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불교

오늘을 슬기롭게 사는 길

2008-03-26     관리자

     ―현대「정보론」을 중심으로―

 현대 과학철학의 분야 중에는 「자동제어 이론」(cybernetics)이라는 새로운 철학이 있다. 이 자동제어이론은 미국의 수리철학자인 위너(N,Wiener)라는 사람에 의하여 구성되었는데 그것은 이미17세기에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에 의하여 통일과학의 시도로서 제창되었던 것이다. 자동제어이론은 전통적인 과학상식으로는 매우 규정하기 어려운 하나의 과학의 과학이론으로서 동물이나 기계에 있어서의 자동제어와 통신을 바탕으로 하는 일종의 종합과학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이론은 인간의 사고의 잠재력을보다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자동제어의 도구를 창안해냄으로서 통일적인 일의 수행과 인식을 성취하려는 것이다.

 오늘날 전자계산기는 철두철미 인간의 신체적 능력을 대신하는 도구인 동시에 사람의 사고를 대신하는 고도의 정밀한 도구라는 점에서 자동제어 이론의 분담자가 되고 있다. 오늘날 인류는 대체도구(代替道具)로서의 여러 가지 인공적인 기기들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독일의 발터 슐츠라는 철학자에 의하면 사고기기(思考機器)는 무엇보다도 전적으로 체력을 대신하거나 그것을 넘어서는 기계, 예를 들면 인간이나 말보다 훨신 빨리 움직이는 자동차나 항공기에 비교할 만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항공기는 인간이 자신을 위해서 먼 목적지에 빠른시간 내에 체력의 노고없이 쉽게 도달하기를 바랐던 꿈을 도구의 힘에 의하여 실현한 기계다.

 항공기가 먼 거리를 단시간 내에 비행하여 사람이 소망하는 목적지에 도달시켜주는 것은 단순한 자연적인 방식이나 또는 유기체(생명체)적인 방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인공적으로 창안해 만든 모터와 동체와 날개의 조립에 의한 도구의 방식에 의해서 이룩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콤퓨터는 인간의 사고를 대신하는 사고기기라고 할 수 있다.

 자동제어 이론은 먼저 동물의 자동제어장치의 통신체계를 근거로 해서 체계화한다. 거북은 시각세포나 촉각세포를 자유로히 구사할 수 있다고 한다. 거북은 광원(光源)으로 향하여 직진할 수 있으며 만일 공복이 되어 기아(飢餓)에 이르게 되면 스스로 콘센트로 충전하는 것이 가능하며 그리하여 스스로 배를 채운 뒤에 다시 여행을 계속한다고 한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여러 가지 자동제어장치의 회로계(回路系)를 가진 기계를 갖고 있다. 예를 들면 냉장고가 그것이다. 냉장고는 냉각기기로서 냉각도가 기준치와 비교하여 차이가 생기면 냉장기계에 자동적으로 전달하여 냉각의 상승과 하강을 제어(制御)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기계제(氣械制)와 유기제(有機制)의 차이점이다. 다시 말하면 자동차와 같은 기계는 운전기사가 있어야 움직일 수 있으나 냉장고와 같은 자동제어장치는 운전기사가 없이 스스로 일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운전기사의 역할은 곧 정신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만일 운전기사가 자동차에 타고 있다 하더라도 그가 정신이 혼미해졌다면 즉시 자동차는 전복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냉장고는 그가 기계이면서 동시에 기계를 조종하는 일종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 정보(情報)를 갖고 있다.

 대체 어떻게 물질에 불과한 기기가 차고 더움을 알아서 모터를 돌아가게도 하고 정지하게도 하는 자동제어의 일을 수행할 수 있을까. 냉장고 속에는 사람이 보지 않을 때 누가 몰래 침입하여 냉각도를 조절해 주는 것일까. 신비로운 일이다. 인간이 냉장고를 만들 때까지는 하나의 물질적 기계에 불과하지만 일단 제조가 완료된 후에는 그것은 하나의 사고기기가 되는 것이다. 극단적인 표현법을 쓰면 정신을 가진 기계다. 이와 같이 인간의 정신이나 사고를 대신하는 그 작용을 「정보」라고 한다. 대체 이 정보란 무엇인가. 이 자동제어의 회로계에 나타나는 「정보」는 물질이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정신이라고도 할 수 없다.

 오늘날 콤퓨터를 비롯한 많은 종류의 사고기기들은 기억, 자발성, 학습능력, 결정능력, 지상일반등 자동제어능력을 갖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안다. 독일의 귄터라는 철학자는 동물이나 인간이 행하고 사고하는 동작을 모방하는 인공물이 등장한 이래 『대체 어느 것이 정신이요 어느 것이 물질인가를 명료하게 구별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하게 되었다』라고 토로하고 있다.

 이것은 정신과 물질 간의 차별에 대한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초월하는 것이다. 오늘날 원자(原子)라는 말이 단지 물질도 정신도 아닌 어떤 제3의 존재를 지시하는 언어로 해석해야 하는 것처럼 정보론에 있어서의 「정보」라는 말도 정신성과 물질성의 두 면을 지니고 있으면서 그 둘을 초월한 제3의 존재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주관의 측면인 정신과 객관의 측면인 물질과의 중간에 정보라는 제3의 어떤 것이 있어 그것이 오히려 앞의 둘을 매개한다는 방식의 사상은 이미 불교의 교리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구사론(俱舍論)이나 비담부(毘曇部)의 집이문론내지 품류론에는오온설(五蘊說)과 12처 18계설에 있어서 오근(五根) 오경(五境)의 십처(十妻)가 색온(色蘊)에 배당될 때 색식(色識)이라는 제3의 의식이 형성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불교의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식(六識) 십팔계(十八界)설의 육식(색식, 성식, 향식, 미식, 촉식, 법식)은 바로 주관(정신)과 객관(물질)을 매개하고 그 둘을 초월하는 의식현상이다. 여기서 근(根)은 식(識)의 소의(所依)요 경(境)은 식의 소연(所緣)이다.

 유식론(唯識論)에 의하면 식(識)은 오식(五識), 의식, 마나식(七識), 알라야식(八識)등 팔식이 있는데 사람이 죽으면 육식은 칠식인 마나식에 잠재화되고 다시 마나식은 제팔식인 알라야식에 합류하여 흘러간다고 한다.

 알라야식은 개적인 생명의 근본류(根本流)로서 무한한 과거로부터 영겁의 미래를 향하여 흘러오고 흘러가는 근원적인 생명의 당체라고 한다. 하나의 생명 근본류는 어떤 독자성을 가지면서 다른 생명과 융합하며 흘러간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상태의 존재를 식(識)이라고 말하며 또 다른 경우에는 공(空)이라고 말한다. 물론 여기서 식과 공은 별개의 의미를 갖고 있지만 「공」이라는 말은 여러가지 의미로 쓰인다.

 아뭏든 생명의 근본류로서의 「식」이나 「공」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단순한 물질적 존재도 아니며 또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물질에 대립하는 정신도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잠재적인 힘」으로서의 생명류로서 그 둘을 매개하고 융합하는 그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많이 사용하는 공(空) 식(識) 생명류(生命流) 중유(中有)등은 서로 상통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 인간의 생명유전의 양상은 소위 업(業)에 연유하여 흘러 오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구사론에 의하면 「세상의 분별은 업에 의하여 일어나며 생각 즉 식의 소작(所作: 만든 바)이요 생각은 즉 의업(意業)이요 소작(所作)은 소위 신어(身語)이다」라고 설하여져 있다. 이것은 신(身) 구(口)  의(意)의 소위 삼업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것들은 업이 되어 알라야식의 영역에 머물러 하나의 종자 또는 훈습(熏習 : 여기서 훈습이라는 말은 잠재적인 힘을 뜻함)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은 그 생명류로서의 잠재력이 분별지로 또는 기억으로 또는 성격으로 또는 체질로 형성되는 것이다. 불교의 궁극목표는 이러한 업을 넘어서는데 있으나 불경의 이러한 「식」(識)이나 「업」(業) 혹은 「공」(空) 등의 설명은 똑같은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현대과학이나 과학철학에서 말하는 「정보」(information)라는 제3의 지대를 알리는 논리구조를 이미 갖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