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의 불교신앙] 인간 관계의 기본 원리

직장인의 불교신앙

2008-04-09     김경만

     [1] 원증회고(怨憎會苦)

   직장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일하는 곳이다. 같은 직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모두 성격이 같을 수만은 없다. 그 성장 과정과 가정환경과 생래의 능력과, 그리고 성격 등이 모두 다른 사람들이므로 그들 사이에는 자연히 마찰이 안 일어 날 수 없다. 싫은 사람과 함께 지내어야 하는 일, 이것은 분명히 큰 괴로움이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원증회고라고 지적하신다. 그리고 이 괴로움은 인생의 여덟 가지 괴로움[8고(八苦)]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니 우리에게 있어서 무척 심각한 일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2] 아랫사람이 미울 때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내 아랫사람일 때가 있다. 그럴 때에는 그 싫은 마음을 비교적 쉽게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내 멋대로 처리하게 될 때, 내 주변 사람들로부터 나에게 내려지는 평가는 아주 달갑지 않은 것이 된다. 나를 편협한 사람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편협한 사람이라고 낙인찍힐 때 그 앞날이 결코 밝을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편협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아서는 안 된다.

     [3] 윗사람이 미울 때

   그러나 참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나의 윗사람 또는 같은 또래 사람들이 나에게 싫게 보였을 때인 것이다. 내 멋대로 처리할 수 없는 이 문제는 직장인에게 큰 두통거리이다. 윗사람에게 무조건 굴복하자니 자존심이 허락지 않고, 반대로 그 분에게 거슬리면서 지내자니 직장의 위계질서에 문제가 생긴다. 어찌하여야 할 것인가?

     [4] 방해자가 나타났을 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들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방해자가 나타나게 마련인데 그러한 사람들과는 어떻게 지내어야 한단 말인가? 내 앞에서는 웃는 얼굴로 나에게 동정하는 말을 비단결같이 펴내다가 내 뒤에 돌아가서는 나를 모함하는 사람들, 또는 직접적으로 나에게 적대 행위를 하는 사람들, 이러한 사람들과 함께 직장에서 일해가자니 괴롭기 한이 없다. 이러한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무엇일까?

     [5] 악인(惡人)들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대체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나에게 악인이라고 보여지는 사람들과 어떻게 사귀며 지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악인에게는 참으로 종류가 많은 것이다. 그 악인들이 도덕적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람들일 경우도 있지만, 꼭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여러 면으로 나에게 거슬리는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악인으로 보이는 것인데, 그 모든 사람들과 나는 어떠한 방법으로 지내가야 하는 것일까? 이것은 참으로 인생의 큰 수수께끼인 것이다.

     [6] 모든 사람의 본바탕은 불성이다

   우리 불자들은 이 문제를 신앙의 차원에서 풀어가야 하는 것이다. 불자들의 신앙은 곧 부처님 전에 귀의하는 마음이다. 부처님은 어떠한 분이실까? 부처님은 진리를 깨치신 분이시다. 부처님께서 깨치신 진리는 어떠한 것일까? 그것은 절대 무한이다. 그러므로 그 진리를 깨치신 분[주체(主體)]과 그 분께서 깨치신 진리[객체(客體)]가 둘로 대립되어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깨치신 부처님 그 분이 곧 진리 그 자체이신 것이다. 부처가 곧 진리요, 진리가 곧 부처이다. 그 진리는 무한인 까닭에 온 우주에 두루하여 있다. 곧 부처님은 이 우주 구석구석에 안 계신 곳 없이 두루하여 계신 것이다. 그 부처님은 나에게도 계시고,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빠짐없이 두루하여 계신 것이다. 부처님은 무한의 생명이시므로 우리 모든 사람들의 생명의 본바탕은 부처의 생명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불성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 겉모양에 관계없이 모두 불성이 그 본질인 것이다. 그리고 불성은 절대이므로 불성이외의 어떠한 것도 이 우주 공간에 용납될 수 없다. 이 우주에는 불성밖에는 없다. 우리 불자의 신앙은 곧 불성에 대한 신앙인데, 그 불성은 모든 사람들의 생명의 본바탕인 것이니, 이 말을 바꾸면 우리의 신앙은 모든 사람들의 생명의 본바탕에 대한 믿음이라고 정리할 수 있는 것이다.

     [7] 악성(惡性) 인간이란 본래 없다

   이제 다시 현실 문제로 돌아가자. 내 앞에 나타난 악인, 그의 생명의 바탕은 무엇일까? 그 생명의 본질이 악성이길래 그 사람이 나에게 악인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그 사람은 악성 인간이라고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이때에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지 않은가?
   그것은 다름 아닌 불성의 문제 이다. 불성은 절대요 무한이라고 하였는데 그 불성을 부정하는 악성이 별도로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결코 그럴 수는 없다. 불성밖에는 없다. 불성에 반대되는 악이란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그 악인의 본바탕을 악성이라고 보았던 것은 잘못인 것이 분명하다. 그 사람의 생명의 본바탕 역시 불성이다. 그러면 불성에서 악이 발생될 수 있을까?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러면 내 앞에 있는 악인의 정체는 무엇일까?

     [8]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의 교훈

   법화경에는 상불경보살에 대한 법문이 있다. 옛날 옛적 어느 곳에 한 보살이 계셨다. 이 분은 모든 사람을 대할 때마다,『나는 당신을 공경합니다. 당신은 보살도를 닦아서 꼭 부처를 이루실 분이기 때문입니다』하고 외우고 다니면서「인간예배(人間禮拜)」의 수행을 하셨다고 한다. 이 분에게 이러한 예배를 받는 분 가운데에는 착한 분, 수행하시는 분도 계셨지만 그렇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자기를 악인이라고 규정하여 지내는 분들도 포함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이 보살의 인간예배는 반드시 모든 사람들의 환영만 받는 것이 아니었다. 욕하는 사람, 때리는 사람, 몽둥이질 하는 사람, 돌을 던지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러나 이 보살은 이러한 사람들의 악한 행동에는 전혀 무관심하게 지내면서 그의 예배행(禮拜行)을 부지런히 닦아갔다. 그 분은 마침내 불도를 이루니 곧 우리의 석가모니 부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 교훈은 우리가 인간관계를 어떻게 하여야 가장 이상적일 수 있을까를 아주 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간단히 이야기하면,「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로 부처의 성품[불성(佛性)] 말고는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성을 남김없이 드러내어 보는 눈이 곧 지혜의 눈, 반야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을 불성 인간이라고 보지 못하는 것은 내 지혜의 눈이 어둡기 때문인 것이다. 내가 어두워서 불성을 못 보고 악성을 본 것이다. 우리는 지혜를 열어서 오직 불성만이 가득한 이 세상과 사람들을 보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내 앞에 나타난 악인들, 그들은 참으로 악한 사람들이 아니라 나의 어두운 눈을 밝게 뜨도록 채찍질해 주고 있는 고마운 보살님들인 것이다. 우리는 그 분들로 해서 지혜를 밝혀 갈 힘을 얻는 것이다. 그 분들이 아니면 내 눈의 어두움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모두가 고마운 스승님들이시다. 이분들의 힘으로 나를 밝혀가기로 신심을 다짐할 때 나는 이미 악인들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불광법회 회장 , 원각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