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은 관광자원의 보고(寶庫)

연구실한담

2008-04-08     관리자

  봉황문을 지나 불이진여(不二眞如)의 불문(佛門)인 해탈문에 이르고, 숨모아 구광루에 오르면 우람한 대적광전이 신비로움을 더하고, 그뒤에 해인사의 중심인 대장경판전이 자리잡고 있다.
  팔만일천이백오십팔판에 앞뒤로 지성스레 경문이 새겨져 있으니 그 경판의 길이를 환산하면 113Km에 이르고, 경문의 길이는 830Km나 된다. 이는 국토의 남북을 관통하는 길이에 가깝고 경판의 총무게는 284톤이나 되어 장정 4,700명의 무게에 해당한다. 달에서 보이는 유일한 인공구조물인 만리장성은 몇 왕조를 거쳐 축성되어 6천Km나 된다지만 국토의 크기에 비한다면 그 상대적 길이는 대장경판의 경문이 더 길다.
  처음 만든 대장경판이 몽고의 침입에 불타고 말자, 무릇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곳은 그릇일 따름이니 그것이 이루어지고 깨어지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며, 그릇이 깨어지면 다시 만드는 것이 후예들이 할 바임을 통절히 느낀 것이다. 하여 원고를 수집하고, 사본을 정리ㆍ교정ㆍ조판하며 판목을 다듬고 경을 쓰고, 글자를 새기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몽고군에 짓밟혀 도읍을 강화로 옮겨간 피난살이 상태에서 16년에 걸쳐 수백명의 명필과 수천명의 조각사가 모여 경판을 새겼으며 마치 한사람이 쓴 듯 필체도 한결같으려니와 오자와 탈자가 없기로 국내외로 그 이름이 높다고 하니, 그 지성스러움에 머리가 숙여지며, 고려조의 도도했던 불교문화가 그립고, 외적의 침입속에서도 부처님의 가호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던 조상님들의 불심에 눈시울이 뜨거워져옴을 느끼게 된다.
  오늘날의 만리장성은 2500년전 주나라 말기에 북방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구축되기 시작했으며, 진시황 때만 해도 30만의 군병과 농민 수백만명이 동원되어 그 원형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외적의 침입을 막고자 대 역사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대장경 조성과 만리장성의 축성은 공통적이며, 또한 만리장성에도 백옥의 운대(雲臺)에는 불교경전이 새겨져 있으니 이 또한 우연한 일치는 아닐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려조 당시에 대장경의 인쇄를 둘러싸고 경쟁하였던 송나라와 거란에 대해 문화국으로서의 위신을 드높혔고, 인쇄ㆍ출판의 기술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고 하니 대장경 조성의 문화적 가치는 한량없다.
외침을 막기 위하여 굽이굽이 산등성이에 돌을 옮겨다 깨고 쌓았으니 그 웅위에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지고 만다. 그러나 만리장성이 단순한 힘의 결집에 불과하다면, 대장경 조성사업은 불심의 결정체라는 점에서 두가지는 판연히 구분 될 뿐만 아니라, 대장경은 인간완성에 이르는 팔만가지 방법을 고이담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적, 범인류적 보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보물을 얼마나 소중하게 다루고, 귀한줄 알고, 그 가치를 드높이려 노력하고 있는 것일까? 조사결과를 보면, ‘87년에 국립공원이나 도립공원을 방문한 관광객은 전체 관광객의 32.4%에 달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서 사찰 방문자의 비율은 주요한 몇 곳을 살펴보면 아주 높다. 즉, 계룡산 국립공원의 방문자는 동학사나 갑사 가운데 한 곳 이상을 들르고 있으며, 치악산의 경우 방문자의 95%가 구룡사에 들르고 있고, 가야산국립공원의 경우에는 80%의 방문자가 해인사를 찾고 있다. 그리고 경주의 경우 불국사와 남산을 찾는 사람은 경주방문자의 75%에 이르며, 속리산국립공원의 경우 법주사를 들르는 방문자가 전체의 66%에 이르고 있다. 이들 국립공원에 있는 사찰을 방문하는 방문자 수는 ’87년 한해만 해도 880만명에 달하여 국립공원 이외의 사찰을 방문한 관광객도 전체 관광객의 4.5%에 이르고 있으니, 1년간 유명사찰을 관광목적으로 방문하는 사람수가 1천만명을 상회한다고 보아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사찰방문 경향은 그 비율이 완만하게 증가하고 있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귀한 관광기회를 이용하여 사찰을 방문하고 있는데, 이들은 왜 사찰에 들르며,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며 배우고 이해하고 깨닫고 갈까? 80만명이 ‘87년 한해에 해인사 경내로 들어 왔는데 그들은 해인사에 왜 들렀으며, 그들은 무엇을 얼마나 알고 느끼고 간 것일까? 대장경판전에서 그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다짐을 하고 떠난 것일까?
  누구를 탓하고 무엇을 원망하랴만 우리는 단적으로 우리의 것을 크게 경시하고 있다는데 공통적이며, 사찰에서 조차도 자비로움을 실천하기에 크게 인색한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비교적 정확한 표현이 될까? 정이 깊고 눈물도 많고 한도 많은 민족이면서 어찌하여 우리 것을 갈고 닦아 내가 살찌고 남도 살찌우는데 등한해 할까?
  관광이란 부단히 새로움을 추구하는 가운데 체험을 통하여 문화적 충격을 받는 일이다. 그리고 관광은 오늘의 참담해진 산업사회의 폐해로 인하여 찌들어진 생명에 불을 붙이는 일이며, 기계화된 삶에서 벗어나 서로 손잡고 이해하며 살아 갈 수 있는 인간적 삶의 표현이다. 때로 관광객들이 방탕하고 가무에 탐닉하며 주색을 밝히기 때문에 비난을 받는면도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관광의 본질적 가치에 대해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어느 인간을 못났다 지탄하면서 어디에서 상구보리하고 하화중생한단 알인가? 그들과 희노애락을 같이 하면서 그들의 꺼져가는 생명의 불빛을 밝혀주어야 하지 않을까?
  북소리가 둥둥둥 울리면 발길은 북소리 나는 곳으로 모이게 된다. 새도 짐승도 잠에서 깨어나서 북소리를 들으려고 날아든다. 정적을 깨는 북소리는 점점 더 세어져가고, 하나하나의 소리는 커다란 파동이 되어 산속을 울리고, 사바세계로 퍼져나가며 온누리에 메아리친다. 북채를 들고 있는 젊은 스님의 얼굴에서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하다가, 방울이 드디어 땀줄기가 되어 흘러내리고 가사가 젖는다. 북소리를 듣는 개울가 여관방의 미물도 옷깃을 여미고 앉는다. 이윽고 북소리는 멎고 산속은 정적에 감싸이나 살아 숨쉬는 소리는 산천을 진동한다. 깨어나서 세수하고 마음을 다듬으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빗으로 빗겨내리듯 한가닥씩 마음의 올을 고루기 시작하면, 꺼져들던 삶의 의미가 샘물처럼 솟아 오른다. 그리고 다짐을 한다. 보람있게 살아야 한다고, 도우며 살아야 한다고, 먹고 사는게 전부가 아니고 인간지고의 가치를 실현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다짐을 한다. 비록 그 다짐이 쉬이 무너지긴 하지만.
  이상에서 자그마한 파문이 귀중한 체험으로 관광객의 인식도면에 새겨지는 과정을 묘사해 보았다.
  해인사에만 해도 고려대장경, 보안당, 종루, 고승과 명인의 발자취, 탑, 암자, 자연경관 등등 관광객의 뇌리를 칠 수 있는 관광자원이 무수히 많다. 그런데도 의상스님이 게송으로 읊으셨듯이 중생들이 제나름의 그릇으로 관광을 하고마는 것이나 아닐까? 따뜻이 맞아주어야 한다. 그들의 가녀린 생명의 불꽃을 되살려야 한다. 사찰이야말로 오늘의 시들어가는 인류의 생명에 기름을 끼얹고, 내일의 세계를 열수 있는 관광자원의 보고(寶庫)임에 틀림없다.   佛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