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의 운수시절] 몰현금(沒鉉琴)을 들어라 3

老師의 운수시절

2008-03-22     관리자

  ⑧봉은사 판전선원시절

 망월사 계단에서 인례(引禮)를 맡은 스님은 지금의 조계종 종정이신 고암(古庵)스님이다. 당시는 이름을 상언(尙彦)스님이라 했었다. 그해 삼동 결제는 봉은사 판전선원이었는데 역시 전쟁한 선객들이 운집하였다. 정금오(鄭金烏) 이단암(李檀庵) 이탄옹(李呑翁) 이백우(李白牛) 설석우(薛石友) 하정광(河淨光) 정운봉(鄭雲峰) 그밖에 여러 스님이 계셨는데 과연 눈 푸른 남자들뿐이었다. 정진도 짬지게 계속하였지만 당시 외호도 훌륭했다. 당시에 대중들의 이름을 보면 다들 짐작이 갈 것이다. 설석우스님은 한때 정화운동 과정에서 비구승종단의 종정을 지내셨고 그밖에 스님들 모두가 견성한 스님으로 오늘의 한국불교를 형성해간 주된 산맥인 것으로 알 것이다. 금오스님은 그 당시 이름을 운정(雲頂)이라 하였었다. 그때 외호는 을축년 장마때 78명의 인명을 구한 것으로 너무나 유명한 나청호(羅晴湖)주지를 잊을 수 없다. 그때에 여러 사중소임을 맡은 스님들이 선방대중을 극진하게 외호하였었다. 워낙 한암 조실스님이 생불(生佛)이라는 호가 널리 퍼져 있기도 하였고 유상궁 백상궁 등을 통한 궁중공양도 종종있었다. 봉은사 판전선원에서는 비록 한 철을 지냈지만 선방을 중심한 사중파 사부대중의 협동단결은 나의 기억에서 길이 잊혀지지 않는다.

  ⑨ 寒 岩 스님의 마지막 행각

 을축년 겨울 안거를 마치니 큰스님께서 행각을 나서게 되었다. 물론 시자인 내가 모시고 떠났다. 주로 서울과 강화 개성지방 일대를 다녔다. 서울에 남삼막 · 북승가 · 서진관 · 등불암은 말할것도 없고 문수암 태고암과 강화 전등사 · 정수암 · 적석사 ·백련암 보문사를 두루 참배하였다. 생각해 보면 우리 조실스님의 행각 뿐만 아니라 외부출입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는가 한다. 이 행각을 끝으로 오대산에 들어가시어 열반 때까지 오대산에서 내려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화에서 발을 옮겨 장단 화장사 · 법련사 · 원통암 그리고 개성의 경천암 자리와 칠성암 지족암을 둘러 박연폭포도 돌아보았다. 그런데 내가 스님을 모시고 행각하기는 이것이 처음이었고 이 여행 끝에 서울에서 오대산으로 들어가시던 그 행차가 마지막이었다. 형편닿는 대로 내 인상에 남은 우리 스님상을 언젠가는 그려 볼까 하지만 여기서는 행각하며 있었던 일을 기억나는대로 한 두가지 말해 볼까한다.

스님은 어느 절에 가시던지 가는 곳마다 상단은 말할 것도 없고 중단의 산왕단 · 조왕단까지 고루 참배하셨다. 나는 그것이 못마땅해서 『신장단이나 조왕단 산신단에 왜 절을 하십니까? 신장단은 우리의 하인이 아닙니까?』하니 스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높은 하인에게는 어린 주인이 공대하는 법이니라.』나는 그 말씀을 듣고 신장단에 대한 아만을 버리고 고루 다니며 예배했다. 또 스님은 워낙 선지식으로 고명한 터이긴 하였지만 예고없이 갔는 데도 도처에 대중이 모여 재식을 하는 것을 종종만났다. 당도하면 으례 법문을 청해온다. 스님은 아무 부담 주지 않으시고 곧 응낙하시고 법상에 오르셨다. 또 가는 곳마다 종이를 내어 놓고 글을 써달라고 청해왔다. 어떤 때는 법당주련이나 칠성각 주련일 때도 있고 조왕단위목일 때도 있다. 스님은 거부하지는 않으시고 곧 붓을 잡으신다. 그런 때는 의례 『괜히들 그러는구만……』하시며 써내려 가시는데 끝에 이름은 결코 안쓰셨다. 어떤 때는 가시다가 글을 읊으실 때도 있었고 나는 그것을 받아 기록하였다. 이것은 여러 편이 된다. 한 번은 강화에서 보문사를 건너가는데 도중에 내가 밥을 먹었다. 찬이 없어서 길가 집에 들려 찬을 청하니 새우젖을 준다. 나는 그것이라도 받아서 잘 먹었다. 배를 타고 보문사에 이르러 세수하고 법복을 입고 법당에 참배하였다. 법당에서 나오니 웬일인지 입술이 별안간 부어터져 대단히 아프다. 스님에게 이사실을 고하니『너 아까 밥 먹을 때 무엇을 먹었느냐?』물으신다. 나는 사실대로 아뢰었다. 스님은 『마땅히 참회 하여야 하느니라 』하시는데 나도 큰 벌이라도 나릴 것 같아 겁이 나서 근 한 시간동안을 법당에서 절을 했다. 잘 때까지 그렇게도 입이 헐어터져 아프던 것이 잠에서 깨어보니 멀쩡하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새우젖 먹었다고 나한님이 영험을 보이신 건가. 참회하니 다시 평치하였는가?』곰곰히 이런 생각만을 하면서 보문사를 나왔는데 나는 지금도 그때 일이 어제 있었던 일처럼 기억에 역력하다.

  ⑩오대산에 들어가던 때

 우리 스님, 한암조실스님께서 오대산에 들어가신 것이 병인년이다. 그러니까 내 나이 21세, 서기 1926년이다. 그해 오대산 상원사에 들어가시어 입적때까지 평생을 오대산에서 내려오지 않으시고 오직 납자를 제접하시고 풀무질하며 방망이질 하는 종사의 거룩한 생애를 마치셨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행각하는데는 길이 있었다. 요즘 같으면 기차를 타던지 버스를 타던지 편리한 교통편의가 얼마든지 있지만 그당시 선객들이 행각할 때는 의례 보행이었고 따라서 중간에 머무는 곳이 정해져 있었다. 그것을 사참이라 하여서 하루길을 절에서 출발하여 절에 당도해서 쉬었고 다음 새벽 출발할 때는 도시락을 싸들고 또 다음 사참을 대어 갔었다. 이 말은 납자행각에서 여관등 속가에서 숙박하는 일이 없이 반드시 절에 들어가서 밤을 지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 한암 조실스님은 이점에서도 너무나 철저하셨다. 서울에서 오대산에 들어가는 도중에 해가 저물게 되면 절을 찾아 가는데 그 절은 20리나 되는 길도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그 길을 되돌아 나와서 또 오대산을 향하여 걷곤 하였다. 이렇게 가다보니 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좀 과하게 말하면 오대산을 향하여 갈지자(之)행로가 된 셈이다. 50리를 들어갔다. 다시 나와 가다 보니 오대산까지 언제나 당도할지 모를 행각을 나선 것이다. 이리하여 서울 봉은사를 출발한 것이 그해 2월 초인데 오대산에 도착한 것은 3월 중순이었다. 꼭 40여일 만에 오대산에 당도한 것이었다. 나는 스님을 모시고 어디에나 수행하면서 『이것이 도인의 행각인가? 행각 속의 공부인가?』괄괄하리만치 논리적인 나였지만 우리 조실스님의 말 없으신 행각도법에는 꼼짝없이 기를 콱 죽이고 아주 뿔빠진 소처럼 조실스님을 따라 마구 걷고 걸었다.

 해를 따져 보면 지금부터 52년 전인데 그때에 정정한 걸음으로 빠르지도 않으시고 느리지도 않으시고 시종 한결같이 걸으시던 우리 스님, 우리 한암 조실스님. 나는 걸망을 지고 그 거룩한 뒤를 따라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가파른 길을 오르내리는 저 때 일을 정말 행복하게 회상하는 것이다.

  ⑪잊지 못할 상원사 선방시절

 오대산에 들어간 그때는 내 나이도 젊은 때였지만 정말 바쁘게 설쳐 댔다. 선방의 잔 일은 도맡았고 물론 조실스님 시봉은 나의 본직이다. 선방 다각(차 공양을 맡은 책임)·정통(목욕물 데우는 책임)·청소, 그리고 웬 바느질  할 일은 그렇게도 많았는지......오늘날 화학섬유로 된 옷을 입으시는 스님들은 짐작도 못할 것이다. 누더기 옷이니 틈만 있으면 바느질을 해야 했다. 조실 스님 빨래, 푸대리……푸대리는 풀먹여 다리미질 한다는 말이다. 이런 속에서 나는 화두를 들었고 참선시간을 거르는 때가 없었다. 앞서도 말한 바이지만 나의 공부는 용성조실스님으로 부터 받은 화두다. 『조주는 인삼도무오』(趙州因甚道無ㅡ조주는 어찌하여 없다 하였을꼬?) 하는 무자화두였는데 하여튼 화두를 들고 내딴에는 애를 썼다.

 그해 여름안거의 상원사 선방대중도 정말 쟁쟁한 납자들로 채웠다. 하동산(河東山)스님 장설봉스님 이탄옹스님 ……정금오스님 마경선(馬鏡禪)스님……지금 기억에 남는 분만 해도 이런 눈푸른 납자들이었고 그밖에 쟁쟁한 발심납자들이 약 20명 가량 모였다. 그런데 금오스님은 2년전에 만주까지 가서 수월(水月)스님을 뵙고 왔었다.

 그때는 아침공양후 조실스님께서 매일 법문에 있었는데 선문촬요를 중심으로 법문 하셨었다. 5월 단오날 금오스님의 발기로 용맹정진을 시작했다. 용성 조실스님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시기를 『조주는 어찌하여 없다 하였는고?』하며 공부를 지어가되 만약 잠이 오거든 왜 없다 하였나?하며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마음의 눈 , [心眼]으로 보도록 하라고 일러 주셨었다. 나는 용맹정진하면서 줄곳 『조주는 인삼도무오』하며 공부하다가 월 단오날 밤에는 더욱 분발심을 내어 용성조실스님 말씀대로 조주는 왜 없다 하였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뚫어지게 보려고 하면서 참구 해 나아갔다. 이렇게 애쓰면서 오직 『이 도리』를 명백하게 보려고만 발버둥치며 애쓰고 있는데 그러는 중에 내 정신은 불이 타오르는 듯 활활했었고 눈은 감고 있었는듯 했다. 그렇게 애쓰고 있던 어느 순간에 눈감고 있는 내가 번개치는 듯한 충격적인 느낌이 온 몸을 뒤흔들었다. 나는 눈을 떠서 자기를 돌이키니 정말 어두운 밤중에 밝은 달을 본 것으로 비유가 안되었다. 나는 여전히 제자리에 앉아서 다시 화두를 살피니 치밀어 오르는 팔팔한 기운과 자신을 억누를수가 없었다. 나는 참을 수가 없어 벌떡 일어나며 손뼉을 쳐댔다. 그리고 외쳤다. 『몰현금(沒鉉琴)ㅡ줄이 끊어진 거문고)을 들어라. 몰현금을 들어라』소리치고 손뼉치며 다음의 게송을 외어댔다.

 오대오월오경야에 홀오대천몰현금이로다 약인문아조주의인대 지언임하호액백이라 하리라(ㅡ오대산 오월날 밤인데, 문득 깨달으니 대천세계가 줄끊인 거문고 일러라. 누가 와서 나에게 조주의 뜻을 묻는다면 다만 말하기를 숲아래 여우 겨드랑이 희다 하리라.)

 나는 손뼉을 치며 펄쩍펄쩍 뛰었다. 그때 금오스님이 입승이었는데 나에게 달려들어 『이놈이 또 미쳤나?』하며 뺨을 세번이나 후려쳤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기운을 이기지 못하여 역시 펄쩍펄쩍 뛰면서 대꾸하였다. 『네가 미쳤다. 네가 미쳤다. 너는 조실이 아니다. 네가 몰현금을 아느냐? 몰현금을 아느냐?』하며 외쳐댔다. 내가 이러는 통에 대중들이 모두 일어서 저절로 방선이 되었다. 그리고 제각기 하는 말이 『망상 끓이지 말고 공부나 착실히 하라』했다. 그때가 밤 아홉시 경이었는데 나로 인하여 그대로 방선하였다.

이 사건은 실로 나의 3년 각고의 일단의 수확이 아닐 수 없다. 삼일암에서 선을 만나고 용성 조실스님에게 화두법을 배워 이제 참선공부가 결코 허망치 않다는 것을, 바로 됐던 모로됐던 나로서는 확증을 잡은 셈이다. (계속)