四色界)를 완전히 퇴치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정주 시인의 시세계를 흔히 비평가들은 한 마디로「신라정신」또는「연화구경세계(蓮花究境世界)」―또는「불심세계(佛心世界)」등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정주 시인의 시작품의 언어 속에서 불교적인 용어는 찾아 볼 수가 없을 만큼 현대어의 결집이다.
   <동천(冬天)>의 세계를 살펴보면, 순수한 동양적인 천(天)이며 한국적 무(無)요「선(仙)」의 세계다. 자기수행의 진실에서 얻은 시적 체험의 발로라고 볼 것이다.

     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운 눈썹을

  「내 마음 속」은 곧 정관(靜觀)하는 세계의 어느 한 점에도 의지하는 일 없이 오직 자아독력(自我獨力)의 수행에 있다면 자아는 분명 개안된 생명의 진수가 파악되어 가고 있는 자아관을 말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불심의 어느 경지에 가면,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있고 죽은 것도 산 것이며 산 것도 죽은 것이 될 수 있다.
  「우리님의 고운 눈썹을」은 내가 아닌 타아―곧 중생―아니면 부처님을 지칭하는 의미인「우리님」과「고운 눈썹」은, 정관하는 묘리 속에서 순간의 달각(達覺)의 표상으로 표출된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만해(萬海) 시인의「님」관과도 어느 정도 통하는 님관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사랑하는 인간의 님만 님이 아니며 생명을 가지고 있는 일체의 몸가짐을 가진 것들을 인간―자연―사물 등을 의미한다고 볼 때 정주 시인의「님」관을 만해시인과의「님」관과 동일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주 시인의 여기 <동천>에서의「님」은 동짓달 기둘고 있는「월명상관(月明像觀)]」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 세상에는 존재할 수 없는「님」의 고운 눈썹은 밝은 눈썹 같은 초생달의 표상으로 시전(詩田)에 다 밝게 비추며 서역 삼만 리 길을 닦고 가는 반달―월명상관으로 본다.
   다시 말해서 불교의 삼천실상이 현상의 세계에 비친 시인의 시적 감정에 이입된 고운 미적 개안의 유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즈믄 밤의 꿈으로」는 심연의 세계인 꿈의 미개지에서 환상의 표정―현실과 무소부재(無所不在)―무와 유의 조화 -등으로 꿈에서도 월명(月明)의 상은 계속 시인의 심전(心田)에 표상화되고 있다.
   이 꿈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꿈의 세계와는 다르다.
   정주 시인의 꿈의 세계는「프로이드」가 말하는 현상학적 의미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시적 진실의 원형 속에서 재현되는 옥경(玉京)과 극락의 환상적 세계이다.

     선운사(禪雲寺) 고랑으로
     선운사(禪雲寺)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 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읍니다.
     그것도 목이 쉬여 남았습니다.
     <선운사(禪雲寺) 동구(洞口)밖>전편

   정주 시인의 정토, 불심불전(佛心佛田)에 자리를 잡고 있는 증득(證得)은 여기에 육행(六行)으로 구성된 <선운사(禪雲寺) 동구(洞口)밖>을 시화했다고 본다.
   선운사는 전북 고창군 서해 변에 있는 선경지(仙境地)로 알려진 경치 좋고 고승의 수도처로 이름 나 있는 절이기도 하다.
   정주 시인은 이 고장에서 태어난 시인이다. 소년 시에 이 시인은 한 때 이 사원에서 초발심을 증득한 기연(起緣)이 전입전연(轉立轉聯)한 수행지이다.
   또 정주 시인이 같이 일생을 불심불전에 시심을 가꾸고 있는 근원지도 바로 선운사의 정토라고 볼 수 있다.
   정주 시인의 일심삼관(一心三觀)의 묘리를 관득(觀得)하는 데는 정좌(靜坐)하여 선정(禪定)에 정립하는 선정삼매(禪定三昧)를 심경(心境)에 들어 관심(觀心)의 묘리(妙理)가 체득되는 것이다.
   삼매를 범어로 정(政), 등등(等等), 또는 조직정(調直定), 정심행처(正心行處)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제심일처(制心一處)라는 의미이며, 인간 주변에서 밤낮으로 일어나는 천변만화의 잡념을 버리고 정념일념의 절대한 법성을 주재케 한다.
   이런 삼매의 실천을 수행정진해온 정주 시인의 삼매경은 심산수행 아닌, 속세와 사회와 역사와 현실과 현시관 속에서 진각적(眞覺的) 삼매를 성취한 시인이다.
   삼매법은 한 수행기간을 90일로 하여 수행한 승법수행과는 달리 일생을 두고 점진적으로 발원지를 개안하고 있다.
   정좌(靜坐)를 사암불전에서만이 정적(靜的)으로 지혜를 발하여 실상(實相)의 이(理)를 찾는 것이 아니고, 속세의 부단한 시궁창 속에 피는「연화경지(蓮花境地)」의 정신으로 관조하여 시작품의 저류에 흐르는 시정신으로 발아되고 있다.
   또 시관을 일념의 법성에 일치케 하여, 능연(能緣) 즉 무명(無明)에 의하여 귀상(鬼像)도 불상으로 관하듯 속세의 속된 자연과 인간사와 만물에 대한 상진삼매(常塵三昧)로 정주 시인은 시관을 닦은 신구의(身口意)의 발로가 <선운사(禪雲寺) 동구(洞口)밖> 같은 시경을 조성했다.
   이 조성은 불심의 내용인 실상묘법은 중생심 내의 묘법에 화합화동하는「일실감응(一實感應)」이 선운사의 시감동이다.

     선운사(禪雲寺) 고랑으로
     선운사(禪雲寺)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불심불전의 고랑을 찾은 시적 삼매는 선운사의 감응을 시로 이입케 했다. 흰 구름 속에 훈훈한 남풍을 안은 동백꽃은 인지상(忍志相)을 의미했으며「보러 갔더니」의 일심삼관(一心三觀)의 일체가 곧 시적 진실로 유동케 되었다.
  
     심심불(心心佛)이요 처처불(處處佛)이며
     처처불(處處佛)이요 심심불(心心佛)이니라

하는 불(佛)의 무소부재인 고랑은 어느 곳에 또 가능한 수행발심지(修行發心地)이다.
   정주 시인의 선운 동백관(冬栢觀)은 수십 년 만에 가보는 행이라고 보아도 좋고, 영원과 순간의 교접에서 보는 옥경 같은 고랑이나 극락 같은 고랑으로 보아도 좋은 것이다. 

     동백꽃은 아직 피지 않았고

   기다림의 용서와 발아의 명광(明光)을 화심(花心) 둘레의 원지(圓地)의 법열(法悅)이 해탈되지 않는 상태―곧 발화(發花)의 기다림을 관망하는 시인의 제심일처(制心一處)를 증득해보려는 것이다. 
   이것은 각의삼매(覺意三昧)의 한 순간 오도상(悟道相)을 시간을 초월하는 조요(照了)하는 상태다.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읍니다

   불가의 칠정사고(七情四苦)의 수행수심이 깊은 어느 정각시관(正覺時觀)은 처처불심의 한 구원실성 이후 화합상성(和合相成)하는 생멸기복(生滅起伏)이 현상만물의 신명작용(神明作用)이다.
   법계중생은 제천선신과 화합귀일하는 법계관 속에 인간의 만행은 어느 경지에 다다르면 주도(酒道)의 도관을 정립할 수 있다.
  「막걸릿집 여자」는 한 중생의 고해에서 헤매는 인간상―현실을 직관하는 데 무지중생을 교화하는 중생 중의 보살이다.
  「육자백이 가락」은 향토정신을 화현 본토에서 육성하는 의미로 볼 수도 있고,「한 전통미의 시화정신」속에「애조미」까지 조화합성시켰다.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읍니다」의「오히려」는 관미(觀美)의 발원세계(發願世界)다. 이 발원세계의 한 관미의 결정체를 표출시키며「남았읍니다」는 어떤 실상의 일상이 견시견각(見視見覺)할 순간적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작년 것」은 유동상태의 유심실상(唯心實相)을 묘법에 의한 고관적(古觀的) 의미로 곧 윤회전상(輪廻轉相)의 대자연과 인간상을 표상화했다고 본다.

 

서울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